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8화
258. 기회 2
“1년에 7천! 대신 시청률 10% 넘으면 3천이 아니라 5천 더 줄게요!”
계약금을 조금 깎는 대신 조건부 계약금을 더 늘려준다.
양은정 홍보이사는 <먹방의 대가>가 10%는 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지금 이 추세라면 충분히 10%를 넘길 수가 있는 수치였다.
양은정 홍보이사가 자신만만하게 우리에게 말한다.
“어때요? 그쪽 말대로 10% 넘으면 그쪽이 천만 원 더 이득이잖아. 안 그래요? 대신 못 넘으면 그쪽이 나한테 양보해야지.”
이영진이 날 힐끔 쳐다본다.
‘어떻게 해?’
‘콜!’
눈을 마주친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진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나 역시 이영진을 따라 일어나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
조건부라지만 1억이 넘는 금액이었으니까.
인사를 마친 순간 양은정 홍보이사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 10%로 넘길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물론입니다. 이사님.”
양은정 홍보이사가 우릴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 굴렁쇠 엔터가 잘 나간다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네. 젊은 팀장이랑 부하 직원들이 패기가 넘쳐서 그런가 보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너스레를 떨자 양은정 홍보이사가 이영진을 보며 손을 내민다.
“이영진 씨라고 했나?”
“아. 네”
“똑 부러지게 일 잘하네. 혹시 식품 마케팅에 관심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요. 대우 잘해 드릴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이사님!”
협상 상대의 극찬을 듣자 이영진의 얼굴에도 이제까지 없던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와 동시에 내 어깨에도 조금은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CK 식품과 거래를 마친 뒤 양은정 홍보이사의 배웅을 마쳤다.
조응천 이사가 소파에 앉으며 혀를 내두른다.
“하여간 겁이 없어 겁이. 내가 안 나섰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음식 회사가 CK 식품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조응천 이사가 날 빤히 쳐다본다.
“정 팀장이 요즘 잘 나간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머리 돌아가는 게 요즘 사람답게 아주 비상해?”
“감사합니다.”
“크흠. 칭찬인 줄 알면 하루 그 친구. ‘먹방의 테이블’ 출연료나 좀 조정하지. 설마 그것도 이영진 매니저가 담당하나?”
“아니요. 저희 팀 배우 출연료 협상은 일괄적으로 제가 맡습니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이영진은 이미 양은정 홍보이사 앞에서 뻥카를 사용한 뒤로 하얗게 불타고 재만 남았기에 더는 거래를 맡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제부턴 나의 시간이다.
“저희 하루의 몸값은······.”
그 순간 조응천 이사에게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이거 정말 못 당하겠군.”
곧 방송하는 예능 프로 <먹방의 테이블>에서의 편당 출연료는 500만 원.
애당초 <먹방의 대가>에 이은 연계 출연이 약속되지 않았으면 최소 편당 1천만 원을 불렀을 거다.
하지만 이미 계약서에 출연이 약속되어 있었기에 적당한 선에서 양보했다.
그런데 조응천 이사가 회사로 날 부른 건 단지 광고 때문이 아니었다.
“실은 우리 유 PD가 신규 프로를 또 하나 기획했네.”
“신규 프로요? 저번 ‘지옥 포차’가 아니라요?”
“그래.”
순간 블러핑인가 싶어 슬쩍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11월 2일]
-PM 09:5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TVM <지옥 포차> 1화 시청률 3.2%)
‘진짜인가 보네.’
조응천 이사는 직접 듣는 게 좋을 거라며 기획자인 유현지 PD를 불렀다.
“솔직히 시기는 좀 이른 편이긴 한데 ‘먹방의 대가’가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좋아서 후속작을 기획했어요.”
“컨셉이 어떻게 됩니까?”
“이태풍 씨와 하루와 미소가 함께 먹방 여행하는 프로를 찍어볼까 해요.”
가제 <먹방 여행기>.
<먹방의 대가>에 이은 후속 프로그램으로 삼촌 역인 이태풍이 하루를 데리고 전국 맛집 투어를 가는 내용으로 기획을 했단다.
“그러면 미소는 어떻게 들어갑니까?”
“미소는 3화에 엄마 역으로 출연했던 배연진 씨랑 같이 움직이는 거로 하려고요.”
배연진은 <먹방의 대가>에서 미소의 엄마 역할로 나온 배우인데 앞으로 5년 뒤 <지니의 꿈>이라는 드라마로 시청률 20%를 넘기며 크게 성공한다.
그전까지 단역과 조연을 오가며 빛도 못 보지만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그녀의 인생이 바뀔지도 몰랐다.
지금 당장은 단역 하나만 해도 엄청나게 소중한 시기였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난 나쁘지 않은 기획이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줄 조정이 제일 문젠데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현지 PD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사님. 들었죠? 정 팀장이 한다는 거? 대신 이번에도 제작비 후려치시면 저 이직할 거예요?”
조응천 이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작비는 기대해도 좋아. 내 넉넉히 책정해 줄 테니까.”
들뜬 유현지 PD가 대략적인 일정 스케줄을 말한다.
“이번 화 촬영 마치고 세부 기획 들어가고 사전 답사까지 다녀오려면 10월 말 정도는 되어야 스타트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면 본 계약이랑 출연료 협상은 10월 초 지나서 했으면 합니다.”
유현지 PD가 눈을 번뜩인다.
“개봉 성적 보고서 출연료 잡아달라 이거네. 맞죠? 그쵸?”
“예.”
조응천 이사 역시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때 출연료 협상을 하자는 걸 보니 성공을 자신하는 눈치군.”
난 대답을 하지 않고 흐뭇하게 웃었다.
성공?
아뇨 대성공을 할 겁니다.
하지만 난 입을 열지 않았다.
“알겠네. 나도 결과가 궁금하군. 그때 다시 보지.”
조응천 이사는 최근 연이은 내 성공에 불안한 눈빛을 보였지만 설마 그 정도로 크게 성공할지 반신반의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영화를 개봉하고 나면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거다.
천만 영화의 주연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었으니까.
* * *
하루의 광고 계약은 차후 법무팀끼리 서류를 주고받기로 한 뒤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그제야 이영진이 긴 한숨을 내쉰다.
“으으으. 내 심장.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제법이던데 이영진.”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기억도 안 난다. 윤호야. 나 괜찮을까? 혹시 찍힌 거 아닐까?”
“뒤늦게 뭐 하냐? 양 이사님이 너보고 잘했다고 스카우트 제의한 거 잊었어?”
“언제?”
골똘히 생각하던 이영진이 날 빤히 쳐다본다.
“아 식품 마케팅에 관심 있으면 연락하라던 게 그 뜻이었어?”
하루만 생각하다 보니 정작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귀에 담지도 않았나 보다.
“그래. 그리고 하루에게는 담당 매니저님이 직접 이 소식을 전해 줘.”
“고맙다. 윤호야.”
난 히죽이죽 웃는 이영진을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미소와 하루는 1층 거실에서 술래잡기하고 있었다.
미소는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기에 두 손을 허공에 휘적거리고 있었다.
“하루 오빠. 어디 있어?”
“여기야! 여기!”
하루가 손뼉을 치며 자기 위치를 알렸다.
미소가 다가가자 하루가 쏙하고 피한다.
“어? 하루 오빠. 방금 내 옆에 지나갔어?”
“응~”
“아깝다! 잡을 수 있었는데!”
유진이와 정인지 주인아줌마는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혹시나 미소가 다칠까 봐 두 팔을 벌린 채 벽 쪽에 서 있었다.
“미소야 빨리 잡아야지.”
“미소야! 하루 오빠는 옆으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어!”
그때였다.
하루가 현관문으로 들어온 내 쪽으로 향했고 미소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그 뒤를 따랐다.
하루가 우릴 발견하고 인사하려는 사이 난 쉿 하고 하루의 인사를 막았다.
그 순간 미소가 하루의 등을 콱하고 잡았다.
“잡았다!”
미소가 안대를 벗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 유노 삼촌!”
하루는 당했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해맑게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형 왔어요?”
이내 미소가 하루의 등에서 손을 떼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삼촌 언제 왔어요?”
“지금 막.”
두 팔을 뻗은 미소를 안아주자 해맑게 웃는다.
인사를 마친 난 이영진을 쳐다봤다.
이영진이 기쁜 표정으로 하루에게 광고 소식을 알렸다.
“하루야. 너 광고 땄어!”
“광고요? 어디요?”
“CK 식품의 레토르트 식품 광고. 카레하고 짜장인데 며칠 안으로 계약서 가져올 테니까 법무팀과 상의해서 도장 찍자.”
하루가 못 믿겠다는 듯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진짜로 제가 광고를요?”
미소가 신이 나 대답한다.
“우와! 하루 오빠! 그럼 우리 맨날 카레와 짜장 먹는 거야?”
정인지 주인아줌마가 하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우리 하루. 잘됐네 잘됐어. 고생했다.”
하루는 첫 광고 소식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난 이영진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영진아. 금액을 말해줘야지.”
“아 응. 그래야지.”
함께 온 이영진이 침을 꿀떡 삼키고 말했다.
“1년에 7천인데 드라마 흥행이 10% 넘으면 최대 1억 2천까지 가능해.”
충격적인 소식에 하루는 눈만 끔벅였다.
“아니 그게······.”
그 순간 유진이가 선배랍시고 어깨를 툭 건드린다.
“축하해. 신인 광고료로는 이례적으로 큰 액수네. 오빠들이 신경을 많이 써주셨나 보다.”
그때였다.
정신을 차린 하루가 갑작스레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이영진과 날 반씩 안은 하루가 양손에 힘을 꼭 주고 외친다.
“감사합니다!!”
하루가 우리 둘 사이에 작은 머리통을 묻고 울먹거렸다.
난 오른손으로는 미소를 안은 채로 왼손으로 들썩이는 하루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이영진은 함께 눈물을 흘리며 하루를 안아줬다.
하루를 진정시킨 난 연이어 미소에게도 말했다.
“그리고 우리 미소가 나갈 먹방 프로도 하나 따왔어. 10월 말에 찍을 거야. 하루도 함께.”
“진짜요? 하루 오빠도 같이?”
“응!”
미소가 활짝 웃으며 내게로 다시 한번 안겼다.
“역시 삼촌 최~고!”
내게는 그 어떤 돈보다 미소의 포옹이 더 큰 보상이고 행복이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회귀했나 싶을 정도로.
* * *
최은태 회장의 아들을 찾으라는 특명을 받고 한동안 경기도 인근을 헤매던 날새 이범준이 서울로 올라왔다.
날새는 압구정동의 한 조그마한 카페에서 근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김동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경기도 내의 보육원으로 목표를 한정하고 조사를 시작하자 다행히 그리 어렵지 않게 목표물의 범위가 좁혀졌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추려진 후보들의 면면이다.
하필이면 유력 후보군에 굴렁쇠의 정윤호와 같은 보육원의 출신인 강은기가 있을 줄이야.
애써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다른 보육원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특유의 촉이 자꾸만 신호를 보내왔다.
‘아니면 좋겠지만 둘 중 한 놈일 가능성이 커!’
날새는 자신이 큰 위험에 빠졌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XX. 어떻게 하지?’
단지 사람을 찾는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여차하면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최만식 대표는 자신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는 경쟁자를 미리 제거하려 들 거고 명동의 큰 어른 최은태 회장은 자기 핏줄을 살리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 경우 자신의 목숨도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정윤호가 최은태 회장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정보를 김동수에게 알렸다가는 어떤 일이 터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미치겠네. 차라리······ 감옥에 다시 가야 하나? 괜히 김동수 그 썩을 놈의 도움을 받아서는.’
아무리 감옥이 싫다고 해도 죽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
이범준은 불안함을 다스리지 못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때였다.
딸랑.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카페의 문이 열렸다.
김동수와 주호성이 나타나자 날새는 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김동수가 자리에 앉으며 본론부터 물어왔다.
“찾았어? 못 찾았어? 그것만 말해.”
안 그래도 걱정이 태산인데 김동수의 강압적인 말투를 듣는 순간 날새는 빈정이 상해 버렸다.
“못 찾았으면? 어떻게 되는데?”
“뭘 어떻게 돼? 다시 감옥 가야지. 쓸모도 없는 XX!”
날새는 그 순간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XX.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있잖아! 나 진짜 열심히 한다고!”
그러자 주호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이봐요. 이범준 씨. 열심히 하면 뭐 해 결과를 내야지. 결과를.”
“넌 또 뭐야?”
날새의 거친 태도에도 주호성은 생글생글 웃음을 끊지 않았다.
“나? 앞으로 당신을 관리할 사람. 아 그리고 똑바로 팀장님이라고 불러요. 안 그러면 진짜 피곤하게 해줄 테니까.”
순간 날새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겉으로는 공부만 하게 생긴 주호성에게서 김동수에게 느끼지 못한 섬뜩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는 착하고 선한 눈으로 보이겠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날새에겐 눈앞의 주호성이 뱀과도 같은 악랄함을 가졌다는 게 보였다.
눈치 빠른 날새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그럽시다. 내가 성질이 좀 급해서. 초면에 실례했수다. 팀장님.”
날새가 냉큼 고개를 숙이자 주호성의 입가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쳤다.
“그래. 개는 개답게 굴어야지. 자 그러면 어서 말해 봐요. 조사 경과는 어떤지.”
날새는 자신이 아는 걸 말했다가는 결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XX. 말 안 해.’
못 배우고 무식했지만 눈치 하나로 죽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다.
날새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며 이 판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