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9화
249. 드라마 전쟁 4
유진이가 양손에 주술 문자가 새겨진 너클을 끼고 ‘귀신들린 배우’를 때려잡기 시작했다.
빡!
주먹을 내뻗는 자세는 권투 자세였고 발차기는 무에타이와 태권도가 각각 뻗어 나왔다.
제대로 틀에 잡힌 움직임을 보이자 오덕구 팀장과 주영훈 팀장이 몸을 부르르 떤다.
“으으······ 아프겠다. 액션 배우한테 돈 더 줘야겠는데?”
“유진이 손 맵던데······.”
그 순간 유진이의 몸놀림을 보던 박인기 팀장이 묻는다.
“정 팀장. 유진이의 액션이 제법인데? 어디서 배웠어?”
“그냥 이번 드라마 하기 전에 연습 조금 했습니다.”
“연습?”
“예. 주먹 쓰는 법은 제가 알려줬고 발차기는 상봉이가 가르쳤고요.”
복싱 국대 예비군인 나 그리고 올림픽 메달리스트 상봉이가 가르쳤다.
“어쩐지. 전문적으로 운동한 사람들에게 배워서 그런지 액션이 엄청 깔끔하네.”
유진이는 스펀지처럼 나와 정상봉의 교육을 빨아드렸고 힘은 없어도 완벽한 자세의 발차기를 해내고 있었다.
특히 너클을 끼고 휘두르는 주먹은 마치 날 그대로 따라 한 것처럼 깔끔했다.
“이 정도면 본격적인 액션 연기를 해도 되겠는데?”
“드레스를 입고 주먹질을 하는 여배우라······ 눈에는 확 띄긴 하는데 저래도 되나?”
“뭐 어때요? 멋지면 그만이지.”
“하긴. 저 정도로 잘하면 이야기가 다르긴 하겠다.”
눈을 뗄 수 없는 유진이의 깔끔한 액션 연기에 다들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었다.
* * *
50분이 지루할 틈도 없이 지나갔다.
유진이가 맡은 ‘청명’은 결코 주인공에게 뒤지지 않는 역할을 보였고 때론 주연보다 더 눈에 띄고 있었다.
조연이라고는 하지만 귀신이 들린 범죄자를 쫓는 이야기였기에 무당인 청명을 빼면 이야기의 전개가 안 되었으니까.
드라마가 끝나고 광고가 나오자 홍보팀 김미혜 대리가 숨도 쉬지 않고 SNS의 반응을 확인했다.
“티 팀장님! 빨리 실시간 반응 좀 보세요!”
김미혜 대리의 외침에 모두가 재빨리 노트북을 열었다.
SNS의 반응은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실시간 반응)
-소오름~ 방금 540도 돌려차기 봤냐?
-정유진 이번에도 연기 변신 성공이네.
-1화에는 좀 얌전히 있다 싶었더니 눈치 보는 거였구나.
-ㅋㅋㅋ. 너클 끼고 귀신 패는 무당이라니. 깬다~
SNS의 반응을 본 배우 2실의 직원들은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반응 좋고. 악플 없고. 순탄하네.”
안도하는 구성철 실장의 말에 오덕구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주영훈 팀장도 맞장구를 쳤다.
“유진이도 이제 슬슬 주연을 노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구성철 실장이 날 쳐다본다.
“들었지?”
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작품은 무조건 주연으로 들어가야죠.”
“생각한 건 있고?”
“예. 있습니다.”
다이어리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작품들이 가득했기에 난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 순간 김성운 PD의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만요. 김 PD님 전화입니다.”
“그래. 다들 조용히 해.”
다들 입을 다물고 긴장한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예. PD님.”
전화를 받자 김성운 PD의 기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정 팀장님~~.
“예. PD님.”
-평균 15.3% 나왔습니다.
엄청난 수치였다.
고작 2화에 15.3%?
최근 시청률 하락이 가팔라지는 지상파 방송인데 고작 2화 만에 15%를 찍어 버리다니.
“그 그러면 돈의 축제는요?”
-거기는 평균 13.2%랍니다!
“정말입니까?”
-예. 그쪽도 만만치는 않지만 그래도 또 이겼습니다.
소이영의 원맨쇼가 벌어진 탓에 <돈의 축제>는 상당한 시청률 상승이 있었다.
하지만 우린 그 이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PD님.”
-축하는 제가 받을 게 아니라 정 팀장님이 받으셔야죠. 곧 광고가 쏟아질 거 같은데.
의미심장한 말에 난 웃음으로 대답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유진 씨. 상 한번 노려보시죠?
“무조건 그래야죠.”
현재 우리의 목표는 <파란 하늘> 최종화의 시청률을 넘는 것.
그 목표를 이루면 상은 저절로 따라올 게 확실했다.
-그러면 전 이사님이 불러서 가봐야겠네요 나중에 또 연락하시죠.
“예. PD님.”
전화가 끊긴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얼마래?”
“평균 15.3%이랍니다. 저쪽은 13.2%이고요.”
구성철 실장의 얼굴이 헤벌쭉해진다.
“또 이겼네! 으하하하!”
팀장들과 직원들 모두 연신 기쁜 표정으로 외친다.
“소이영을 바르다니······.”
“이 정도면 진짜 올해 상 한번 기대해도 되겠는데요?”
흥분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가득 차는 순간 김미혜 대리가 다급히 날 불렀다.
“팀장님! 실시간 검색 순위 좀 보세요.”
“왜?”
“잠시만요.”
김미혜 대리는 회의실 모니터로 자신이 검색한 결과를 보여줬다.
[실시간 검색 순위]
1위 신의 이름으로
2위 돈의 축제
3위 청명 불주먹
4위 소이영
······
7위 만신 월아 할머니.
8위 청명 원피스
9위 청명 분홍색 백
10위 주영인
실시간 검색어 10위 안에는 6개가 <신의 이름으로>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데 유진이가 연기한 ‘청명’에 관한 패션에 관한 질문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번 화에 유진이가 입고 나온 원피스가 어디 거죠 이 대리님?”
회의실에 있던 이미리 대리가 냉큼 대답한다.
“샤넬이요. 백도 샤넬이고요.”
그런데 그때였다.
갑작스레 이미리 대리의 폰이 울린다.
“아 죄송해요.”
이미리 대리가 폰을 덮으려 하기에 일단 받아보라 말했다.
그런데 전화번호를 보던 이미리 대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 이 번호는 샤넬 본사 홍보담당 전화인데요?”
“어서 받아보세요.”
이미리 대리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는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탓에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하던 일을 멈췄다.
-에밀리. 나 리사예요. 드라마 보고 전화했어요.
에밀리는 이미리의 영어 이름.
그리고 리사는 본사의 홍보 담당자의 이름이다.
뉴욕에 있을 때 이미리 대리와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이번 드라마에 유진이가 입은 의상 일체를 협찬해 준 당사자였다.
“저희 드라마를요? 자막도 없는데······.”
-우리가 직접 옷을 협찬했는데 반응을 봐야죠. 하여간 유진 씨가 의상을 너무 잘 살려줬어요. 지금 한국 포털에서 우리 의상이 화제가 되었다면서요?
“그것까지 아세요?”
리사 홍보담당은 현재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해온다.
-실은 계약 때문에 전화했어요. 우리랑 광고 계약해요. 유진을 아시아 권역 광고 모델로. 어때요?
회의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샤넬 지사도 아니라 본사에서 광고 제안이 들어오다니.
이미리 대리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 잠시만요. 저희 팀장님 계신데 함께 이야기해 보시죠.”
-그래요? 그거 잘됐네요. 미스터 정?
상대가 날 알고 있었기에 간단한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십니까? 리사. 정윤호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스피커폰입니다.”
-오~. 영어를 제법 하시는군요. 그래요 저희 제안에 관심이 있으세요? 관심이 있으시면 정식 제안서를 보낼게요.
“제의는 감사합니다만 국내 쪽 의류는 LM 의류와 계약이 맺어져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위약금을 우리가 다 부담할게요. 그리고 광고비는 아시아 권역을 대상으로 제한해서 1년에 10억. 2회까지는 추가 페이 없이 광고 찍고 다음부터는 1회당 추가로 5억씩 더 드릴게요. 어떻게 생각해요?
샤넬의 아시아 광고 모델.
광고비만으로도 엄청난 금액이지만 그것 말고도 샤넬의 모델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지도 상승이 일어난다.
당연히 배우의 급수는 올라가고 온갖 파티와 패션쇼에 초청을 받으며 배우 자체의 격이 올라간다.
상대도 그걸 알고 자신 있게 제안하는 거고.
회의실에 있는 구성철 실장과 팀장들 역시 날 보며 입을 벙긋거린다.
‘받아! 무조건 받아!’
‘뭘 고민해! 당장 승낙하라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이지 않냐며 다들 간절한 표정이다.
나 역시 이 기회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안다.
아직 드라마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제의를 한다는 건 이번 드라마 남은 회차 동안 샤넬 모델로 독점하고 싶다는 소리였다.
만약 성사된다면 유진이는 아시아에서 엄청난 인지도를 가진 배우로 성장할 수도 있다.
모든 광고 매체에서 유진이의 이름을 다룰 거고 방송사에서는 유진이를 인터뷰하기 위해 난리를 피울 거다.
샤넬의 이름값은 그 정도의 가치를 충분히 하고도 남을 정도니까.
하지만 난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회귀 전이라면 당장이라도 계약을 깨고 샤넬의 광고 모델이 되겠다고 답했겠지만 HK 의류의 홍성범으로부터 막아준 LM 의류의 은혜를 배신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돈에 눈이 멀어 신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배우는 오래 버틸 수가 없다.
구성철 실장과 다른 팀장들 또한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너무나 큰 제안에 잠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난 덤덤히 리사 홍보 담당의 전화를 받았다.
“당장에 결정할 사안은 아니군요. 배우와 상의해 보고 연락 드리죠.”
-그래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최대한 빨리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으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내가 거절할 것이라는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달칵.
전화를 끊는 순간 회의실에는 열기가 다시금 차올랐다.
“윤호야. 이런 기회 쉽지 않다.”
“그래. 정 팀장. LM 의류한테 미안하긴 해도 이번 건 생각 잘 해야 할 거 같다.”
“일단 유진이랑 통화부터 하겠습니다.”
전화를 걸자 유진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빠. 봤어요?
“그래. 잘 나왔더라.”
-김 PD님이 엄~청 편집을 잘 해주셨던데요?
‘만신 월아’에 이어 ‘청명’까지.
유진이는 두 캐릭터 모두 캐릭터가 분명하게 나온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오늘 시청률은 15.3%! 돈의 축제는 13.2%이고.”
순간 기다렸다는 듯 환호와 비명이 섞여 나온다.
-대박!
-꺄아아악!
유진이뿐만 아니라 체리블라썸도 집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나 보다.
덕분에 한동안 요란 법석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유진이가 정신을 차리고 내게 묻는다.
-오빠. 오늘 떡볶이 파티할까요? 오늘은 집에 들어오시죠?
“이 틈을 타서 먹을 생각하지 마! 그보다 할 말이 있는데.”
-쳇. 뭔데요?
“샤넬에서 광고 들어왔어.”
-네~?
난 샤넬 본사에서 직접 계약을 하자고 제의했다는 걸 알렸다.
그리고 LM 의류와 광고 계약을 해지한 뒤 국내 광고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도.
거기다 엄청난 광고비와 함께 그 제안을 받았을 때 얼마나 유명해질지도 설명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유진이가 되물었다.
-오빠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오빠 생각부터 듣고 싶어요.
어떻게 대답할까에 따라 유진이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옳은 길’을 가기로 선택했다.
“난 안 했으면 해.”
순간 회의실에 있는 직원들이 경악한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반응이었지만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화기에선 1초도 고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너무도 빠른 대답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재차 물어봤지만 이어진 유진이의 대답은 너무도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저 LM 의류의 두 대표님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이미 충분히 벌고 있잖아요.
샤넬 광고를 하게 되면 돈은 더 벌겠지만 약속을 어기며 벌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그 순간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오케이. 대신 내가 책임지고 약속할게. 샤넬 권역 광고를 거절한 대신 다음에 반드시 샤넬 글로벌 광고 따 올게.”
-대신에 떡볶이는 먹어도 되죠?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노라 말했다.
“그래. 기분이다. 시청률 1위도 했는데. 1인분만 먹어.”
-어 여 엽때여? 엽때요? 아 안 들려요. 옵빠~? 어 튀김도 먹어도 된다고요? 엽떼요~? 야채 튀김 튀김 만두 김말이 오징어 튀김까지는 먹어도 된다고요? 엽때여?
딸깍.
유진이가 이상한 목소리를 내다 급기야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유진!”
뒤늦게 큰소리를 쳤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져 버렸다.
난 다급히 튀김만은 안 된다고 까톡을 보낸 뒤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처럼 ‘선심’을 베풀어주는 식으로 샤넬과 광고 계약을 맺는 게 아니라 ‘샤넬’이 부탁할 정도로 유진이를 키우겠다고 말이다.
구성철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쩝. 당사자와 담당자가 이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네. 알았다. 본부장님한테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
난 아쉬워하는 구성철 실장을 달래며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이틀간 야근을 한 터라 온몸이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순간 갑자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010-99XX-2020]
끝자리 2020.
전화번호를 바꿔도 늘 끝자리만큼은 지키던 소이영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