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4화
254. 위험 제거 1
강남의 최고급 와인바인 ‘에비앙’.
류신 비서실장과는 예전에 장웨이 회장을 만났던 장소에서 혼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강지영 본부장에게 약속 장소를 전한 난 홀로 에비앙으로 향했다.
끼익.
우선 골목에 차를 세운 나는 다이어리부터 확인했다.
이맘때 즈음해서 화연 미디어와 관련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는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8월 18일]
-PM 01:00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SNMG) 왕룽 팀장 귀국 배웅. (보고 사항 : 화연 미디어와의 방송권 출판권 분쟁.)
회귀 전 이 무렵.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에서 한국으로 출장 나온 왕룽이라는 팀장과 친분을 다진 일이 있다.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은 화연 미디어와 함께 중국 본토의 연예계를 양분한 거물이기에 나는 특별히 접대에 신경을 썼다.
다행히 왕룽 팀장은 나와 나이가 같았기에 짧은 시간에 급격히 친해졌다.
덕분에 귀국 전 마지막 날 접대 자리에서 왕룽 팀장으로부터 정보 하나를 건졌다.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 화연 미디어 그룹 사이에서 큰 다툼이 일어날 예정이니 화연과 협력을 하려는 계획이 있으면 줄을 잘 서라고 말이다.
왕룽은 중국 공산당 최고위급 간부의 아들이었기에 정보의 신뢰도가 상당히 높았다.
난 즉각 그 정보를 김동수에게 보고했고 덕분에 김동수는 두 그룹 사이의 분쟁을 이용해 경영진으로부터 능력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니 지금쯤 아마도 화연 미디어 그룹 경영진은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의 다툼으로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있을 거다.
그런데 왜 장웨이 회장의 비서실장이 한국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8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다툼이 있다고 해도 이미 전조 증상은 나타나야 정상일 테니까.
“뭐. 만나보면 알겠지.”
난 회귀 전 정보를 확인한 뒤 다시 에비앙으로 차를 몰았다.
에비앙 앞에 차를 멈추자 건장한 남자들이 날 막아 세운다.
과거 장웨이 회장이 왔을 때도 에비앙의 입구를 지키던 자들이다.
그들은 날 보자마자 차 키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라. 류 비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설픈 한국어로 말하는 경호원에게 되물었다.
“혹시 장 회장님도 함께 오셨습니까?”
경호원들은 미리 교육이라도 받았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말없이 앞서는 직원을 따라가자 VIP 2번 방이 나온다.
지난번 장웨이 회장을 만났던 룸보다는 조금 작은 룸이다.
“들어가시죠.”
직원이 문을 열어주자 긴 테이블의 끝에 익숙한 얼굴의 한 남자가 보인다.
“당신은······.”
류신 비서실장이라는 남자는 장웨이 회장을 처음 만난 그날 곁을 지켰던 네 명의 남자 중 한 명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경호원인 줄로만 알았었다.
“다들 나가서 입구에서 대기해.”
어설프게나마 중국어를 할 수 있었기에 류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경호원들이 문을 닫고 나서자 류신이 한쪽 자리를 가리켰다.
“오래간만이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 깍두기들은 뭡니까?”
“깍두기라······.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만약을 대비한 직원들입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저희 어머님이 서울에서 나고 자란 한국분이십니다.”
난 대화를 하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류신이 씨익 웃으며 빈 위스키 잔을 내민다.
“한잔하시죠.”
그의 손에 들린 건 장웨이 회장이 한 병을 한잔에 퍼부었던 글렌피딕 40년 산.
알겠다고 대답하면 또다시 술을 모조리 부어버릴까 싶어 곧장 거절 의사를 밝혔다.
“술 마시러 온 게 아닙니다.”
“너무 경계하시는데요?”
류신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신의 빈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리고 내게는 얼음과 캔 콜라를 내민다.
“술이 싫으시면 따로 드시고 싶은 걸 말씀만 하십시오. 여기 주방장님 솜씨가 괜찮습니다.”
“환대는 감사하지만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절 혼자서 오라고 한 이유가 뭡니까?”
류신이 입맛을 다시더니 자기 앞에 놓인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입가에 묻은 위스키를 닦은 류신이 빙긋이 웃는다.
“이번 일 꽤 잘 대처하시더군요. 한세화 대표가 제법 머리를 굴렸는데.”
그 순간 한세화 대표가 벌인 짓의 모든 배후가 바로 류신이라는 걸 알았다.
“설마 그쪽이 이번 일을 모두 주관한 겁니까?”
“제 의사라기보다는 회장님이 특별히 지시하신 사항을 처리한 것뿐입니다.”
장웨이 회장 쪽에서 손을 쓴 건 알았다.
글로벌 화장품 회사 ‘블랑’이 고작 한세화의 말만 듣고 움직였을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 모든 걸 장웨이 회장의 오른팔인 류신이 처리했다고 한다.
“당신이었군······.”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어 버릴까 했더니 류신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당황한 날 놓아둔 그가 옷차림을 정돈한 뒤 말을 이었다.
“회장님의 전언이 있습니다.”
류신은 얼굴에서 웃음을 싹 지운 채 말했다.
“저희 화연 미디어의 한국 지사장이 되어 주십시오.”
“뭐라고요?”
류신이 자세를 풀고 웃음을 지었다.
“조만간 설립될 화연 미디어의 한국 지사장을 맡아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류신이 계속 이어 말한다.
“1차 투자 규모는 2백억이고 2차는 확보한 연예인들에 따라서 5백억까지도 가능합니다. 뭐 지금 정 팀장님이 데리고 계신 배우들 면면만 봐도 2차 투자까지는 무난할 것 같군요.”
이제껏 날 원했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제안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기억 속 화연 미디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회귀 전.
화연 미디어의 지사장이었던 왕현석은 정 재계 인사들에게 접대하며 규모를 키우다 검찰에 의해 조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2차 조사 직전 왕현석 지사장이 갑작스레 실종되어 버렸다.
장웨이 회장은 자회사의 비리를 몰랐다며 시치미를 뚝 뗐기에 검찰은 혐의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해 버렸다.
당시 매니저들은 술을 마시며 비밀을 많이 아는 왕현석이 죽임을 당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런 미래가 빤히 보이는 선택지를 고를 생각 따윈 없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상대의 의도를 확인해 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런 제의를 하신 저의가 뭡니까? 장 회장님이 하시는 일을 파투낸 절 좋게 볼 리가 없을 텐데.”
“이 정도 규모의 피해는 저희에겐 피해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회장님은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을 후원하기를 즐기십니다. 게다가 정 팀장님은 이번 일로 자신의 능력을 당당히 증명하셨죠.”
류신이 품에서 새하얀 백지와 몽블랑 마크가 그려진 검은 케이스를 내밀었다.
“그러니······ 적으십시오.”
“뭐를 말입니까?”
류신이 빙긋이 웃는다.
“드라마에선 이렇게 하던데 이게 아닌가 봅니다. 원하시는 연봉을 적으시면 됩니다.”
말로만 듣던 백지수표를 내민 류신은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잠깐 그의 눈을 살폈다.
한 치도 흔들림이 없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백지수표.
회귀 전에도 한 번 받아 본 적이 있었다.
수십억을 적든 수백억을 적든 배짱이 허락하는 한 마음대로 써 보라는 배포 큰 재계의 거물로부터.
당시에는 탑 엔터테인먼트의 여자 연예인들을 계속 공급하라는 음습한 제안이었다.
즉 이런 백지수표는 내가 적은 것 이상의 몸값을 해야만 한다는 구속이다.
사람은 본래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난 이미 돈을 위해 모든 걸 바친 그런 인생은 한 번 살아 봤었다.
회귀 전 김동수를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녔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더는 사절이다.
난 테이블에 놓인 백지수표를 다시금 류신에게 되돌려줬다.
“이 빈칸에 숫자를 채울 일은 없으니까 다시 가져가십시오.”
류신이 씨익 히죽 웃으며 잔을 비웠다.
“혹시 원하는 연봉을 저희가 못 맞춰 줄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습니까?”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습니다. 한국 연예계가 그리 크지 않은데 적어봤자 뭐합니까?”
순간 류신이 눈을 번뜩인다.
“그러면 한국 쪽 연예인들을 중국으로 보내면 되잖습니까? 그러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연봉을 받으실 수 있을 텐데요?”
“한한령(限韓令)을 우회하겠다는 말인가요.”
미국의 사드(THAAD) 설치 이후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에서 제작한 콘텐츠 또는 한국 연예인이 출연하는 광고 등의 송출을 금지하도록 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제한은 유지되고 있는데 내가 만약 화연 미디어의 지사장이 되면 내게만 그 제한을 풀어줄 수 있다는 거였다.
“역시 총명하십니다. 단번에 아시는군요. 중국계 회사가 만드는 콘텐츠와 소속 연예인들이라면 당과의 관계에 따라 충분히 예외를 줄 수 있죠. 우리 회장님과 당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거고 말입니다.”
류신이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그리고 연예계와 관련된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 정 팀장만 한 실력자는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게 회장님의 생각입니다.”
그 순간 화연 미디어가 한세화를 앞장세워 유진이를 공격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날 테스트한 건가?’
생각해 보면 과거 화연 미디어 그룹이 손을 쓸 땐 이번 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과격한 일을 벌였었다.
공산당을 뒷배로 두고 삼합회와도 손을 잡은 거물이니까.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빠졌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고 있었다.
류신은 내가 화연 미디어의 한국 공략 첨병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이번 ‘찌라시 사건’을 벌인 거다.
하지만 그건 류신의 입장이고.
내 입장에서는 기분이 더러울 뿐이다.
자칫 유진이의 연예계 생활이 끝날 뻔했고 나의 매니저로서의 위치가 흔들릴 뻔했었으니까.
“난 사람 머리 위에서 노는 인간들과는 일 안 합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감정이 상하실 순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보답해 드릴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이 돈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입니다.”
“그래도 거절한다면요?”
류신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한잔 술을 마신다.
“너무 비싸게 나오시는군요.”
얼음도 채 넣지 않고 독한 위스키를 가득 담아 원샷한 류신이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마치 사냥감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그렇다면······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겁니다. 정 팀장님이 저희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제안을 거절하자 역시나 협박으로 나온다.
회귀 전이나 회귀 후나.
권력을 가진 이는 언제나 똑같은 선택을 한다.
힘 있는 이들은 거절을 정말 싫어하더라고.
“설마 제 연예인들을 건들기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하하하.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어서 참 편하네요.”
난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내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거 같습니까?”
“회장님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정 팀장님을 손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게 바로 제가 잘하는 일이죠.”
류신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자신은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하고 싶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하지만 난 류신을 한국에서 치워버릴 방법을 알고 있다.
회귀자야말로 권력자보다 더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줄 시간이다.
“그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뭐든.”
“그쪽이 진짜 화연의 실세라면 한국에서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을 텐데요?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 분쟁이 격화되는 시점에 한국 지사 설립이라니······.”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던 류신이 고개를 갸웃한다.
“상하이 뉴미디어?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그걸 몰라요? 당신 정말 비서실장이 맞긴 맞습니까?”
회장의 비서실장이라면 그룹의 실세 중의 실세다.
그런 고위직이 화연과 상하이 뉴미디어가 본격적으로 싸우는 시점에 한국으로 와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이건 류신이 권력의 중추에서 밀렸다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 정보를 제한받고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
순간 류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근거 없는 소리로 날 흔들어 보려는 속셈이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본사의 지인들에게 연락이나 해보세요.”
본사의 중요한 일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회장의 대리인이냐는 핀잔에 류신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설마 자신의 위치를 의심 사게 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류신이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걸 본 순간 마지막 카운터를 날렸다.
“그리고 한 가지 조언을 해드리죠. 류신 실장님. 절 잡기 전에 자기 입지부터 다지세요.”
류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본다.
“또 무슨 소릴 하려고······.”
“당신네 회사 마룬 팀장이 당신 자리를 노리고 있는 거 모르십니까? 제가 듣기로는 이런 상황에 회사를 비운 당신을 ‘머저리’라고 말하고 있던데요?”
회귀 전 장웨이 회장이 데리고 다니던 비서실장의 이름은 눈앞의 류신 실장이 아닌 마룬 실장이었다.
내가 종종 만나던 비즈니스 상대로 골프를 유달리 좋아했었다.
그런 그는 나와 친해진 어느 날 술이 떡이 되어 자기 전임자를 밀어내고 자리를 강탈했던 일화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은 적이 있다.
류신 실장이라는 머저리가 방심한 틈을 타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고.
당시 마룬이 했던 말들을 전하자 자신만만하던 류신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션머?”
‘뭐라고?’를 뜻하는 중국어를 외친 류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