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1화
261. 폭풍의 전조 3
삼청동의 한 오래된 고택.
여전히 선명한 단청의 채색과 깔끔하게 정리된 기와는 집주인이 얼마나 꼼꼼한 성격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딸그락.
담벼락 한쪽에서 모시옷을 입은 노인이 커다란 장독을 열었다.
“올해도 장이 잘 익었구나.”
노인의 뒤로 도열한 네 사람이 빙긋이 웃는다.
맨 앞에 있는 단단한 체구의 남자는 대흥 저축의 은행장임과 동시에 대호파의 우두머리인 최영호였다.
“어르신. 올해도 장 한 덩이씩 나눠 주실 겁니까?”
하얀 은발의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응당 그래야지. 너희들이 아니면 이 많은 걸 누가 먹고?”
노인의 이름은 최은태 회장.
그는 장의 상태를 확인한 후 곁에 서 있는 비서에게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았다.
“그래. 내 아들놈 일은 어떻게 되어 가느냐?”
그 순간 최영호가 뒤를 쳐다보며 눈짓했다.
그러자 대호파 넘버 2인 주진호와 다른 두 명이 빠르게 물러나 거리를 벌린다.
최은태가 혀를 쯧쯧 찬다.
“영호야. 이제는 동생들 좀 편히 해주는 게 어떠냐?”
“아닙니다. 기강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집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여튼 고지식한 놈 같으니라고······.”
최영호가 다시 지시를 내렸다.
“진호가 동생들 데리고 사랑방에서 대기해라. 외부로 연락하는 놈 나오지 않게 주의하고.”
“예. 형님.”
주진호가 함께 온 동생들을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단둘만 남은 마당.
지저귀는 새들도 없는 넓은 한옥의 마당에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사람 따위는 없었다.
“그래. 알아는 봤고?”
“여기 명단입니다.”
최영호가 두 손을 모아 1차로 걸러진 아들 후보의 명단을 내밀었다.
“늙어서 그런지 요즘은 눈이 침침하다. 그냥 말로 하거라.”
최영호는 두 손을 거둔 후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후보군은 서울에 22명 지방에 15명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다 만나봤고 오늘부터 서울에 있는 후보들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전국을 헤매고 다녔겠구나.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미안하다. 저축은행까지 맡겨놔서 한창 바쁠 텐데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내 자식을 찾으라고 고생을 시키다니.”
“어르신의 혈육 문제라면 제가 나서서 찾는 게 당연합니다. 키워 주신 은혜. 이 정도 일로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은태가 따뜻한 눈빛으로 최영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내 아들놈인지는 어떻게 알아볼 셈이더냐?”
“거기에 대해서는 진호가 좋은 방법을 하나 냈습니다.”
최영호는 후보에 있는 고아들 대부분이 다들 형편이 어려우니 정부 지원 저리 신용 대출을 해주겠다며 만나볼 생각이라 말했다.
“만난 다음에는 어찌하려고?”
“대출 면담할 때마다 머리카락 같은 걸 채취할 생각입니다. 그걸 어르신의 유전자와 대조해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DNA 시료 조사 업체는 입 무거운 곳으로 구해 놓았다는 말에 최은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이내 기쁜 기색을 지우고 안색을 찌푸렸다.
“그러면 지금 만식이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그놈도 지금쯤이면 내게 아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아직 직접 움직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최은태가 노파심에서 말한다.
“다른 놈을 시켜 찾고 있을 수도 있으니 염두에 두고 감시하거라.”
“예 어르신.”
“그리고 만식이 그놈이 요즘 정치권을 기웃거린다던데 그건 어찌 되어 가느냐?”
최영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최 대표가 요즘 여당의 박상곤 의원을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만난 그 딸과 약혼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도 있고요.”
“응? 지영이는? 그놈. 원래 지영이를 탐내고 있었잖느냐?”
“그게······ 박 의원의 딸을 만나고서는 바로 갈아타 버렸습니다.”
“응? 그러면 지영이한테는 완전히 마음 접은 거고?”
“그건 또 아닌 모양입니다. 강지영 씨한테 계속 추근대는 걸 보니 뭐 결혼 따로 연애 따로 할 모양이더군요.”
최은태가 잠시 고민하다 묻는다.
“지영이도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닐 텐데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더냐?”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쯧쯧. 내가 눈이 멀었구나. 똘똘하다고 그딴 쓰레기를 아들로 들이다니······ 허허허.”
최은태가 자조하며 웃자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치를 보던 최영호가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어르신.”
“왜?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았느냐?”
“확실해지면 말씀드리려 했는데 실은 어르신께서 대주주로 계신 굴렁쇠 엔터에도 후보가 한 명 있습니다.”
최은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굴렁쇠에?”
“예. 정윤호라고 이제 막 2년 차에 팀장을 단 친구입니다.”
“그래?”
“그리고 정윤호와 같은 보육원 출신인 강은기도 또 한 명의 유력한 후보입니다.”
최은태가 들뜬 표정으로 묻는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특별히 조심해서 조사하거라. 절대 만식이가 모르게 말이다.”
“예. 어르신.”
최은태의 마음이 조금은 바빠졌다.
자신의 양아들인 최만식의 독한 성격이라면 반드시 손을 쓰고도 남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만식이 차기 여당 대표 후보인 박상곤의 딸과 약혼을 하게 되면 최은태 회장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순간 설령 아들을 찾는다고 해도 그 아들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독사를 키웠어. 내가······.’
최은태가 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했다.
“조만간에 여당 야당 당 대표들을 만날 테니 자리 좀 잡아 보거라. 우리 건 우리가 지켜야지. 그리고 만식이 몰래 진행해야 할 테니 조심하고.”
최영호가 조심스레 묻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정치권 놈들은 저희보다 더한 도둑놈들이라고 싫어하셨잖습니까?”
“세상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있나. 만식이가 차기 여당 대표라는 패를 잡았으니 나도 그에 비견되는 패를 찾아야지.”
최은태는 지금이야말로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과 자신의 식솔들을 위해서.
그리고 어디엔가 있을 아들을 위해서.
“알겠습니다. 그러면 시키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최은태 회장이 최영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언제나 고맙구나 영호야.”
“아닙니다. 어르신.”
최영호는 최은태 회장의 아들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자신의 목숨은 최은태가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 *
리버스 엔터에서 계속 데리고 갈 연예인들과 영입해야 할 연예인들의 명단 정리를 끝내준 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이수찬이 날 배웅하며 말한다.
“형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무슨. 알아서 잘하던데.”
이수찬의 나이는 고작 26살.
회귀 전 그 나이 때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하고 있지만 본인은 그걸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잘하긴요. 하루하루 막막하기만 합니다.”
“내가 볼 땐 너 충분히 잘하고 있다. 은기가 없는 상황에서도 크게 사고 터진 일도 없고 또 동생들 얼굴이 밝은 걸 보면 회사 관리도 잘 되는 것 같고.”
이수찬이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형님에게서 칭찬을 들으니까 괜히 없던 기운도 막 나는 것 같습니다.”
“오버는. 그리고 날새 잘 지켜.”
“알겠습니다. 그보다 형님. 저희와 연결된 흥신소가 많으니까 필요한 정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그 순간 인간말종 주강용 기자가 김동수를 협박하며 말했던 여배우의 이름이 떠올랐다.
“너 혹시 최성애라고 알아?”
“최성애요? 글쎄요? 전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군지 모르겠다는 이수찬에게 과거 최성애가 출연했던 작품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아 그분이요? 예. 얼굴은 알죠.”
“작품 끝내고 미국으로 갔다는데 찾을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밑에 사람 찾는 데 도통한 놈들 많습니다.”
이수찬이 자신만 믿으라며 자신한다.
“혹시나 찾으며 위치만 알려줘.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게.”
“예. 형님.”
그런데 그때였다.
[후이즈 콜 : 대흥 저축은행]
대흥 저축은행은 최은태 회장이 가지고 있는 저축은행.
그런데 하필 이 시기에 그곳에서 전화가 오는 게 조금은 우스웠다.
그대로 전화를 끊자 이수찬이 묻는다.
“형님. 혹시 돈 필요하십니까?”
“왜? 없으면 빌려주게?”
“예. 저희도 대부업 하잖습니까.”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나 돈 많아. 당장 현금이 없어서 그렇지 연말 되면 보너스로 받는 것만 억 단위다.”
이수찬이 머리를 긁적인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잘 나가시네요.”
“부끄러우니까 낯간지러운 말은 그만하자.”
그런데 다시금 전화가 걸려왔다.
[후이즈 콜 : 대흥 저축은행]
‘차단.’
그러나 이내 다른 번호로 세 번이나 전화가 걸려온다.
“와 끈질기네······ 번호가 몇 개야?”
또다시 차단하자 이번엔 문자가 온다.
[02-08XX-7979]
[언제나 고객님과 함께하며 희망의 기운을 드리는 ‘대흥 저축은행’입니다! 흥하라! 대한민국! 흥하라! 고객 여러분! 다름이 아니라 취약계층을 위한 정부 보증 대출 상품이 나와서 연락드렸습니다. 최대한도 5천만 원 내에서 초저리 (2%~5%)의 신용 대출이 가능하십니다. 언제든 부담 없이 전화해주시면 친절 정확하게 상담을 해드리겠습니다! 당일 가능! 바로 입금!]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이 나온다.
“이것들이 누굴 호구로 아나. 신용으로 2%대 금리를 해 준다고? 그것도 5천만 원이나? 사기도 적당히 쳐야지······.”
난 그 번호마저 차단을 걸었다.
“저기 형님. 혹시 저쪽에서도 형님을 알아채고 이렇게 접근하는 거 아닐까요?”
“그럴 리가. 그럴 거면 스팸으로 차단될지도 모르는 회사 전화로 전화했겠냐?”
“하긴 그렇네요.”
난 하루의 엄마인 나탈리아도 찾아달라고 부탁한 뒤 이수찬의 배웅을 받으며 리버스 엔터를 나왔다.
* * *
최은태 회장이 내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내 일상생활에도 꽤 영향을 미쳤다.
이제껏 뭘 하다가 뒤늦게 찾으려 한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가도 설마 그가 내 아버지일 리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화가 가라앉곤 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난 억지로 그 사실을 기억에서 지우려 노력했다.
“그나저나 은기가 이 사실을 알면 탈옥이라도 하려고 하겠는데······.”
지금쯤이면 구치소에 있는 강은기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을 거다.
하지만 강은기라면 나보다 더 길길이 날뛰고 있을 거다.
엄마랑 단둘이 살면서 워낙 고생이 심했기에 오죽하면 얼굴도 기억 안 난다던 아빠를 미워했을 정도니까.
어쨌건 난 결론이 나기 전까지 우선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가장 중요한 일은 김동수가 배우 3실을 키우는 걸 막는 것.
그 탓에 난 김동수가 영입하려는 박희태와 최성락이 상습적으로 대마를 피운다는 사실을 최소혜 기자에게 제보했다.
3일 정도가 지나자 최소혜 기자에게서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난 지금 약속장소인 강남 한정식당 ‘한오름’ 2실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이 누님은 또 왜 이리 안 오시나······.”
최소혜 기자가 늦어지는 터라 연예 기사면의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현재 연예 기사면은 <신의 이름으로>와 <먹방의 대가>에 관한 기사가 40%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이태풍의 <경계 너머로>에 관한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최성문 감독 <경계 너머로> 다음 달 개봉! (9월 25일)]
[최성문 감독. 연기력 논란이 있는 이태풍을 캐스팅한 이유를 밝힌다.]
[<경계 너머로>. 현장 스태프들이 전하는 자신감!]
[이태풍. 연기력 논란을 극복하기 위해 물과 소금만으로 일주일을 버티고 독기를 키우다!]
아직 이태풍의 연기를 제대로 보지 않은 탓에 기사의 반응은 미지근한 편이었다.
“태풍이 연기하는 것 보면 깜짝 놀랄 거다 아마.”
그때였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있는 방문이 열린다.
“정 팀장. 늦어서 미안.”
“아뇨. 별로 많이 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오! 빡쳐! 편집장 꼰대 새X 때문에 한판 하느라 늦었어.”
최소혜 기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설마 박희태랑 최성락 대마 건 터트리는 데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증인도 알려드렸고. 매번 모이는 장소와 시간도 알려드렸잖아요.”
최소혜 기자는 마시던 컵을 테이블에 탁하고 내려놓았다.
“그랬지. 그래서 취재까지 성공했는데 이대로는 보도 승인 못 한대.”
“혹시 정치권에서 킵 하라고 한 겁니까?”
신문사들은 가끔 굵직한 연예인들의 스캔들 건을 풀지 않고 가지고만 있는 경우가 있었다.
정치인들이 큰 문제가 생겼을 때 거래용으로 써먹기에 좋은 카드니까.
“아니. 정치권은 아냐.”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다.
“그러면 혹시 박희태 최성락 그 두 놈이 재벌 3세들과 엮이기라도······.”
아니나 다를까 최소혜 기자가 한숨을 몰아쉰다.
“그래. 그런데 두 놈이 같이 어울린 상대가 재벌 3세도 아니고 현역이야. 주책도 그런 주책이 없지.”
“예? 현역 재벌이 어울렸다뇨?”
“대천그룹의 김애자 부회장이 박희태랑 최성락이랑 같이 놀다 걸려서 보도가 막혀 버렸어.”
이태풍에게 스폰을 제의했던 그녀가 중간일보의 레이더에 걸렸단다.
“김애자 부회장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