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246. 드라마 전쟁 1
한세화 프로덕션.
예정에 없던 전화 한 통을 받은 한세화 대표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안 좋은 소식인가 보군요.”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한 이는 화연 미디어의 류신 실장이다.
장웨이 회장의 비서실장인 류신은 서울 토박이로 보일 만큼 한국어에 능통했다.
장웨이 회장의 비서실장인 류신이 왔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온 소이영도 궁금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뭐야? 누구 전환데 그래요?”
잠시 망설이던 한세화 대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먼즈 장 대표.”
“장 대표? 그 여자가 왜요? 혹시 내일 인터뷰에 문제라도 생겼대요?”
한세화는 소이영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류신 실장에게 말했다.
“류 실장님. 방금 장 대표가 우먼즈 편집장을 쳐냈답니다.”
뜻밖의 불편한 소식에도 류신 실장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로비를 받은 걸 불쾌하게 여겼나 보군요.”
“네. 앞으로는 저나 블랑과는 두 번 다시 일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고요.”
“흠······.”
팔짱을 낀 류신이 생각에 잠긴다.
태연한 류신의 모습과는 달리 소이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세화를 쏘아붙였다.
“한 대표님! 그러면 이번 8월호에 내 기사는요? 내 기사 분량 늘려준다는 건 다 날아간 거예요?”
한세화가 마른침을 삼킨다.
“잠깐만 기다려 봐. 확인 좀 해 보고.”
한세화는 최영은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전화를 걸자 이번엔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란 안내 문구가 나왔다.
최영은 편집장이 전화를 받는 걸 거부하고 있었다.
“나쁜 X! 남의 돈은 받아 처먹고 왜 전화를 안 받아?”
한세화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오자 류신이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쳤다.
“진정하십시오. 약속한 지원을 취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세화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웨이 회장이 돈을 대줬지만 상황을 설계하고 로비까지 진행한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다.
실패에 엄한 질책이 떨어질 줄 알았건만 별일 아니라는 듯 용서해 준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짐작이 가는 곳은 없습니까?”
“글쎄요. 장 대표는 현업에서 손을 떼고 한동안 골프에 빠져 살았는데 왜 갑자기 회사로 돌아왔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굴렁쇠에서 알아차리고 손을 쓴 게 아니겠습니까?”
“굴렁쇠요?”
류신 실장이 설명을 추가했다.
“굴렁쇠에 정윤호라는 친구가 상당히 수완이 좋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순간 한세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윤호의 이름은 자기도 안다.
하지만 업계의 거물들이 어울리는데 한낱 팀장의 이름을 거론하니 황당했다.
한세화가 조금은 불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 팀장이 유능하다는 소문은 저도 들었지만 장 대표를 움직일 정도는······.”
순간 류신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 남자는 장 회장님이 눈여겨보는 인재입니다.”
순간 한세화가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닫았다.
장웨이 회장이 관심을 가진다고?
고작 2년 차 팀장한테?
순간 한세화는 2년 차 뒤에 ‘팀장’이 붙어 있다는 의미를 알아차렸다.
굴렁쇠는 업계 수위권에 드는 대형 매니지먼트 회사.
아직 서른도 되지 못한 젊은이가 팀장을 달았다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류신 비서실장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면 판단을 다시 해야 했다.
“제가 경솔했어요. 곧바로 정윤호 팀장을 중심으로 일의 전후를 확인해 보죠.”
류신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회장님은 지는 걸 싫어하십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시청률만 이기세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순간 한세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원을 취소하는 일이 없다는 말은 용서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처분을 잠시 보류한다는 뜻일 뿐이라는 걸 알아차린 까닭이다.
한세화는 잔뜩 긴장해 대답했다.
“예! 류 실장님.”
만족한 류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소이영도 일어나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
“살펴 가세요~ 류 실장님.”
가슴께를 훤히 드러낸 원피스를 입고 있는 소이영은 손으로 앞을 가리지도 않고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류신은 마치 돌덩이를 보는 듯 무뚝뚝하게 고개를 까닥인 뒤 그대로 대표실을 나가버렸다.
쿠웅.
대표실의 문이 닫히자 소이영이 짜증을 부렸다.
“아 짱나~. 저 인간 뭐예요? 고X야? 왜 아무 반응이 없어?”
소이영은 류신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괜히 자존심이 상해 툴툴거렸다.
한세화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영 씨. 장 회장님과 만나는 여자한테 비서실장이 눈을 왜 돌려? 목 날아갈 일 있어?”
“아무리 그래도요! 아 재수 없어.”
자리에 앉은 한세화가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진짜 정 팀장을 파 보면 뭔가 나오긴 나오려나?”
소이영이 한세화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한번 만나볼까요?”
“뭐?”
“요즘 정 팀장이 핫하다고 여배우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던데······.”
“이영 씨 미쳤어?”
한세화는 경악했다.
장웨이 회장에게 줄을 선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른 남자 타령이란 말인가.
“왜? 여잔 여러 남자 만나면 안 되나 뭐?”
정윤호를 만나 즐겨 보겠다는 소리다.
“그러다 훅 가는 거 몰라? 특히 장 회장 같은 거물들일수록 질투가 얼마나 심한데.”
“그래서 더 스릴 있고 좋잖아요. 또 들키면 어때요? 나이 든 남자에게 작업할 땐 질투가 생기도록 자극을 해줘야 해요. 몰라요?”
“기가 막혀. 미친 건지 배짱이 좋은 건지.”
대번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라고 하려 했지만 한세화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소이영이라면 해낼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입으로 허락할 순 없었다.
나중에라도 덤터기를 쓰면 곤란해지니까.
한세화는 슬그머니 발뺌하며 이 상황을 묵인해 버렸다.
“아 난 몰라. 그건 이영 씨가 알아서 해. 이 일은 나와는 상관없는 거야.”
한세화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은 순간 소이영의 입에서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우먼즈에서 약속했던 유진이의 인터뷰는 편집장을 겸하게 된 장지혜 대표가 직접 진행했다.
배우 정유진에 관한 질문 말고도 인간 정유진에 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장지혜 대표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끌어나갔고 덕분에 유진이는 ‘휴먼 스토리’에서도 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술술 털어놓았다.
인터뷰 내용에 만족한 장지혜 대표는 단독 사진을 포함한 총 9페이지가량의 페이지 분량을 약속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치고 나올 때 장지혜 대표에게 골프클럽까지 선물 받았다.
중고 제품일 줄 알았는데 막상 받고 보니 비닐 포장도 벗기지 않은 혼마 4스타 제품.
이런 건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남편이 운영하는 유성 건설에서 광고 모델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에 더는 거부할 수 없었다.
유성 건설은 ‘스타파크’란 아파트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데 그 광고 모델로 이태풍을 추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터뷰가 순조롭게 끝나고 며칠 뒤.
드디어 <신의 이름으로>가 방송되는 날이 밝았다.
7월 29일 아침 9시.
그런데 포털 연예 기사면은 온통 <돈의 축제>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돈의 축제>. 화려한 출연진들의 포진!]
[<돈의 축제>. 예고편 오늘 (7월 25일) 방송!]
[<돈의 축제>. 역대급 캐스팅!]
······
우먼즈에게 손을 쓰다 실패한 손실을 메꾸려는지 한세화 대표가 미친 듯 돈을 뿌린 티가 난다.
구성철 실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오늘 괜찮겠냐? 한 대표가 투자를 크게 받았다더니 우호 기사 분량이 장난 아닌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전 중에 우먼즈 이번 달 호가 서점에 깔리면 저희 측 반응도 올라갈 겁니다.”
오덕구 팀장과 주영훈 팀장이 장난스레 웃음을 지었다.
“우리 정 팀장도 이제 관록이 좀 있어 보이네요. 떨지를 않아?”
구성철 실장이 피식 웃는다.
“이것들아. 니들도 윤호 반만큼만 좀 해봐라! 엉?”
주영훈 팀장이 웃으며 대꾸했다.
“저희보다는 실장님 실적을 걱정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뭐~?”
구성철 실장이 주먹을 치켜들자 시시덕거리던 두 사람이 죽는시늉을 하며 달아났다.
“하여튼 저것들은 꼭 매를 벌어요.”
그때였다.
회의실의 문이 발칵 열리더니 김미혜 대리가 뛰어 들어왔다.
“팀장님! 터졌어요!”
“뭐가요?”
“우먼즈요!”
김미혜 대리가 실시간 검색 순위를 보라며 소란을 떤다.
그런데 우먼즈 이번 호의 여파는 내 생각보다 훨씬 격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실시간 검색 순위]
1위 우먼즈
2위 우먼즈 서버 다운
3위 우먼즈 재고
4위 예뜨랑 미소
5위 정유진 미소
······
구성철 실장이 넋이 나가 버렸다.
“이 이게 뭐야?”
김미혜 대리가 상기된 표정으로 대꾸한다.
“이번 달 우먼즈 부록으로 나온 예뜨랑 샘플 때문에 지금 난리예요. 온라인 판매분은 이미 다 동났고요 서울 서점에 깔린 재고 찾느라 난리예요.”
우먼즈가 잡지 가격을 훌쩍 넘는 샘플을 제공해 품절 대란이 일어난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본사의 홈페이지까지 다운될 정도의 사태는 처음이라고 한다.
구성철 실장이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갸웃한다.
“아니 아직 광고도 제대로 안 된 화장품 샘플이 뭐라고 그래? 광고는 오늘 밤 9시 50분에 첫 광고가 나간다고 했잖아.”
예뜨랑의 신상 화장품 TV 광고는 <신의 이름으로>의 방송 직전으로 잡혀 있다.
김미혜 대리가 고개를 젓는다.
“TV 광고는 그렇죠. 대신 하나 씨와 유진 씨 그리고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스타그램을 통해 샘플 사용기를 올려서 그래요.”
김미혜 대리가 곧바로 회의실에 달린 대형 LCD를 켜고 관련 댓글을 띄웠다.
돈을 써서 만든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뜨거운 반응에 구성철 실장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윤호야. 너 설마 여기까지 생각했던 거냐?”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어느 정도는요.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유진이 스타그램 팔로워가 40만에 하나 구독자 17만 명 그리고 체리블라썸 스타그램 팔로워가 50만이다.
정 팀의 연예인들 하나하나가 인플루언서 급의 팔로워를 가지고 있었기에 기자들을 동원한 것 이상의 파급력이 나타났다.
구성철 실장이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두툼한 두 팔로 날 와락 껴안았다.
“으이구~. 이뻐 죽겠네!”
구성철 실장의 턱밑에 가득한 수염이 내 볼에 비벼진다.
내 나이 올해 27살.
회귀까지 포함하면 37살이지만 이 나이에 부비부비를 당할 줄은 몰랐다.
“으으으. 시 실장님! 실장님 수염! 수염이요!”
고통의 비명을 질렀지만 다른 팀장들이 날 구해줄 생각도 하지 않고 웃음만 터트린다.
그때 다행히 전화 한 통이 나를 살렸다.
“실장님. 우리 팀장님 찾는 전화요! 급하대요!”
“누군데?”
“우먼즈 장 대표님요!”
구성철 실장이 마지못해 날 놓아준다.
“예. 정윤홉니다.”
-정 팀장! 지금 상황 들었어요?
“예. 반응 엄청 좋다고······.”
-좋은 정도가 아니에요. 지금 서울에는 물량이 전량 동났고 지방도 소진 직전이라서 우리 바로 인쇄기 돌리고 있어요.
종이 잡지 시장이 많이 죽은 터라 우먼즈는 현재 평균 잡지 판매량 4만 부를 달성 중이다.
여성 잡지 업계 1위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이번엔 기대하고 5만 부를 찍었는데 그게 모두 동이 날 지경이란다.
-5만 부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럴 줄은······.
그 순간 장지혜 대표가 전화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혹시 샘플 때문에 그러십니까?”
-역시 정 팀장한테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박수무당 정 스타인 건가?
장지혜 대표가 날 띄워주면서 좋게 말한다.
하지만 날 통해 은근슬쩍 샘플을 추가로 얻으려는 장지혜 대표의 의도에 말려들 순 없었다.
예뜨랑의 제품이 이미 알려진 이상 판촉을 위해 무료 샘플을 보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아쉬운 건 우먼즈.
잡지 판매 부수가 늘어난 것만으로도 잡지에 광고를 실은 광고주들에게 상당한 부가 이득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난 앓는 소리를 하며 장지혜 대표의 부탁이 쉽지 않을 거라 말했다.
“장 대표님.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예뜨랑이 지금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추가로 샘플을 넘기는 건 쉽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난 내친김에 예뜨랑에는 보유 현금이 없어서 공장 직원들의 월급도 못 줄 지경이라고 뻥을 섞어 말했다.
-끄응. 그 정도였어요?
“예. 최근에 생산 라인을 증설한 일 때문에 빚을 냈거든요. 그러니까 추가 물량은 대표님이 비용을 약간이라도 부담을 해주시면 제가 이야기하기 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판촉물인데 돈을 주고 사기는······.
잠깐 고민하던 장지혜 대표가 한숨을 내쉰다.
-알겠어요. 수량은 3만 개. 원가에서 마진 3%까지는 더 보태줄 수 있으니까 나 대신 이야기 좀 잘해 봐줘요.
“예. 대표님.”
전화를 끊는 순간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무료 판촉물을 원가에 마진까지 붙여서 넘길 수 있을 줄이야.
예뜨랑이 미리 만들어 놓은 홍보용 샘플은 총 10만 개.
그중 5만 개는 우먼즈에 보냈고 남은 것 5만 개는 소매상에 뿌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절반 정도를 우먼즈에 넘겨 현금을 회수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설레는 심정을 억누르고 곧장 예뜨랑의 안석훈 대표에게 전화를 돌렸다.
“대표님. 우먼즈 대표께서······”
사정을 들은 안석훈 대표가 당황했다.
-예? 샘플용으로 만든 걸 돈을 받고 팔자고요?
당장 현금이 없는 안석훈 대표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다.
하지만 난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가지를 더 제안했다.
“예. 그리고 대표님이 허락만 해주신다면 마진을 좀 더 올려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