제 263화
263. 태풍 속으로 1
새하얀 태권도 도복에 노란띠를 착용한 미소가 쪼르르 달려왔다.
왜 그렇게 신이 났나 했더니 노란띠에 새겨진 자기 이름 때문이었다.
“이거 봐요 삼촌~. 태권 선생님이 여기에 내 이름도 새겨줬어요! 이쁘죠?”
미소가 내민 노란띠 끝부분에는 분홍색 오버로크로 ‘정미소’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노란띠의 다른 한쪽에는 파워터프걸의 캐릭터 5명이 오버로크로 새겨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미소는 태권도를 배울 때 자기 도복을 입은 적이 없다.
유치원에서 배울 땐 언제나 도복을 빌려 입고 띠도 그냥 준비된 것만 사용했을 뿐이었다.
개인 도복과 개인 띠를 하는 데는 돈이 들기 때문에 미소는 엄마가 힘들까 봐 말하지 않았다고 한 기억이 난다.
“우와~ 너무 귀엽다. 좋겠네 우리 미소.”
리액션을 크게 했더니 미소가 까르륵 웃는다.
“네! 완전 좋아요. 그리고 이것도 보세요.”
미소는 몸을 돌리더니 자기 등 뒤를 가리켰다.
미소가 입고 있는 도복의 등에는 분홍색 오버로크로 ‘정미소’라고 새겨져 있었다.
“태권 선생님이 여기에도 내 이름을 새겨줬어요!”
미소가 신이 나 방방 뛰는 모습에 정상봉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다.
“미소야. 태권 선생님한테도 인사해야지.”
“아 맞다! 삼촌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뛰어오다 깜빡했어요.”
내게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 까먹었다는 게 왜 이리 이뻐 보이는지.
미소가 정상봉에게 몸을 돌려 허리를 깊게 굽혔다.
“감사합니다! 태권 선생님!”
씩씩한 미소의 반응에 정상봉의 입이 찢어지려고 한다.
“우리 미소. 앞으로도 열심히 태권도 해야지.”
“네! 이제 태권도 도장에도 나갈 거예요!”
“그래야지. 빼먹지 말고.”
유진이 역시 정상봉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내게 자기 도복을 자랑했다.
유진이는 한쪽은 분홍색으로 ‘정유진’ 그리고 다른 한쪽은 푸른색으로 ‘청명’이라 새겨진 흰 띠를 차고 있었다.
정상봉의 세심한 배려에 유진이도 날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오빠. 진짜 이쁘죠?”
“근데 넌 흰 띠네? 미소는 노란띠던데. 풉.”
장난으로 놀렸더니 유진이가 날 쳐다본다.
“그러면 오빠는요?”
순간 슬그머니 딴청을 부렸다.
다른 운동은 조금씩 맛은 봤는데 태권도만큼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남들은 군대에서 단증 하나씩 가지고 나온다지만 나는 고아라 군대도 가지 않아 남들 다 가진 단증 같은 것도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어릴 땐 형편 좋게 태권도 도장을 다닐 상황이 아니어서······.”
가짜 눈물을 쥐어짜며 신파극을 벌여보려 했지만 눈물이 잘 나오질 않아 실패했다.
“오빠도 흰 띠구나.”
난 괜히 발끈해 정상봉에게 물었다.
“상봉아. 나 정도면 1단으로 쳐 줘야지. 내 실전 실력은 너도 알잖아.”
태권도 도복을 입은 정상봉이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흰 띠 드리겠습니다. 팀장님.”
냉정한 녀석.
태권도는 예를 중요시한다며 그런 반칙(?)과 특권(?) 따위는 용인할 수 없단다.
그사이 유진이와 미소가 어디선가 흰 띠를 가져왔다.
“오빠도 나랑 같이해요. 적어도 우리 미소처럼 노란띠 딸 때까지.”
흰 띠라는 말이 귓가에 윙윙 맴돌기 시작했다.
미소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바지를 흔들어댔다.
“삼촌도 나랑 같이해요!”
미소가 하고 싶다면 해 줘야지.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미소가 직접 손으로 내 허리에 흰 띠를 둘러주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됐다! 삼촌도 이제부터 흰 띠!”
그렇다고 확인사살을 할 것까진 없잖니 미소야.
분명 유진이에게 격투를 가르치러 왔는데 나까지 함께하게 생겼다.
“자 그러면 인사부터 할까요?”
앞에 선 정상봉이 힘차게 외친다.
유진이와 미소가 자세를 잡으며 에어로빅장이 떠나가라 외쳤다.
“태권!”
하지만 난 삐딱 선을 타며 외쳤다.
“태껸······”
정상봉은 마치 ‘이크 에크’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난 금메달리스트를 앞에 두고 장난을 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아아악! 다리! 내 다리! 다리 찢어져······!”
스트레칭만으로도 지옥을 경험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스트레칭을 한 뒤 극 중에서 사용하는 발차기 자세를 잡아주는 훈련이 30분간 이어갔다.
그리고 이번엔 내 차례.
난 유진이를 상대로 미트를 내밀었다.
“원투 그래. 휙. 피하고. 올려쳐! 시합 나갈 건 아니니까 힘은 신경 쓰지 말고 자세만 신경 써. 어깨 힘 빼고!”
유진이는 팔 힘은 별로 없었지만 미트에 정확히 맞추는 능력과 동체 시력만큼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그 덕에 짧은 레슨만 했는데도 꽤 괜찮은 자세를 보여준다.
태권도에 이어 권투 연습이 이어지자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헉헉. 나······ 죽어······.”
유진이가 헉헉거리며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순간 미소가 정수기에서 물을 가져왔다.
“엄마! 물 마셔!”
미소가 쪼그려 앉아 물을 내밀고는 엄마 이마를 향해 힘껏 손바람을 부쳐준다.
유진이는 하얗게 불태웠다면서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미소야······ 고마워······.”
나는 다 죽기 직전의 유진이를 격려하고 샤워실로 데려다줬다.
“오빠. 저 이러다 액션 배우 해도 될 것 같아요.”
“꿈 깨. 자세는 좋아도 체력이 떨어져서 안 돼.”
하지만 유진이는 너무 힘들어 혼이 나가버렸는지 내 말을 듣지 않고 혼잣말을 해댔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땐 진짜 성룡도 좋아했는데. 아닌가 홍금보 아저씨였던가?”
두 사람의 생김새는 전혀 다른데?
하여간 그렇게 액션 스타를 꿈꾸는 정유진의 고달픈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잠실 LT 엔터테인먼트 본사.
한국 재벌 5위인 LT 그룹의 계열사로 최성문 감독의 <경계 너머로>의 배급을 맡은 한국 최고의 영화 배급사다.
오늘은 시사회와 상영 일정에 관한 회의 때문에 관계자 모두가 LT 엔터테인먼트 영상사업 본부로 모였다.
경쟁작들이 <경계 너머로>를 피해 개봉을 미뤘기에 관계자들 모두가 크게 부담감을 던 상태였다.
회의실에 도착하자 최성문 필름에서 나온 표은미 실장과 투자사인 KM 파트너스의 김문동 대표 그리고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매니저들이 참석해 있었다.
한참 인사를 나누는데 LT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신종기 대표가 회의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예. 대표님.”
인사를 받은 신종기 대표는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자자. 일정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의라고 하기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지만 이런 자리를 갖는 것만으로도 사정을 봐주는 거였다.
“블라인드 시사회는 다음 주. 그리고 기자 시사회는 3주 뒤인 9월 1일. 그리고 VIP 시사회는 9월 24일로 잡았습니다.”
현재 <경계 너머로>의 촬영은 98%까지 진행된 상황이고 이번 주 내로 촬영이 종료된다.
그 후 배급사는 촬영된 결과물의 대중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시사회를 연다.
그중 블라인드 시사회란 일명 ‘안알랴줌’ 시사회.
영화를 개봉하기 전 관객들에게 일절 정보를 주지 않고 관객들을 모은 다음 가편집본을 상영하는 걸 말한다.
그걸 토대로 제작사와 배급사는 영화의 미흡한 점을 채우거나 편집에서 수정하게 되고.
이어서 신종기 대표는 연예인들이 참석하는 VIP 시사회에 관한 부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든 배우는 VIP 시사회에 1인당 3명의 연예인 지인을 데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 굴렁쇠 엔터에는 5명을 요구한다.
“구 실장님. 가능하죠?”
구성철 실장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풍이가 주연이니 그 정도는 당연히 준비해야죠.”
대답을 마친 구성철 실장이 날 쳐다본다.
“어때? 괜찮지?”
“예. 이미 유진이랑 미소 하루 강하나에 체리블라썸까지. 모두 그날 스케줄은 비워뒀습니다.”
신종기 대표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거 요즘 잘 나가는 사람들은 다 불러올 기세군. 고마워서 어떻게 하나?”
그 순간 최양섭의 매니저로 참석한 이찬동 실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희도 양섭이를 응원하기 위해 영인이랑 A급 배우들이 다 참석할 예정입니다.”
“아이고. 에이스 엔터야 당연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우리가 함께하는 작품이 몇 개인데. 안 그래 이 실장?”
“하하하. 그건 그렇습니다.”
왁자지껄한 웃음 속에 VIP 시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대충 진행이 마무리되어갈 무렵 이은주 팀장이 이태풍에 관해 언급했다.
“태풍 씨의 ‘난독증’에 관한 내용을 홍보 메인 자료로 쓸 건데 괜찮으시죠?”
“예. 이미 극복한 일은 미담일 뿐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혹시 태풍 씨 부모님과의 인터뷰도 가능할까요?”
어린 시절의 일화를 엮어서 홍보하고 싶다는 말에 다들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난 태연히 대답했다.
“안 그래도 부모님 두 분께서도 스케줄을 비워뒀습니다.”
이틀 전.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이태풍의 부모님께도 전화 연락을 드렸었다.
두 분은. 언제든 그들의 아들을 위해 시간을 내겠다고 약속을 한 상태였다.
신종기 대표가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연다.
“정 팀장이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를 다 해둬서 우리가 할 일이 반으로 줄었어.”
이은주 팀장도 맞장구를 친다.
“그러게요. 진짜. 정 팀장님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리고 우먼즈에서도 9월호 특집 기사로 실어준다고 한다는데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신종기 대표가 회의실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이거 홍보비를 기자들이 아니라 정 팀장한테 줘야겠는데? 하하하.”
홍보와 관객 수는 정비례한다.
덕분에 날 바라보는 모두의 눈빛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신종기 대표가 기꺼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오케이. 정 팀장이 이 정도로 나서는데 나도 그냥 있을 순 없지. 홍보비를 넉넉하게 배정하겠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리고 정 팀장. 이번 영화가 성공하면 내 자네에게는 제대로 한 턱 내지. 기대하라고.”
그 순간 기회다 싶었다.
“그 대접. 밥이 아니라 혹시 LT에서 준비하는 차기작 배역 하나로 받을 수 있을까요?”
“그래. 유진 씨나 태풍 씨나 어느 쪽이든 오케이일세. 우리 LT에서 제작 중인 영화라면 말만 해.”
LT 엔터는 배급사이기도 하지만 제작사로도 손꼽힌다.
그러나 내가 출연시킬 사람은 유진이나 이태풍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아니라 체리블라썸의 유은아를 조연으로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신종기 대표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돌의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건 이 업계에서는 거의 상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이돌을 꽂아달라고? 허허. 이거 참······.”
“다음 주 ‘먹방의 대가’에서 조연으로 나올 겁니다. 거기서 은아의 연기력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잠깐 고민하던 신종기 대표가 되묻는다.
“연기력에 자신이 있다 이건가?”
“예.”
“그러면 대체 어떤 작품을 원하는지 들어나 보지.”
“LT 엔터에서 제작 중인 ‘시공의 발레리나’에 조연인 예림이 역을 주셨으면 합니다.”
<시공의 발레리나>는 나형준 감독의 입봉작으로 한국 발레리나들의 성공과 치정 싸움을 다룬 영화로 저예산 영화.
LT 엔터에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아 제작비도 홍보비도 적게 배정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난 <시공의 발레리나>가 극장에 내려올 때의 성적을 알고 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1년 2월 25일]
-PM 01:00 나형준 감독 <시공의 발레리나> 관객 수 485만. 스크린 아웃.
큰 기대가 없는 작품을 언급하자 부담이 없어진 신종기 대표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 작품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 같군. 그런데 은아가 발레를 할 줄 알던가? 거기 출연진은 모두 발레를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예. 4살 때부터 배웠답니다. 악기도 가능하고요.”
“잘됐군. 나 감독과 최종적으로 상의해야겠지만 난 오케이야.”
감독의 허락은 있어야겠지만 제작사의 낙점을 받아둔 것만으로도 7부 능선을 넘은 거나 마찬가지다.
대화를 마치자 신종기 대표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거참. 사람들이 정 팀장 정 팀장 하더니 이유가 있었군. 기회가 나면 놓치질 않네. 이 친구 이거 완전 저격수야 저격수.”
“죄송합니다.”
머리를 긁적였더니 신종기 대표가 껄껄대며 웃는다.
“칭찬이야. 칭찬! 기회가 왔는데 못 잡으면 그것만큼 멍청한 게 없지. 안 그래?”
고개를 끄덕인 신종기 대표가 모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면 이번 ‘경계 너머로’. 최성문 감독님 전작들처럼 천만 가~ 봅시다.”
이태풍이 그토록 고생했던 결과물이 이제 기지개를 켜고 세상을 향해 나서기 직전이다.
* * *
회의를 마치고 나온 순간 최소혜 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김애련 전무와 인터뷰 약속 잡았어. 사회를 이끄는 여성 기업인이라는 주제로 잡은 거니까 의심하는 사람도 없을 거고. 만나고 나서 다시 연락할게!
“조심하세요 최 기자님.”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거 끝나면 태풍 씨 단독 인터뷰 주는 거 잊지 말고.
“제가······ 그런 약속을 했던가요?”
순간 최소혜 기자가 장난스럽게 협박을 해온다.
-이거 왜 이래? 김애련 전무랑 약속 취소해? 앙?
술을 잔뜩 마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언뜻 수락했던 것도 같다.
“아 아닙니다! 무조건 태풍이 기사 특종은 최 기자님께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난 그날 클럽에 있던 다른 애들도 인터뷰하러 가야 해서. 이만 끊을게 수고!
“예. 기자님.”
전화를 끊고 나자 구성철 실장이 다가왔다.
“윤호야. 태풍이 현장에는 너 혼자 가야겠다. 신 대표님과 좀 더 상의할 일들이 생겼네.”
“예. 알겠습니다.”
“그래. 가서 기 팍팍 살려줘.”
오늘은 이태풍의 <경계 너머로>의 마지막 촬영일.
현장에 가서 기를 세워줄 참으로 도시락 배달과 커피차를 불러 놓았다.
구성철 실장이 신종기 대표와 함께 떠나자 표은미 실장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