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2화
262. 폭풍의 전조 4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과 친해지기 쉬운 이 직업의 특성 탓인지 연예인 마약범을 잡으면 간혹 정치인 2세와 재벌 3세들이 엮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기사를 취재해도 그들의 부모들과 조율이 끝난 다음에야 보도를 할 수 있다.
재벌은 돈으로 압박을 넣고 정치인은 권력으로 압박을 넣어대기 때문이다.
현재 중간일보의 이상묵 편집장은 닳고 닳은 정치적인 인물.
자신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기사를 낼 성격은 아니었다.
최소혜 기자가 답답한지 블라우스의 맨 윗단추를 끌렀다.
“아오. 편집장 그 쫄보 새X. 기자 정신이 없어요 기자 정신이! 내가 진짜 회사를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최소혜 기자는 언론사 상층부의 이런 행태가 넌더리가 난다며 씩씩거렸다.
“안 되겠다. 정 팀장. 술부터 시키자!”
난 벨을 눌러 한정식 2인분과 전통주 한 병을 주문했다.
난 그녀에게 술을 따르며 구체적인 사정을 묻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까지 취재가 됐습니까?”
최소혜 기자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켠다.
“크흐~ 오늘 술이 왜 이리 쓰냐. 실은 사진까지 확보했어.”
“사진을 찍었다고요? 그거면 다 끝난 거잖아요.”
“그래. 끝난 거지. 보도만 할 수 있으면.”
막연한 보도 기사와는 달리 사진이 있다면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김애자 부회장의 사진을 찍었습니까?”
“정 팀장이 말해준 클럽 플렉시스에 사람 하나 박아 넣고 박희태랑 최성락 사진 찍으라고 미리 대기시켰었거든? 그런데 김애자 부회장이 같이 나타나더라고.”
내가 박희태와 최성락이 대마를 한다고 제보한 곳은 강남의 플렉시스 클럽.
김애자 부회장 정도가 되면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주로 요정이나 프라이빗 바에서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 이틀 전 김애자 부회장이 플렉시스 클럽에 나타났다고 한다.
“요즘 영계들이랑 놀려고 클럽에 온다고 듣긴 했는데 하필이면 딱 걸린 거지.”
“대박이네요.”
“그래. 대박이지. 하지만 문제는 그런데도 보도를 못 한다는 거고.”
최소혜 기자에게 술 한잔을 더 따르며 물었다.
“편집장님은 뭐라고 하면서 기사를 못 낸다던가요?”
“하아~ 우리 쫄보 편집장이 기초 공사 없이 보도라도 했다가 대천그룹 광고 우수수 떨어지면 어쩌냐고 하더라고.”
“기초 공사는 또 뭡니까?”
“쉽게 말해서 빽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아무튼 당분간 박희태랑 최성락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말래. 김애자 부회장이 남자 쉽게 갈아치우니까 좀 잠잠해지면 배우들만 잡자더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박희태와 최성락이 곧 굴렁쇠로 올 텐데 그 이후에 기사가 터지면 회사에 타격이 올 테니까.
무조건 두 사람이 굴렁쇠에 오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난 최소혜 기자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최소혜 기자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어쩌자고?”
“기자님이 확보한 사진을 김애자 부회장의 동생 김애련 전무에게 가져가세요.”
최소혜 기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대천 건설의 김애련 전무? 그 여자 자기 언니인 부회장에게 완전히 밀린 거 아냐?”
2년 전 대천그룹 자매들끼리의 지분 전쟁이 벌어졌을 때 주력 산업인 백화점과 유통을 언니인 김애자 부회장이 삼켰다.
반면 동생인 김애련 전무는 대천그룹에서 상대적으로 비핵심 계열사인 건설 쪽으로 밀려나 버렸다.
세간의 평가로는 김애련 전무는 이제 끝났다는 분위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난 그녀가 몸을 웅크리고 기회만 엿보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자매간에 싸움을 붙이자고?”
“예.”
최소혜 기자가 잠깐 생각에 잠긴 채 술을 들이켰다.
말없이 한 잔 두 잔을 마시고 석 잔째.
드디어 그녀의 입이 열렸다.
“김애련 전무에게 언니와 싸울 힘이 있을까?”
“김애련 전무에게 그 사진을 넘기면 김부호 회장님이 움직일 겁니다. 이번 건 단순한 자매싸움이 아니잖습니까.”
대천그룹의 창업자이자 명예회장인 김부호는 김애자와 김애련 자매의 아버지.
외부에서 김애자 부회장을 공격한다면 김부호 명예회장은 딸을 지키려 든다.
하지만 딸들끼리 싸우게 되면 이야기가 달랐다.
2년 전 두 사람 간의 지분 전쟁에서도 겉으로만 냉철하게 보였을 뿐 실제로는 어느 편도 제대로 못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집안의 체면을 중시하는 김부호 회장에게는 결코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 딸이 그러고 노는 걸 알면 김부호 회장님 아마도 눈 돌아갈 겁니다. 옛날 사람이잖습니까.”
“김애련 전무는 거기에 불을 붙일 거고?”
“있는 일 없는 일 다 가져다 붙여서 아버지 속을 뒤집겠죠.”
최소혜 기자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다시 한번 술잔을 들이켰다.
“크~으. 이제야 술이 다네. 오케이 알았어!”
최소혜 기자가 빈 술잔을 채우고는 내게 내민다.
“자 기분도 좋은데 오늘 한잔해야지?”
눈을 찡긋하는 최소혜 기자의 얼굴을 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그녀의 한 잔은 언제나 한 잔으로 끝난 적이 없었으니까.
* * *
영등포의 고급 요정.
VIP 룸에는 올해 65살인 여당의 사무총장 박상곤이 앉아 있다.
그리고 차기 당 대표로 가장 유력한 박상곤의 곁에는 그의 딸 박상아가 술잔을 들고 있었다.
키 160cm 정도 되는 아담한 체형의 박상아는 흰 블라우스가 닿지 않게 조심스레 박상곤에게 술을 따랐다.
“아빠. 오늘은 딱 한 잔만 하세요.”
“허허허. 우리 딸이 이렇게 아비를 생각해주네.”
“맨날 술 마시니까 엄마가 걱정하잖아요. 그래서 그렇지 뭐.”
올해 28살인 박상아는 투덜거리며 아빠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박상곤이 맞은편에 앉은 명동 사채 시장의 2인자 최만식 대표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다.
“최 서방. 자네도 미래의 안사람한테 술 한잔 받게.”
“감사합니다.”
박상아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술을 따랐다.
“감사합니다. 상아 씨.”
박상아가 싱긋이 웃으며 빈 잔을 내밀었다.
“저도 한잔 따라 주셔야죠?”
“예.”
최만식과 박상아는 약혼을 앞둔 사이였기에 둘 사이에는 스스럼이 없었다.
“자자. 잔 다 채웠으면 우리 최 서방이 한번 건배사나 해볼까?”
박상곤의 말에 최만식이 두 손으로 잔을 높게 들었다.
“청와대 입성의 그 날까지!”
박상곤이 기껍다는 표정으로 큰 웃음을 터트린다.
“으하하하. 역시 최 서방은 사람 기분을 좋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군. 그래. 그날까지~”
박상곤은 입이 찢어지라고 웃으며 따라 외쳤다.
술을 마신 최만식이 웃으며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장인어른. 제가 상아 씨와의 약혼 선물로 조촐한 걸 하나 준비했습니다.”
“어허. 이 친구. 아직 약혼식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뭘 그리 서두르나?”
최만식이 빙긋이 웃으며 붉은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상아 씨를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최만식이 반지 케이스를 열자 5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나왔다.
원형 테에는 1.5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양옆으로 2개씩 박혀 있었는데 링 안쪽에는 두 사람의 영문 이니셜 ‘C & P’가 새겨져 있었다.
박상아가 활짝 웃으며 왼손을 내밀었다.
“만식 씨가 끼워주세요.”
“예.”
최만식이 박상아의 새하얀 약지에 반지를 끼워준다.
박상아는 수억이나 나가는 반지를 요리조리 돌려보며 환하게 웃었다.
“흠흠. 우리 최 서방이 능력이 참 좋군~”
박상곤이 기꺼워하자 최만식 대표가 고개를 숙였다.
“장인어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이 겸손하긴. 자네 나이에 그 큰 규모의 돈을 움직이는 사람이 한국에 몇 안 될 텐데 그 무슨 소리인가?”
최만식은 최은태 회장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저축은행 중 하나인 미래상상 저축은행의 평이사.
하지만 오랫동안 차명으로 지분을 확보해 은행을 사실상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박상곤의 칭찬을 받은 최만식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아 그리고 장인어른께도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허허허. 뭐? 난 뭐 시계 같은 거 하나 해줄 생각인가?”
그 순간 최만식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가져와.”
문이 열리고 최만식 대표의 비서실장인 양지훈이 나타났다.
양지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결코 세 사람과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서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극진한 존대의 예를 갖춘 양지훈이 검은 가방을 최만식에게 내밀었다.
양지훈이 무릎으로 기어 다시 나가자 최만식은 박상곤에게 검은 가방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차기 당 대표를 하시려면 소소한 일들에 쓰실 데가 많으실 겁니다. 그리고 가지고 오신 차 트렁크에도 조금 더 넣어놓았습니다.”
“우리 차기 미래상상 저축은행장께서 배포가 상당하구만.”
박상곤이 흐뭇한 표정으로 가방을 받아 들었다.
달칵하고 열자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사용한 흔적이 있는 5만 원짜리가 가득하다.
“호오. 이 친구 섬세한 것 좀 보게.”
“명동에서 세탁한 거라 절대 뒤를 못 캡니다. 편하게 쓰십시오.”
박상곤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자네 부모 복은 없어도 돈복은 있구만. 대단해. 허허허.”
최만식은 모욕적인 말에도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제가 왜 부모 복이 없습니까? 장인어른도 똑같은 부모님인데 이제야 제 복을 찾은 거지요.”
박상곤은 입안의 혀처럼 구는 최만식의 말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자네 같은 사람은 정치를 해야 하는 건데!”
“아닙니다. 정치는 장인어른 같은 분이 하시는 거고 전 음지에서 보좌하는 쪽이 적성에 맞습니다.”
박상곤이 자신의 딸을 쳐다본다.
“상아야. 이 아비 눈이 어떠냐? 네 남편감이 이 정도다.”
“전 처음 만날 때부터 알아봤어요.”
“으하하하. 그러냐? 내가 몰랐구나. 그러면 앞으로 내가 청와대 입성만 하면 그땐 이 친구에게 좋은 명당으로 공천 자리 하나 준비해 주마.”
박상아가 빙긋이 웃는다.
“약속하신 거예요?”
“아무렴. 설마 이 박상곤이 사위를 모른 척할까? 자 의기투합하자는 의미에서 딱 한 잔만 더 하자꾸나.”
“알았어요. 딱 한 잔만이에요?”
그렇게 당 대표 선거와 약혼식을 한 달 앞둔 세 사람의 만남이 무르익고 있었다.
* * *
박상곤과 박상아가 먼저 나간 뒤에도 최만식은 홀로 10분을 기다렸다 나왔다.
차로 돌아온 최만식은 뒷좌석에다 등을 기댔다.
“휴우~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새끼들이······ 감히······.”
명동에서 끌어모은 더러운 돈을 날로 삼키면서도 고상을 떠는 박상곤과 박상아의 태도가 역겹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최은태 회장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두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그 순간 운전석에 앉은 비서실장 양지훈이 묻는다.
“형님. 강지영 본부장은 포기하신 겁니까? 그분이랑 결혼한다고 하셨잖습니까?”
“지훈아. 내가 한 번 찍은 여자를 포기하는 거 봤냐?”
최만식은 박상아와 결혼을 하더라도 강지영과 만남을 이어갈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최만식의 집착에 양지훈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상아 씨가 알기라도 하면 박 의원이 길길이 날뛸 텐데요?”
최만식이 피식 웃는다.
“들켜도 상관없어. 상아 걔도 따로 남친 있어.”
“예?”
“밖에서 애만 안 만들면 서로 연애하는 건 터치 안 하기로 이미 합의 봤다.”
양지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멍하게 벌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래? 쟤들이 고상하게 굴 줄 알았냐? 알고 보면 우리 같은 것들보다 더해.”
“아무리 그래도······.”
“우리 영감이 왜 정치권 놈들이 제일 더럽다고 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거 같더라. 그보다 동수한테 연락 왔냐?”
양지훈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예. 아들 찾는 게 꽤 진행되어서 후보군을 추리고 있답니다. 대신 한 달 정도는 더 걸릴 것 같답니다.”
최만식 대표가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약혼식 선물로는 딱이군. 그리고 아들이 누군지 확실해지면······ 알지?”
“예. 목포 쪽에 뒤처리 전문으로 하는 프로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 불러서 처리하겠습니다. 입도 무겁고 손도 빠른 놈들입니다.”
“그건 알아서 하고. 잠깐만 나가 있어 줄래? 지영이한테 전화 좀 하게.”
“예. 형님.”
양지훈이 잠깐 운전석에서 내리자 최만식이 전화를 걸었다.
로밍이 된다는 신호가 걸려온다.
-여보세요?
“지영아. 오늘 밤에 와인이나 할까 하는데 너 지금 어디야?”
-됐네요. 저 일본이에요.
“그래? 일본이면 사케나 먹어야겠네. 도쿄면 비행기 타고 금방이다. 가서 볼까?”
-뭐래요? 미친 소리 하지 마시고 잠이나 주무세요!
달칵.
일방적으로 끊은 강지영의 태도였지만 최만식은 껄껄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까칠한 가시가 가득한 꽃일수록 꺾었을 때 더욱 만족스러울 거란 생각을 하면서.
* * *
유진이가 맡은 ‘청명’은 원피스를 입은 채 격투를 벌이기에 틈이 나면 태권도 발차기와 권투 연습을 해야 했다.
이제까지 집 마당에서 하곤 했는데 이제부터는 고난도 액션 연기를 해야 했기에 보호 매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박선녀 에어로빅 교실.
오후 2시부터 한 시간 동안은 원생들이 없기에 박선녀 원장은 흔쾌히 교실을 빌려줬다.
이곳에서 태권도는 정상봉이 그리고 권투와 주짓수는 내가 가르칠 예정이었다.
난 유진이와 미소가 옷을 갈아입고 오길 기다리며 기사를 확인했다.
[<신의 이름으로> 5화. 시청률 18.4%]
[<신의 이름으로>. ‘청명’의 호쾌한 발차기를 본 태릉인. ‘저 정도면 선수급.’]
[<돈의 축제> 5화 13.2%]
[<돈의 축제> 6화 예고편! “출생의 비밀 ㄷㄷㄷㅈ!”]
[<신의 이름으로>. 시청률 20%까지 마지막 한고비. 역대 최단기 돌파를 노리는 웰메이드 드라마.]
<신의 이름으로>는 빠르게 시청률이 올라가고 있지만 <돈의 축제>도 매화 자극적인 내용을 넣으며 추격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벌어진 시청률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 <신의 이름으로>는 벌써 20%에 근접한 시청률을 달성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6화 정도에 20%를 넘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였다.
태권도복을 입은 유진이와 미소가 탈의실에서 함께 나왔다.
“오빠~! 저희 다 입었어요!”
난 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엄마 손을 잡고 나온 미소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삼촌~ 이거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