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화
26. 굴렁쇠 엔터의 중심
딸칵.
운영 이사실의 문을 열자 곧바로 이기철 이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른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들어 와!”
“내가 애들 데리고 이야기 좀 하느라 늦었다.”
강감찬 대표의 말이 들리는 순간 이기철 이사는 마치 버퍼링에 걸린 듯 움찔거렸다.
“대 대표님 오셨습니까?”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못 올 델 왔나?”
“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러지.”
강감찬 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소파의 상석으로 향했다.
자리를 옮기는 이기철 이사가 우릴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선 레이저가 나오고 있었지만 한명호 팀장과 난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자······ 난 없는 셈 치고 이야기해 봐. 서둘러 상의할 일이 있다며?”
강감찬 대표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기철 이사는 잠시 강감찬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한명호 팀장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한 팀장. 체리블라썸 애들 2집 활동 망한 거 알지?”
한명호 팀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지.
“알다시피 지금 가수 2실에서 새는 돈이 만만치가 않아. 체리블라썸 밑으로만 한 달에 적자가 3천이야. 3천!”
역시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한명호 팀장의 얼굴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골든 로드 차기 앨범 제작비를 맞추려면 체리블라썸 3집 앨범의 제작비를 삭감해야······”
그 순간 강감찬 대표가 말을 끊었다.
“잠깐만. 이 이사.”
“예. 대표님.”
“뭔 소리야 그게?”
“그러니까 방금 들으신 것처럼 가수 매니지먼트 2실이 적자라서······”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냐고?”
강감찬 대표의 굳은 표정에도 이기철 이사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년부터는 적자를 좀 줄여 보려는 겁니다. 언제 뜰지도 모르는 애들한테 무한정 돈을 붓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다른 회사였다면 벌써 해산시키고도 남았을 겁니다.”
“······”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드리는 거지만 가수 2실의 전체를 합치면 적자 폭이 지금 한 달에 1억입니다. 1억.”
“계속 말해 봐.”
“반면에 가수 1실은 매달 흑자 2억 이상을 꾸준히 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되는 쪽에 제작비를 밀어주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기철 이사의 항변에 강감찬 대표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곤 팔짱을 풀며 몸을 앞으로 기댔다.
“이기철. 너 무슨 생각하는 거냐?”
“예? 회사를 운영하려면 당연히 재정 상황을······”
강감찬 대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제 우리 회사도 좀 커졌다고 다른 회사처럼 굴리고 싶다고? 안 되는 싹 다 잘라버리고 될 놈들만 골라서 데리고 가자는 건데 우리가 무슨 증권사 직원이냐? 은행원이야?”
“대 대표님. 저도 이제 운영 이사인데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이름으로 불리는 게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하지만 강감찬 대표의 표정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심해? 네가 하는 짓은 안 심하고? 적자면 까고 흑자면 밀어줘? 언제부터 이 사업이 흑자만 보는 사업이었어?”
쾅!
강감찬 대표가 탁자를 내려치며 노려보자 이기철 이사가 입을 다물었다.
업계 경력 30년의 강감찬 대표가 아이돌 사업을 모를 리가 없다.
아이돌 사업은 적자는 기본이요 회사가 휘청댈 정도로 돈이 들어가지만 터지면 로또다.
한 방에 지난 적자를 다 메꾸고도 남아 빌딩을 세우는 사업이니까.
“······그리고 내가 왜 실을 나눴는지 다들 벌써 잊었나? 독립적으로 운영하라고 실장까지 두고 전권을 줬잖아. 네가 다 뭉쳐서 마음대로 휘두를 거면 실은 왜 필요하고 팀은 왜 필요해!”
강감찬 대표는 이기철 이사를 쉴 새 없이 닦아 세웠다.
역시 강감찬 대표의 건강에만 문제가 없었어도 굴렁쇠 엔터는 쉽게 망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강감찬 대표의 사나운 기세에 이기철 이사가 한층 더 움츠러들었다.
“야 이기철 아니 이 이사. 말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묻자. 너 체리블라썸이 실검에 뜬 거는 알고 있냐?”
“실검이라뇨?”
“쯧 올라오는 보고만 듣고 있으니 알 리가 있나. 홍보팀에 마지막으로 내려간 건 언제야?”
“이틀 전입니다만······”
“이거 봐라. 이거. 확!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이걸 아주 그냥.”
강감찬 대표가 몸을 앞으로 다가가자 이기철 이사가 움찔거렸다.
잠시 이기철 이사를 노려보던 강감찬 대표는 인터폰으로 홍보팀장을 불러들였다.
삐-.
“성 팀장. 올라와.”
-예 대표님.
잠시 후.
헐레벌떡 뛰어온 홍보팀 성민석 팀장이 태블릿을 안고 있었다.
“가수 매니지먼트 2실 현황 브리핑해 봐.”
“아. 예.”
“그리고 재무 상황도. 아 혹시 모르면 기획팀장이랑 재무팀장 다 부르고.”
“아닙니다. 자료 받아왔습니다.”
“그래? 그럼 시작해 봐.”
강감찬 대표의 말에 성민석 홍보팀장은 바싹 얼어붙어 선 자리에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가수 매니지먼트 2실에 소속된 연예인의 상황은······”
보고가 이어질수록 이기철 운영 이사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보고가 끝난 순간.
강감찬 대표가 이기철 운영 이사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들었냐?”
이기철 운영 이사의 이마 위로 진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가수 매니지먼트 2실의 전체 적자 폭은 월에 1억이긴 했지만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앞으론 3개월 안에는 적자를 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보고였으니까.
“저 대표님. 그러니까 저게 말입니다······.”
“됐으니까 입 다물어.”
이기철 이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인상을 찌푸린 강감찬 대표는 성민석 팀장을 향해 말했다.
“가져온 자료는 내 까톡으로 쏴 주고 성팀장은 당장 내려가서 본부장 좀 올라오라고 전해.”
“안 그래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본부장! 당장 들어와!”
굳은 표정의 강지영 본부장은 이사실로 들어오자마자 강감찬 대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강감찬 대표는 인사도 받지 않은 채 그녀를 거칠게 몰아세웠다.
“어이. 강지영 본부장. 회사에서 설렁설렁 일하니까 편해?”
“아닙니다.”
평소와는 다른 강감찬 대표의 태도에 강지영 본부장도 마치 군인처럼 딱딱한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각 실에 대해서 실장들에게 독립적인 운영 맡기라고 했지. 기억나나?”
“기억납니다.”
“그런데 왜 일 진행이 이따위로 돌아가? 내가 중국과 일본에 신경 쓴다고 내부 일에 조금 관심을 놓았더니 완전 엉망이야!”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강감찬 대표의 질책에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똥줄이 타는 건 이기철 이사다.
이건 대놓고 이기철 이사를 욕하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마음대로 회사를 주물럭대다 걸린 이기철 이사는 고개를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강감찬 대표는 강지영 본부장을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버거우냐?”
“아닙니다.”
“버거우면 언제든 이야기해라. 내가 직접 나서면 되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닙니다. 대표님. 제가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켜보마.”
강지영 본부장은 고개를 숙인 이기철 이사를 노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예.”
강감찬 대표의 이런 모습은 회귀 전엔 보지 못했었다.
평소엔 늘 설렁대는 모습만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난 그의 세세함과 과단성 그리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역시 강감찬 대표가 굴렁쇠 엔터의 중심이다.’
정실모 이외에도 지켜야 할 사람이 또 하나 생겼다.
이 강감찬 대표만 건재하다면 이기철 이사가 함부로 날뛰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딸에게도 결코 용서 없는 강감찬 대표의 질책이 이어질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강감찬 대표의 날 선 말에 문이 빼꼼히 열렸다.
“접니다.”
강감찬 대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재무이사이자 사적으로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정수혁이 나타났으니까.
원래 대기업 재무팀에서 일하던 회계사 출신인데 강감찬 대표의 꼬드김에 5년 전에 은퇴하고서 우리 회사로 왔다.
그리고 이 사람만이 폭주하는 강감찬 대표를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바깥에 다 들립니다. 그쯤 하시죠.”
공적인 자리라 그런지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아주 깍듯한 태도다.
하지만 화가 다 가라앉지 않은 강감찬 대표가 씩씩거렸다.
“이봐! 정 이사. 내가 지금 진정하게······”
“이지연 작가가 왔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말을 삽시간에 바꿨다.
“······생겼네?”
강감찬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지연 작가가 왜?”
“저기 저 친구가 담당하는 배우 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고 합니다만.”
정수혁 이사가 날 가리키고 있었다.
* * *
강감찬 대표는 강지영 본부장 그리고 구성철 실장과 함께 6층 회의실로 내려갔다.
급은 안 되지만 나 역시 담당자로 대동했고.
그런데 이지연 작가는 김솔잎 작가와 함께였다.
“하하하. 이 작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야?”
강감찬 대표의 질문에 이지연 작가가 투덜거렸다.
“왜요? 내가 온 게 별로 반갑지 않은가 봐요?”
“어허! 누가 안 반갑대? 구 실장 너냐? 본부장 너야?”
강감찬 대표의 농담에 이지연 작가가 피식 웃는다.
“하여간 그놈의 너스레는. 어쨌건 우리 솔잎 작가가 대본을 보냈는데 답이 없길래 답답해서 들렀어요. 오래간만에 강 대표님 얼굴도 볼 겸~.”
강감찬 대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본부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김솔잎 작가님이 오늘 정유진씨의 차기작 대본을 보내오셨습니다. SBC에서 4월 1일 편성으로 들어가는 작품인데 주요 조연으로 유진 씨를 쓰고 싶으시다고······”
강감찬 대표의 얼굴이 대번에 환히 밝아졌다.
“허허 이런 고마운 일이 있나. 김 작가님. 우리 유진이 잘~ 좀 부탁합니다.”
강감찬 대표의 정중한 인사에 김솔잎 작가가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에요.”
“허허허. 그나저나 이제 작가님이 되셨는데 입봉 선물로 뭘 하나 해 드리나?”
그때였다.
이지연 작가가 생각지도 못한 돌발 선언을 해버렸다.
“그런데 강 대표님. 사실 내 신작에도 유진에게 어울릴 만한 좋은 배역이 하나 있거든요?”
꿀꺽.
잠시의 정적 끝에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내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황당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유진이를 놓고 두 작가가 다투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
강감찬 대표가 정적을 깨며 물었다.
“아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오늘 여기 온 두 사람 모두 우리 유진이를 쓰고 싶다는 뜻인가?”
이지연 작가와 김솔잎 작가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자인 솔잎 작가 입봉을 밀어주는 거랑 마음에 드는 배우를 양보하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그러니까 선택해요. 내 작품? 아니면 우리 솔잎 작품?”
곁을 보니 김솔잎이 씨익 웃고 있었다.
자신만만하다고 해야 할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이지연 작가와의 경쟁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하하하. 이 이걸 어쩐다?”
다들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이면 백 이지연 작가의 작품을 택하겠지만 김솔잎 작가가 바로 그 이지연 작가의 제자라는 점이 문제다.
한 번의 선택으로 괜히 억한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
모두가 대답을 망설이자 구성철 실장이 총대를 메고 답했다.
“작가님. 일단 이러실 게 아니라 일단 대본부터 나온 뒤에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 게······”
“어머. 내가 대본을 안 보냈나? 내가 정신이 없어서.”
이지연 작가는 까톡으로 곧장 대본을 보내왔다.
“지금 당장 읽어 봐도 좋아. 작품은 자신 있으니까. 오랫동안 준비하던 작품이라 4화까지 완성됐고 마무리까지의 윤곽도 다 나왔어. 그리고 제작사는 붉은달이야. 남주는 에이스 엔터 최준우. 와꾸 좋지?”
업계 1위의 드라마 제작사와 손을 잡은 이지연 작가의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난 까톡으로 받은 대본을 보는 척하며 다이어리를 살폈다.
하지만 이지연 작가의 작품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은 역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지연 작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유노~. 유진이 내 작품에 보내주기 싫어? 표정이 왜 그리 뚱해?”
이지연 작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