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화
25. 겨울에도 꽃은 핀다 2
쁘띠모와의 화려한 합동 무대에서 춤추는 체리블라썸은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최은혁 PD에게 체리블라썸의 프로필을 추려 보낸 덕에 캐릭터에 맞게 핀 조명 색깔부터 달리해서 쏘아줬다.
우연희에겐 짙은 비건디색 조명으로 고급스러운 섹시한 분위기를 뽐낼 수 있게.
양은비에겐 노란색 조명으로 베이글의 몸매가 두드러질 수 있게.
유은아에겐 새하얀 조명으로 청초한 여신미가 돋보이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세리에겐 파란색 핀 조명으로 발랄한 느낌이 살 수 있게 말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백스테이지 무대를 비추는 3번 4번 카메라와 지미집 카메라는 편파적이라 할 정도로 체리블라썸을 잡아주고 있었다.
최은혁 PD가 체리블라썸을 밀어준다고 하는 말이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물론 체리블라썸은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북한 인민군 수준의 칼군무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블링~블링~.”
비록 자신들의 곡은 아니었지만 KBC 연말 스테이지에 오른 탓에 체리블라썸의 눈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그나저나 가수 2실로 소속을 옮기라는 이동민 실장의 제안이 신경이 쓰였다.
내 경력은 가수보다는 배우들의 필모 관리에 맞춰져 있지만 향후 10년간 뜰 곡과 춤은 훤히 꿰뚫고 있다.
좋은 곡을 고르고 좋은 안무를 붙여주면 체리블라썸은 빠르게 최고의 걸그룹이 될 수도 있고.
하지만 결국엔 가수 팀으로 옮기는 것은 안 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정해졌다.
유진이와 정실모들을 모두 최고로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스케줄이 자주 비는 배우 전담과는 달리 가수를 전담하게 되면 24시간 묶이게 된다.
지방 축제에 대학 행사에 콘서트에 방송에.
심지어 팬 관리와 사인회까지.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아득해질 정도다.
“죄송합니다.”
쁘띠모와의 합동 무대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짓던 이동민 실장은 내 대답을 듣고는 이내 섭섭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생각 충분히 한 거 맞지?”
“예. 대신 스케줄이 비는 날엔 최대한 와서 돕겠습니다.”
그제야 이동민 실장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두말하기 없기다?”
“우리 실장님께는 잘 좀 이야기해 주십시오. 우리 2실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다른 2실을 돕는다고 밉게 보실까 걱정이거든요.”
“하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라. 구성철 그 인간한테는 내가 자~알 이야기할 테니까.”
이동민 실장과 구성철 실장은 나이가 같아 친구처럼 지낸다고 들었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한명호 팀장이 씨익 웃고는 흥얼대며 내 어깨를 둘렀다.
“블링~블링~.”
체리블라썸의 곡도 아닌 곡을 이렇게 즐겁게 부르다니.
“뭐 하십니까?”
“좋아서 애정 표현하는 거다. 짜샤.”
두툼한 한명호 팀장의 팔에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곡이 끝나가는 동안 주변에 있는 매니저들의 질시 어린 눈빛을 받았다.
강희동 팀장은 우리 쪽을 반으로 찢어 먹으려 하고 있었고 마동팔 본부장은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백번도 죽였겠다.
메인 스테이지도 아닌 백스테이지에 불과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흥. 쳐다보면 지들이 어쩔 거야? 윤호야. 웃자. 웃어. 오늘은 우리가 이긴 날이니까.”
“예. 팀장님.”
한명호 팀장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밤 10시가 되자 생방송으로 진행된 아이돌 대전의 모든 무대가 끝났다.
끼이익.
시계를 보니 밤 10시 45분.
이기철 이사의 호출에 회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옷을 단정히 하고 7층의 이사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오늘 진땀을 흘려가며 발버둥 친 보람이 있었는지 체리블라썸의 이름은 각 포탈의 실검 순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네이브 실검 순위]
1위 쁘띠모
2위 블링블링
······
9위 체리블라썸
10위 체리블라썸 헤어스타일
어제까지만 해도 싼값의 지방 행사를 전전하던 체리블라썸의 인지도는 단번에 치솟고 있었다.
실검 10위 안에 무려 2개나 이름을 올리면서.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체리 블라썸의 3집 제작비가 삭감되는 일정에는 변화가 없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11:00 체리블라썸 3집 앨범 제작비 삭감 통보
“그럼 올라가 볼까?”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한명호 팀장과 나 그리고 체리블라썸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기철 이사는 좋은 일로는 절대 부르지 않는 인간이란 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
띠링.
7층에 도착하자 천천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눈앞에는 김동수가 있었다.
“여어. 연말에 고생이 많네. 아이돌 대전은 잘 끝났고?”
한명호 팀장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별문제 없이 끝났습니다. 아니 실검에도 나오고 엄청 잘 되고······”
한명호 팀장이 실검에도 나왔다며 어필하자 김동수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뜨는 게 어디 그리 쉽나? 실검에 나왔다고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 하여간 고생했다.”
그런데 김동수가 웃는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이사들만 있는 이 층엔 왜 온 거지?
“1년 차. 넌 왜 여기 있어? 오늘 차출이냐? ”
“예. 실장님.”
“그래? 그럼 수고해라.”
김동수는 날 힐끗 쳐다보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김동수의 묘한 웃음이 언뜻 보였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
김동수가 사라지자 한명호 팀장은 떨고 있는 아이들을 달랬다.
“자자. 얘들아. 이사님 앞에선 실수하지 말고. 내가 잘 말할 테니까.”
하지만 체리블라썸 멤버들의 불안은 여전했다.
“팀장님. 우리 해산하는 건가요?”
우연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세리가 놀란 눈을 뜬다.
“어? 진짜야? 언니? 안 돼! 나 가수 안 하면 엄마한테 잡혀가서 사과 농사지어야 해!”
세리는 과수원을 하는 부모님의 말씀을 떠올리곤 진저리를 친다.
일은 싫지 않지만 벌레가 싫다고.
“난 공무원 시험 준비해야 해.”
부모님이 모두 계약직 공무원인 은비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가장 떨고 있는 건 은아다.
“싫어······ 나······ 난 선······ 봐야 해.”
은아의 아버지는 꽤 큰 병원의 병원장인데 활동을 그만두고 시집이나 가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가 온다고 했었다.
아이들이 덜덜 떨고 있었다.
기껏 공을 들여 인지도도 올리고 사기도 올려놨는데 회사에서 도움은커녕 이렇게 초를 치다니.
아직 11시가 되려면 몇 분 남았기에 난 한명호 팀장에게 말했다.
“팀장님. 이럴 게 아니라 숨 좀 돌리고 들어가시죠. 좀 늦는다고 죽이기야 하시겠습니까?”
이동민 실장이 애를 쓴다 했으니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난 이동민 실장이 올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고 기다려 보자며 한명호 팀장을 붙잡았다.
“그 그럴까?”
한명호 팀장도 기다렸다는 듯 반색했다.
현재 시각 10시 55분.
재깍재깍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였다.
드르르르.
갑작스레 한명호 팀장의 폰이 진동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이기철 이사의 전화인가 싶어 모두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스레 이동민 실장의 전화다.
한명호 팀장이 급히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예. 실장님. 예. 예. 예?”
무슨 통화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명호 팀장의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화를 끊은 한명호 팀장이 우리에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겠다. 이동민 실장님이······”
한명호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 뒤편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내 뒤에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일정이 삭제되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11: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체리블라썸 3집 앨범 제작비 삭감 통보)
‘뭐지?’
하지만 고개를 돌려 보니 일정이 사라진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다들 여기 옹기종기 앉아서 뭐 하나? 혹시 나 기다리고 있었나?”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사람이 온 이상 운영 이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강감찬 대표.
그가 나타났다.
“예! 대표님! 이동민 실장에게 미리 연락받았습니다.”
“그래?”
한명호 팀장이 반색하자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윤호 아니지. 정 스타. 너 요즘 잘 나간다면서? 으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린 강감찬 대표가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올해 나이가 60인데 여전히 40대로 보일 정도로 건장하다.
키도 180cm를 넘어가는 장신에 철인 3종 경기로 단련된 근육질의 사나이다.
이런 건강한 강감찬 대표가 그렇게 쉽게 갈 줄 아무도 몰랐었지.
건강한 모습의 강감찬 대표를 본 순간 뭔가 울컥하는 게 올라왔다.
내가 매니저로서 10년 동안 이루면서도 딱 하나 그를 넘지 못했던 게 이 인품이다.
호인.
그로 인해 손해를 본 적도 많은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업계에서 강감찬 대표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말단 사원인 내 이름도 다 기억해 줬을 정도니까.
나 역시 미소의 사건만 아니었으면 결코 이 회사를 떠나지 않았을 정도로 그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런 강골이 그렇게 갑작스레 쓰러져 버릴 줄은 몰랐다.
조만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건강검진을 받게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
일단은 강감찬 대표가 온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거 같다.
일정이 지워진 이유를 알게 된 난 강감찬 대표의 칭찬에 고개를 숙였다.
“중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이 실장에게 연락이 왔더라고. 회사로 빨리 가 보라고 하도 징징대길래 뭔 일이 터졌나 했더니······”
강감찬 대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쭈뼛대던 체리블라썸이 강감찬의 웃음에 안도하며 인사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아이고. 우리 체리블라썸~. 오늘 무대 좋더라? 블링블링~?”
얼마 후면 환갑잔치를 할 사람이 엉덩이를 씰룩대며 춤을 추자 체리블라썸의 얼어붙은 표정이 대번에 풀렸다.
“풋.”
“대표님 짱!”
“대표님 잘 추세요.”
강감찬 대표는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아 참 우리 체리블라썸 애기들은 3층 휴게실에 가서 커피 한 잔씩들 하고 기다릴래? 다 늙은 아저씨들 이야기 들어봤자 지루하기만 해요.”
우연희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한명호 팀장을 돌아봤다.
“운영 이사님이 부르셨는데 안 가도 돼요?”
물어 뭐 해 당연히 안 가도 되지.
대표 이사가 가서 쉬라는데 그까짓 운영 이사가 뭐라고.
“그 그래. 어서 가서 쉬어. 내가 이따가 운영 이사님과 이야기 잘 끝내고 숙소로 데려다 줄 테니까.”
“네. 팀장님.”
“자자. 우리 미래의 탑 걸그룹님은 살펴 내려가십시오~.”
강감찬 대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직접 잡아주자 체리블라썸은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맸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에이. 감사는 무슨. 감사를 해도 내가 해야지. 우리 체리블라썸이 이렇게 고생해 주는데 말이야. 그리고 오늘 방송 완전 대박이던데? 수고하고 나중에 또 보자.”
“네! 대표님!”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강감찬 대표는 손을 흔들어 줬다.
세리는 양손을 흔들어대며 그 인사에 화답했고.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업계 경력 30년의 노장 강감찬 대표의 또 다른 모습이 나왔다.
몸을 돌린 강감찬 대표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엔 카리스마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한 팀장.”
강감찬 대표가 낮은 목소리로 한명호 팀장을 불렀다.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예 예. 대표님.”
“제작비를 삭감하겠다고 통보하는 자리에 쟤들은 왜 데리고 왔나? 저 어린것들이 뭘 안다고?”
“죄송합니다. 대표님. 운영 이사님이 당사자들이라며 꼭 데리고 오라고 거듭 당부하셔서.”
“그럴 때 몸빵을 하란 말이야. 그러라고 있는 게 매니저잖냐. 팀장 짬밥이면 그 정돈 알아서 해야 할 거 아냐!”
강감찬 대표의 호통에 한명호 팀장이 고개를 굽신거렸다.
역시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다.
이번엔 내 쪽으로 몸을 돌린 강감찬 대표가 지긋이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날 향한 눈빛은 봄날 햇빛처럼 따사로웠다.
“윤호야.”
“예. 대표님.”
“오늘 정말로 고생했다. 이동민 실장이 칭찬 많이 하더구나.”
어깨 위로 툭 하니 얹어지는 강감찬 대표의 두툼한 손에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회귀 전 눈빛 하나 쓸 만하다며 경력도 없던 날 뽑아 준 사람이 강감찬 대표였었다.
그런데 유진이를 볼 면목이 없어 회귀 전에는 대표님도 멀리했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속으로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더니 강감찬 대표는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곤 한명호 팀장을 보며 말했다.
굳은 표정이 풀리곤 평소의 강감찬 대표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로.
“우리 한 팀장 고생하는 거 내가 알아. 내가 바빠서 모든 면을 돌아보지 못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신경 쓰자.”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래. 다음부터 잘하면 되니 기죽지 말고. 자 그러면 가 볼까?”
“예! 대표님.”
강감찬 대표가 성큼대는 걸음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넓은 등을 가진 그를 따라 한명호 팀장과 함께 뒤를 따랐다.
김동수 실장과 함께 손을 잡고 굴렁쇠 엔터테인먼트를 산산조각냈던 운영 이사 이기철.
그를 만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