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6화
256. 위험 제거 3
“어떻게 되긴. 쟤가 우리 최영은 편집장에게 돈 먹이고 거래하려 들었던 증거를 싹 모아서 고소한다고 했지.”
장지혜 대표는 최태성 감사 팀장을 통해 얻은 자료들을 모조리 보여줬다고 한다.
강지영 본부장은 장지혜 대표의 빠른 대응에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대기업이 무섭긴 무섭구나~”
“그래.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그렇지. 하려고 하면 또 못하는 게 없긴 해.”
피식 웃던 장지혜 대표는 이번엔 날 향해 말했다.
“그런데 정 팀장. 한세화 저 여자 인맥을 알아보니까 만만치는 않던데?”
“예. 발이 넓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최소한 얼마간은 잠잠할 거야. 나랑 대놓고 싸우기 싫으면 당분간 반성하는 척이라도 할 거고. 어때? 내 선물. 마음에 들어?”
골프를 치고 난 뒤로 가까워진 터라 장지혜 대표가 조금은 편하게 말한다.
“깜짝 선물이라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마음에 쏙 듭니다.”
“그럼 다행이네. 이제 밥 시킬게.”
장지혜 대표가 벨을 눌러 웨이트리스를 부르더니 1인분에 20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난 그녀의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그런데 유진이가 우먼즈 9월호 표지라뇨?”
장지혜 대표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게 내 두 번째 선물이야. 유진 씨 이번에 L.M.L 모델도 됐잖아. 그러니까 잘 차려입고 메인으로 세웠으면 해. 신규 브랜드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도 많으니까 정유진 특집 겸 L.M.L 특집이라고나 할까?”
장지혜 대표가 연신 유진이를 띄워준다.
그 말에 강지영 본부장이 코웃음을 친다.
“하여튼 이 언니 날로 먹는 데는 도가 텄다니까. 그렇게 말하고 은근슬쩍 다음 달에 협찬 부탁하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요? L.M.L은 명품이라서 안 돼요!”
“얘는 누가 그걸 몰라?”
“예?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요?”
“어떻게 하긴. L.M.L은 몇 개만 협찬해주고 나머지는 LM 의류 쪽 물건으로 주면 되잖아.”
장지혜 대표가 싱긋이 웃으며 내게 묻는다.
“어때. 정 팀장. 가능할까?”
“잠시 통화 좀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곧장 LM 의류의 이영아 실장에게 전화를 걸자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협찬이라고요? 작은 로고가 박힌 에코백은 5만 개까지 가능하고요 L.M.L 백은 5개까지 지원 가능해요.
생각보다 통 큰 지원에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리고 이건 제 의견인데 L.M.L 백에는 유진 씨 사인을 넣는 게 어떨까요?
이영아 실장은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다.
“한번 확인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조만간 한번 회사에 들어오세요. 미소 아동복도 계약해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조만간 들어가겠습니다.”
-조만간 또 봬요~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마치자 장지혜 대표는 생각지도 못한 성과에 크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역시 정 팀장이네. 나 솔직히 우리 지영이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정 팀장한테 나랑 일하자고 말했을 거야.”
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새초롬히 쳐다본다.
“언니. 뭐예요 지금?”
“왜 그렇게 쳐다봐? 너 때문에 제안 안 했다니까?”
“꿈에도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정 팀장은 놔 줄 생각 없으니까!”
장지혜 대표가 피식 웃는다.
“잘 지켜. 만약에 너희 회사에서 못 지키면 내가 확 낚아채 버릴 거니까.”
“이 언니가 뭐래요?”
“아 왜? 뭐 말도 못 해?”
“침 바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요!”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런데 말이야. 좀 전에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뭔 이야기요?”
“정 팀장이 사실은 엄청난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문.”
너무도 어이없는 이야기에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가요?”
장지혜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전에 한 대표가 그러더라고. 류신 비서실장이 당분간 정 팀장은 건들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던데? 거기다 나까지 나서서 비호를 하니까 어디 재벌가의 숨겨진 아들이냐고 묻는 거 있지?”
장지혜 대표의 말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재벌 아들이라······ 우습네.’
고아였던 내가 다이어리 덕분에 그런 오해까지 사게 될 줄이야.
“재미있네요.”
어깨를 으쓱거렸더니 장지혜 대표가 씨익 웃는다.
“하긴 그렇게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당당한 태도에 능수능란한 일 처리. 그리고 나도 잘 모르는 정보를 알아 오는 것까지. 거기다 가진 돈을 탁 털어서 예뜨랑의 주식을 사는 스케일도 그렇고 하여간 일반적인 직장인이 보여주는 행동은 아니니까.”
장지혜 대표는 생각 이상으로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마치 내 뒷조사를 한 듯한 말이다.
그 순간 장지혜 대표가 내 표정을 보고 미안한 기색을 짓는다.
“내가 하는 말.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마. 나 정도가 되면 출근하자마자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가 책상에 쌓이니까.”
“그렇습니까?”
“때론 나도 기분이 별로야. 남의 사생활을 들춰보는 거 같거든. 그런데 그건 그거고 앞으로 정 팀장은 조심해야 할 거야. 나보다 더 많이 알고 나보다 더 정 팀장을 욕심내는 사람들이 생길 테니까.”
하긴 생각해보면 장웨이 회장도 날 잠깐 본 뒤 자신의 오른팔인 류신 실장을 한국으로 보내 날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할 정도로 이어지는 러브콜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정체성이 흔들리진 않았다.
여전히 난 매니저가 천직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더군다나 아무리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해도 다른 업계로 갈 생각도 없었다.
내 손에 의해 스타로 자라나는 연예인을 보는 게 얼마나 뿌듯하고 즐거운 일인데.
“조언 감사드립니다.”
장지혜 대표가 씨익 웃는다.
“이것 봐.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거. 진짜 정 팀장 가만 보면 딴 세계 살던 사람 같다니까. 진짜 27살 맞아?”
아뇨.
27살이 아니라 37살입니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 살던 게 맞고요.
그렇게 대답하려는 걸 꾹 참고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여러모로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음 달 표지 모델로 유진이를 선정해주신 것도요.”
“내가 더 감사하지. 오늘도 유진 씨 기사가 연예면 절반은 채우고 있던데. 덕분에 이번 달에는 3쇄까지 찍었다니까?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장지혜 대표는 기꺼운 표정을 감추지를 못했다.
그 순간 애피타이저가 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식전주 아페리티보는 건너뛰었기에 모둠 전채요리로 시킨 안티 파스토 미스트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장지혜 대표는 짙은 오크색 나무 접시에 담긴 햄과 치즈들을 깨작대다 묻는다.
“저기 정 팀장. 우리 잡지가 레스토랑을 많이 다루는 건 알지?”
“알죠.”
“하루 그 친구와 함께 올해의 베스트 10으로 선정된 식당 위주로 쭉 돌면서 먹고 인터뷰하면 반응이 괜찮을 것 같은데······.”
잠깐 고민하던 난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9월호 전까지 ‘먹방의 대가’에서 나간 식당들도 함께 다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럼 전 무조건 오케입니다.”
장지혜 대표의 얼굴이 환해진다.
“오케이. 그럼 바로 준비시킬게. 대신 약속 어기면 안 되는 거 알지?”
장지혜 대표가 포크를 내려놓고 즉각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 와중에도 업무 처리를 하는 걸 보자 강지영 본부장이 혀를 내둘렀다.
전화를 마친 장지혜 대표가 빙긋이 웃는다.
“오늘 맛있게 먹고. 조만간 표지 촬영 때 또 봐. 그땐 이런 곳 말고 하루가 가는 식당에 가자.”
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맞장구를 친다.
“하루 이야기하니까 갈비찜 먹고 싶죠? 그쵸?”
“너도?”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 뒤 날 쳐다본다.
“정 팀장님은 어때요?”
“저 저도요?”
하루가 만들어준 갈비찜을 먹었지만 그냥 말했다간 부러움의 눈초리에 밥도 못 먹을 것 같았다.
“아쉽긴 하지만 오늘은 이것부터 먹자. 나도 빨리 들어가서 일 봐야 해.”
“예~.”
그때부터 우린 차례대로 나오는 코스 요리를 맛보며 내가 데리고 있는 연예인들의 근황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장지혜 대표가 내 든든한 뒷배가 된 덕에 위험요소가 또 하나 사라진 날이었다.
* * *
<먹방의 대가> 3화가 방송될 시간.
회사에서 급한 일을 처리한 뒤 집으로 돌아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1층으로 내려가자 미소가 환한 표정으로 날 반긴다.
“삼촌이다~!”
미소가 날 발견하고 소리친 순간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린다.
“어 윤호 오빠다.”
“유노 오빠!”
마치 다들 내가 연예인이 된 것처럼 환하게 반겼다.
“오늘도 여기서 저녁 먹으려고?”
“네. 하루가 부침개를 한다고 오랬거든요.”
세리가 오늘은 부침개를 실컷 먹을 거라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대신 힘든 반죽은 저희가 다 했어요!”
세리는 반죽을 언니들과 자기가 다 했다며 결코 하루랑 주인아줌마에게만 일을 맡긴 게 아니라고 거듭 말한다.
“저녁으로 부침개 가지고 되겠어?”
“그래서 2장씩 먹으려고요.”
“차라리······ 밥을 먹어.”
세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노노~ 오늘은 무조건 부침개 데이임! 요즘 먹방의 대가 보면서 음식 따라 먹기가 이슈인 거 몰라요?”
난 힐끗 거실 쪽 창문을 바라봤다.
집까지 오는 동안 흐린 먹구름이었지만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며 토독토독거리는 소리를 낸다.
‘비가 오니 사람들 부침개 많이 먹겠구나.’
하늘이 돕는 건지 때에 맞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 비 오는 날은 부침개가 맛있지. 먹자.”
TV는 이미 TVM 채널에 맞춰져 있었고 식탁에는 식탁보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신이 난 미소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삼촌! 맨날 맨날 이렇게 사람들 많았으면 좋겠어요!”
“미소는 사람 많은 게 좋아?”
“대땅 좋아요!”
안쓰러운 마음에 미소의 머리를 쓰다듬자 미소가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 주방에서 주인아줌마가 외친다.
“얘들아. 이제부터 구울 테니까 되는 대로 날라.”
“예~ 아줌마.”
다들 일제히 화답하자 데워진 프라이팬에 부침개 반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달궈진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부침개 반죽이 올라간 순간 치익 하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왔다.
반죽이 지글지글거리며 기름에 익는 소리가 난다.
이내 고소한 냄새가 주방에서 거실까지 전해왔다.
“으으······ 못 참겠다.”
세리가 군침을 흘리며 한마디를 꺼내자 다들 따라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응. 진짜.”
“냄새 완전 대박!”
그때였다.
찰팍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접시에 부침개가 담겼다.
“자 먼저 한 장 가져가. 바로 또 줄 테니까.”
“아싸! 미소야 가자!”
“응! 세리 언니!”
세리와 미소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간다.
그 뒤 세리와 미소는 마치 올림픽 성화 봉송이라도 하듯 경건한 표정으로 부침개를 가져왔다.
세리가 조심스레 그릇에 담긴 부침개를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새하얀 사기그릇에 담긴 부침개는 노릇노릇한 색을 내고 있었는데 끝자락은 손만 대도 바스락댈 정도로 빠삭하게 익은 갈색이다.
부침개는 부추가 가득한 밀가루 반죽에 홍합과 오징어살까지 빼곡하게 박혀 있었는데 어찌나 재료들을 아낌없이 썼는지 한 장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만 같았다.
“삼촌~. 나 이거 3장 먹을 거예요!”
“미소는 마음껏 먹어도 돼.”
세리가 뾰로통하게 쳐다본다.
“유노 오빠. 미소는 왜 3장이에요?”
“미소는 성장기잖아.”
“저도 성장기거든요?”
세리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쭉 폈다.
미안 세리야.
너 성장 끝났어.
하지만 자라나는 새싹을 내 손으로 꺾기 싫어 조용히 속닥였다.
“부침개 한 장에 550kcal······.”
세리가 움찔한다.
“지 진짜요?”
갈팡질팡하는 세리의 눈빛을 보자 양은비가 어깨에 손을 턱 하니 올린다.
“한 장만 먹자 세리야?”
“은비 언니. 저 말 거짓말이지? 어떻게 부침개 한 장이 칼로리가 그렇게 높아?”
“과학이라는 게 참 신기하지?”
다이어트를 끼고 살아가는 걸그룹은 칼로리에 누구보다 민감하다.
덕분에 세리가 부침개를 2장씩 먹는다는 이야기가 쏙 들어가 버렸다.
* * *
잠시 후 주인아줌마가 마지막 부침개를 들고 와서 놓자 테이블에는 총 6장의 부침개가 놓였다.
“시작한다.”
<먹방의 대가> 3화가 시작한 순간 우린 두 손을 모으며 외쳤다.
“잘 먹겠습니다~!”
다들 앞접시에 부침개를 덜어놓기 먹기 시작했다.
노릇노릇한 부침개가 반으로 쭉 갈라지면 찢어진 부침개 사이로 잘게 자른 홍합과 오징어 조각이 떨어졌다.
떨어진 홍합과 오징어를 젓가락으로 찢은 부침개 위에 얹은 다음 하루가 만든 특제 양념간장에 찍어 한입에 넣었다.
짭조름하고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간장의 맛과 홍합의 감칠맛 부추의 신선한 맛 그리고 오징어의 탱글탱글한 식감들이 동시에 느껴진다.
‘끝내주네.’
미소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와~ 진~짜 맛있다! 하루 오빠! 짱이야!”
“진짜?”
“응응!”
연이어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러게? 어쩜 이리 맛있지?”
“하루야! 나 나중에 레시피 좀 알려줘!”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쟨 음식 장사를 해도 성공할 거야.”
하루가 직접 맞춘 반죽 비율이기에 프로의 맛이 난다.
“아니에요.”
하루가 부끄러워 두 손을 휘휘 젓는다.
그 순간 <먹방의 대가> 3화에서 미소가 부침개를 먹는 장면이 나왔다.
미소가 뜨거운 부침개에 입천장을 덴 씬을 보자 은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미소야. 저거 찍을 때 많이 아팠지? 이제 괜찮아?”
은아가 조심스레 묻자 미소가 고개를 젓는다.
“은아 언니. 저거 차가운 거예요.”
“저게······ 식은 걸 먹는 거라고? 그럼 저거 다 연기야?”
“응!”
미소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다들 날 쳐다본다.
그때 난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순간 은아가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미소야.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한 거야?”
그 순간 미소가 그릇에 남은 부침개를 집어 들고 한 입을 베어 문다.
미소가 젓가락을 놓치더니 두 손으로 입을 두드리며 외쳤다.
“하뜨~ 하뜨~거!”
미소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들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괘 괜찮아? 미소야?”
“하루야 물! 물! 물 어디 있지?”
미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자 은아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세리는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미소가 부침개를 꿀꺽 삼키고 배시시 웃는다.
‘참 쉽죠~’라는 듯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