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3화
253. 상대가 뭘 하든 3
“최 본부장! 말로 할 때 당장 나가!”
“아 아니 그러니까 노출을 하라는 게 아니라 화제성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최태현 본부장이 뒤늦게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지연 작가는 들어줄 생각 따윈 없었다.
“장난해? 내 앞에서 방금 한 말도 까먹었어?”
이지연 작가는 삿대질까지 하며 최태현 본부장을 몰아세웠다.
“여기 정 팀장은 내 드라마가 시청률에 밀릴까 봐서 시키지 않아도 온갖 방법을 다 구상해오는데! 어찌 된 게 방송국에선 배우를 벗길 생각밖에 못 해? 엉? 당신 이것 밖에 안 돼?”
이지연 작가는 매니저보다 못한 방송국 본부장이라며 연신 최태현 본부장을 닦달해댔다.
씩씩대던 이지연 작가는 결국엔 화를 못 참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상대가 무려 MBS의 최상병 대표였다.
“최 대표님. 나 이 작간데 드라마국 최 본부장이 여기 와서 나보고 여배우들을 벗기라네? 이거 나 엿 먹이는 거 맞죠?”
설마 대표에게 다이렉트로 전화를 할 줄 몰랐는지 최태현 본부장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죄 죄송합니다. 작가님! 제가 잠시 미쳤나 봅니다······.”
하지만 이지연 작가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MBS의 대표를 몰아세웠다.
“대표님. 왜 내가 이딴 소리를 들어야 하죠? 내가 시청률을 망쳤어요? 아니면 사고를 쳤어요?”
이지연 작가가 쏘아내는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카랑카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거실이 쩌렁쩌렁할 정도로 울려 퍼졌다.
이제야 이지연 작가가 유진이와 미소를 대본 방으로 보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지연 작가는 미소와 유진이에게 지금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대본 방은 외부 소음을 거의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태현 본부장이 다급히 날 쳐다보지만 난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는 걸 참는 것만 해도 나로서는 많이 봐주는 거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MBS의 대표와 통화하는 이지연 작가의 언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여배우 벗기라는 거 MBS의 공식 입장이에요? 그것만 알려줘요. 나 지금 변호사한테 전화하기 직전이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지 최태현 본부장이 무릎을 꿇었다.
“자 작가님. 제가 그런 뜻이 아니라······.”
김성운 PD도 함께 무릎을 꿇었다.
전화를 받던 이지연 작가가 날 향해 말한다.
“유노~ 김 PD 데리고 나가 있어!”
이지연 작가는 김성운 PD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기에 나와 함께 마당으로 나가 있으라고 한다.
철저히 한 놈만 조져버리겠다는 이지연 작가의 눈빛을 본 순간 난 무릎을 꿇은 김성운 PD를 일으켰다.
“PD님. 같이 나가시죠.”
“아 아닙니다. 저도 잘못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자신도 같은 회사니 잘못했다고 빌어야 한다 했지만 이지연 작가가 외쳤다.
“김 PD까지 내 속을 긁을 거야? 당장 안 나가? 같이 콩밥 먹고 싶어?”
“아 아닙니다! 작가님. 당장 나가겠습니다!”
고소하겠다는 말까지 나온 순간 김성운 PD가 무릎에 스프링이 달린 듯 발딱 일어났다.
난 김성운 PD와 함께 빠르게 마당으로 달아났다.
* * *
회귀 전
최태현 본부장이 경계하고 있는 예능국 국장 장병훈은 국장에서 바로 이사로 올리려고 할 정도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엔 TVM의 스카우트를 받고 회사를 옮겨 버린다.
갑작스러운 경쟁자의 이탈이 생기자 최태현 본부장은 무난하게 이사로 승진했었다.
당시 매니저들은 최태현 본부장이 참 승진운이 좋다며 뒷담화를 해댔다.
하지만 이번 일이 그냥은 넘어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이어리를 확인해 보니 내 생각이 맞았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9월 23일]
-PM 03: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MBS 최태현 본부장 이사 승진. 화환 배송.)
‘쓸데없이 나대다 승진이 물 건너갔네.’
최태현 본부장의 조급함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가만히 있었으면 자연히 이사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함께 마당으로 나온 김성운 PD가 한숨을 푹푹 내쉰다.
“정 팀장님. 미안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우리 본부장님을 말렸어야 했는데······.”
여기 오면서도 이지연 작가 앞에서는 입조심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단다.
“하아~ 저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 거랍니까? 이 작가님 성격 유명하잖아요.”
“이 작가님에게는 고료를 더 올려드리는 조건으로 협상을 해보겠다며 큰소리를 치시더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노빠꾸로 풀악셀을 밟을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유진 씨를 벗기라고 할 줄은 진짜 몰랐습니다.”
김성운 PD가 연신 사과를 해댔다.
“김 PD님이 알고 오셨을 리가 없죠. 휴우~ 그래도 좀 얼얼하네요.”
“압니다. 본부장님······ 아니 본부장 저 인간이 미친 거죠.”
난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귀띔을 전했다.
이번 일로 김성운 PD가 타격을 입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혹시나 본부장님 라인 타신 거라면 라인 바꾸세요. 저분 승진은 물 건너갔으니까.”
“예? 정말입니까?”
“대표님께서 칼을 휘두를 것 같습니다. 이지연 작가님과 척을 질 바에는 본부장님을 쳐내는 게 남는 장사니까요.”
김성운 PD가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조금 더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겠군요.”
“아 그리고 소이영 노출 씬에 대비책을 마련해 뒀습니다.”
김성운 PD가 날 힐끔 쳐다본다.
“진짜 노출씬에 대한 대비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
난 김성운 PD에게 명품 브랜드인 L.M.L로 화제성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김성운 PD가 반색하며 대꾸한다.
“그러면 홍보 효과를 최대한으로 하려면 유진 씨 의상부터 싹 다 바꿔야겠군요. 아니다. 그럴 바엔 3화부터라도 부분 재촬영을 하는 게 좋겠는데요?”
“시간이 촉박한데 가능할까요?”
“유진 씨 혼자 있는 씬만 재촬영하면 3화부터 L.M.L 넣은 영상 뿌릴 수 있습니다. 뭐 편집은 밤샘하면 되는 거고요.”
“커피는 제가 무한으로 제공하겠습니다.”
“오래간만에 정 커피를 실컷 마시겠네요. 그러면 재촬영은 L.M.L 의상 오는 대로 바로 시작하시죠.”
그 순간 거실 쪽에서 이지연 작가의 고성이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으로 누군가 나오는 게 들렸다.
“아무래도 우리 본부장이 나오나 보네요.”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최태현 본부장이 사색이 되어 뛰쳐나왔다.
“기 김 PD. 어 어서 회사로 돌아가지!”
최태현 본부장은 날 보지도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김성운 PD는 이따가 연락하겠다는 신호를 주고는 급히 최태현 본부장의 뒤를 따라 나갔다.
* * *
<신의 이름으로>와 <돈의 축제>가 방영되는 8월 5일.
어제까지 연예면을 가득 채웠던 소이영의 노출과 <돈의 축제>와 관련된 기사가 사라져 버렸다.
[<신의 이름으로>의 정유진. 샤넬의 아시아 권역 모델 거절! “좋은 기회였지만 아직은 제가 감당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신의 이름으로>. 3화 예고편. 패션쇼를 연상하게 하는 화려한 청명의 의상.]
[정유진. 신규 명품 브랜드 L.M.L의 모델로 전격 발탁!]
[L.M.L 측. 신제품 라인은 드라마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
(댓글)
-주연도 아닌 조연한테 샤넬 제안이 들어갔다고? 언플 아님?
-언플이면 고소당하겠지. 두고 보면 알 듯.
-미친. 정유진. 샤넬을 거절해?
-와 진짜 대박이다.
-L.M.L이라고? 거긴 뭔데 샤넬을 까고 택해?
기사를 보던 한세화 대표와 홍장미 작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중에서도 자존심을 죽이고 노출을 감행한 소이영의 분노가 가장 컸다.
“왜 내 기사는 사라지고 이따위 기사들만 올라와? 이게 뭐예요! 대표님!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소이영의 독촉에 한세화는 쓴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엔터 회사가 돈을 쓴다고 하더라도 연 매출 2천억 대의 LM 의류가 쓰는 광고비에 비견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물량으로 밀린 덕에 한세화가 뿌린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셈이다.
“LM의 문 대표가 유진이 팬인······가?”
할 말이 없어진 한세화의 넋두리에 소이영이 버럭 화를 낸다.
“미쳐 정말! 그게 지금 할 말이에요?”
“아니 그럼 어쩌라고? LM 의류가 뿌린 돈이 얼만지 가늠이 안 될 정돈데!”
두 사람의 다툼을 지켜보던 홍장미가 싸늘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기다려 봐. 어차피 우리 이영이 덕분에 이번 화에 제대로 힘줬으니까. 잘 될 거야. 결과를 보자고.”
홍장미 역시도 누구보다 불안했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자신이 벗으라고 한 거였으니까.
그러나 그 모든 걸 지켜보는 류신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제 시작하네요······.”
한세화는 침을 꿀떡 삼킨 뒤 TV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LM 의류의 어마어마한 광고가 쏟아지며 네티즌의 관심은 순식간에 <신의 이름으로>에 쏠려버렸다.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더니 LM 의류의 문영미 대표는 ‘파트너’에 대한 예우로 엄청난 지원 사격을 해줬다.
덕분에 한세화 대표의 기사들이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장난 아닌데요 LM 의류?”
“그러게. 진짜 화끈하게 밀어주네.”
<신의 이름으로> 3화 모니터를 위해 모인 직원들이 감탄사를 터트린다.
“매출만 수천억인 기업이잖아. 말이 중견이지 한세화 대표가 비빌 수준이 아니야. 자자. 이제 걱정은 놓고 드라마부터 보자.”
LM 의류 덕에 홍보전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으니 이젠 드라마 내용으로 이길 차례다.
더군다나 오늘 방영될 <신의 이름으로>의 3화에선 극 중 최고의 악당 역할인 대기업 2세 유한명이 나온다.
귀신 들린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유한명 역할로 TK 엔터의 이병준이 출연했고 아들을 비호하는 재벌가 사모님 역할은 김수희 선생님이 할 예정이고.
강렬한 적의 등장과 스릴러적인 요소가 가득하기에 외부의 문제가 아니면 시청률은 자신이 있었다.
“시작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3화는 범죄자를 쫓던 주인공들과 무속인 청명이 유성 그룹의 고급 주택 앞에 서는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쇄 살인 사건에 관한 단서를 찾지 못한 두 주인공은 결국 무속인 ‘청명’의 안내로 범인의 흔적을 찾는다.
하지만 그 위치는 재벌가의 사저.
간신히 단서를 찾았지만 경비원들에게 막혀 들어갈 수 없었다.
유성 그룹이라는 벽 앞에 막혀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주인공들은 경찰 상층부의 압박 속에서도 조사의 범위를 좁혀나갔지만 결국 또 하나의 희생자가 나온다.
연쇄 살인마 유한명이 공포에 떠는 희생자를 향해 다가가며 화면은 검게 페이드 아웃.
그리고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3화가 끝났다.
손에 땀을 쥐고 3화를 시청한 직원들도 감탄사를 터트렸다.
“와 오늘도 쩌는데요?”
“그러게. 눈을 못 떼겠네. 역시 이병준 씨가 악역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네. 저러니까 악역만 하지.”
홍보 담당 김미혜 대리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유진이가 L.M.L이 제공한 의상을 입고 재촬영을 한 씬이 나올 때면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번 화에서는 유진 씨 의상 예쁘지 않았어요?”
“예. 이대로 패션쇼를 해도 되겠던데요?”
연신 좋은 기분으로 대화를 나누던 도중 또다시 김성운 PD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정 팀장님!
“예. PD님. 얼맙니까?”
-3화는 15.5%입니다!
2화의 15.2%보다는 약간 오른 수치.
혹시나 떨어지면 어쩔까 걱정했지만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그보다는 상대편의 시청률이 더 중요했다.
“돈의 축제는요?”
잠깐 뜸을 들이던 김성운 PD가 신이 나 외쳤다.
-15.4%입니다!
고작 0.1% 차이.
소이영의 노출이 큰 화제를 불러모아 엄청난 접전을 치렀다.
LM 의류의 전폭적인 광고가 없었더라면 질 수도 있었던 상황.
그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출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진짜 오늘은 정 팀장님 덕분에 이긴 것 같네요.
“아닙니다. 오늘도 김 PD님이 편집을 잘하셔서 이긴 겁니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팀원들이 모니터링을 하는 것도 잊고 열혈 시청자가 되어버리더라고요.”
-하하하. 이거 참······ 아 그리고 아무래도 최 본부장님에게는 꽤 큰 징계가 떨어질 것 같더라고요. 그냥 알고만 계세요.
이지연 작가를 찾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며 최상병 대표가 직접 징계 절차를 진행 중이란다.
아마도 이지연 작가가 소송할 걸 대비해 미리 손을 쓰는 것 같다면서.
그런데 기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었다.
-아 그리고 저희 대표님이 유진 씨 잘 챙기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습니다. LM 의류 대표님이 광고를 하도 빵빵하게 밀어주셔서······ 하하하.
아무래도 문영미 대표에게 따로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전 또 추가 편집을 하러 가야 해서······.
“예. 들어가십시오.”
난 전화를 끊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우리는 15.5% 상대는 15.4%입니다!”
팀원들이 다들 얼싸안고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배우 2실의 오덕구 팀장과 주영훈 팀장이 회의실로 들어온다.
“뭐야? 어떻게 됐어? SNS 반응 보니까 막상막하던데?”
“빨리 좀 말해 봐!”
“0.1% 차이로 이겼습니다.”
“뭐? 진짜야?”
“시청률은 얼만데?”
“15.5%요.”
“이야. 3화에 15%? 대박의 기운이 물씬 풍겨오는구나.”
회의실이 떠들썩해지자 너나 할 것 없이 회의실로 들어와 시청률을 물어본다.
똑같은 말로 대답했지만 몇 번을 말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다음 날.
베테랑 김수희 선생님이 맡은 이명아와 유진이가 특수 분장으로 완성해낸 ‘만신 월아’가 대적하는 장면이 나왔다.
시청자들은 노익장(?)들의 깊은 연기에 다시 한번 환호를 보냈고 3화보다 훨씬 화려해진 L.M.L의 의상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덕인지 4화의 <신의 이름으로>의 시청률은 16.1%가 나왔다.
반대로 <돈의 축제>의 시청률은 14.3%로 꺾여 들어 버렸다.
그리고 4화가 끝나갈 무렵 본격적으로 광고 문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몰려드는 광고 문의를 처리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그때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화연 미디어 그룹 비서실장 류신이라고 합니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