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3화
243. 우먼즈 1
우먼즈의 수준이 높아서 그런지 인터뷰 사전 질문들은 꽤 만족스러웠다.
[인터뷰 사전 질문지]
(우먼즈) 이번에 맡으신 극 중 캐릭터 청명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우먼즈) 따님 미소 양과 함께 출연하게 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우먼즈)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지연 작가님께서는 본인의 페르소나로 정유진 씨를 뽑으셨는데요. 함께 일해본 이지연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지 정유진 씨의 시점에서 들어봤으면 합니다.
(우먼즈) 모든 작품에서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타 작품의 주연 이상의 인기를 누리셨는데 언제까지 조연만 하실 건가요? 이제 슬슬 도약할 시기가 된 것 같은데 주연 욕심은 없으신지?
질문지를 꼼꼼히 읽은 난 이영진과 정상봉에게도 질문지를 내밀었다.
내용을 본 이영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요?”
정상봉 역시도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여성 잡지라서 질문이 좀 더 셀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였다.
“잡지가 다 사라지는 이 시국에도 살아남은 곳이니까. 그리고 장지혜 대표가 명성그룹 셋째 딸이잖아. 웬만한 언론사보다 우먼즈 편집권이 더 독립적일걸?”
“그러면 찌라시 같은 건 안 싣겠네요?”
정상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찌라시 같은 건 쪽팔린다고 담지도 않아. 차라리 증거를 다 모아놓은 다음에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고 터트리면 몰라도.”
우먼즈의 대표는 명성그룹의 셋째 딸인 장지혜 대표였다.
그 탓에 재계 32위인 명성그룹의 막강한 재력을 업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잡지나 언론사처럼 찌라시 수준의 기사를 잡지에 담을 필요가 없었다.
더군다나 우먼즈를 설립한 장지혜 대표는 3년 전까지 직접 대표와 편집장을 겸했다.
그리고 현재는 장지혜 대표가 아끼던 후배 최영은이 편집장을 맡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우먼즈의 인터뷰와 기사 수준은 메이저 일간지를 뛰어넘는 경우도 많았다.
사전 질문지를 확인한 난 이영진에게 말했다.
“질문지에는 불만 없다고 바로 회신 보내. 미팅 시간 정해지면 나한테 바로 알리고.”
“예. 팀장님.”
“그러면 난 유진이 픽업해서 현장으로 갈 게.”
“수고하십시오 팀장님.”
회의를 마친 난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때였다.
지잉 하는 진동과 함께 에브리데이 앱 알림이 떠올랐다.
[알림 : 2020년 7월 29일. 정유진 씨의 새로운 일정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번엔 또 뭐지?’
7월 29일로 다이어리를 넘겼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정이 새롭게 생겨나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7월 29일]
-PM 10:00 [NEW. 정유진] 우먼즈 8월호 기사 대응 긴급회의. (회의 내용 : 정유진 열애설 찌라시.)
“뭐? 우먼즈가 찌라시를 쓴다고?”
조금 전까지 우먼즈를 칭찬했던 게 허무할 정도였다.
우먼즈는 찌라시를 낼 바엔 열애설 증거를 잡은 뒤 당사자들을 설득해 정식 인터뷰를 낸다.
실제로도 유명 배우들이 우먼즈를 통해 열애설을 단독 공개한 적도 몇 번 있었고.
그런데 열애설 찌라시라니.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이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최영은 편집장.
우먼즈의 모든 기사와 인터뷰는 편집장이 최종 검토를 하기에 그녀가 얽히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문뜩 인터뷰를 취소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이미 수락한 인터뷰를 취소한다면 미래가 더 나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으니까.
나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곧장 시동을 끄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오래간만에 정수혁 재무이사와 정보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 * *
우먼즈가 유진이에 관한 찌라시를 올릴 거라는 소식이 있다고 전하자 정수혁 이사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한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우선 생각나는 가능성은 타 화장품 회사에서 돈을 쓴 게 아닐까 싶네만.”
그럴듯한 의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먼즈 같은 여성 잡지는 매회 부록으로 화장품이나 백 같은 걸 사은품으로 끼워준다.
협찬사는 잡지를 통해 신규 제품을 판촉물로 제공해 알리고 잡지는 공짜 판촉물로 판매량을 늘린다.
그런데 유진이가 찌라시에 시달리게 되면 예뜨랑의 신상 라인업 홍보에 막대한 차질이 생길 수가 있다.
모든 범인은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범인은 새로운 경쟁자가 끼어들기를 원치 않는 기존 화장품 회사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렇다면 최영은 편집장이 엄청난 돈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우먼즈는 찌라시를 쓰지 않기로 유명한데 그런 관례를 깨고 움직일 정도니까요.”
정수혁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 5억에서 많게는 10억 정도는 받았다고 봐야지.”
잠깐 고민하던 난 정수혁 이사에게 부탁했다.
“어떤 회사에서 손을 쓴 건지 알아봐 주실 수 있습니까?”
“일단 사은품을 제공하는 회사 리스트를 파악해 보겠네. 그리고 혹시나 최영은 편집장이 유진 씨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는지도 알아보지.”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이왕이면 강지영 본부장과 상의해 보는 게 어떤가? 우리 본부장과 우먼즈의 장 대표가 꽤 친하거든. 알고 있나?”
“아뇨. 몰랐습니다.”
“어쩌면 윗선을 통해 압박하는 게 제일 빠를 수 있으니까 이야기해보게.”
“알겠습니다.”
난 그 자리에서 강지영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강지영 본부장은 자신의 방에 있었다.
“전 본부장실에 가보겠습니다.”
“그래. 쓸 만한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연락해 주겠네.”
난 정수혁 이사와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본부장실.
“지혜 언니요? 잘 알죠. 그런데 왜요?”
강지영 본부장은 올해 50살인 우먼즈의 대표 장지혜를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친했다.
이모뻘의 나이 차이지만 서로 코드가 잘 맞아서 언니 동생으로 지낸다면서.
난 정수혁 이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더해 우먼즈가 유진이에 관한 찌라시를 쓰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먼즈가 찌라시를 다룬다고요? 설마? 뭐가 아쉬워서요.”
강지영 본부장 역시 똑같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 역시 안 믿겼지만 소문이 꽤 구체적입니다.”
다이어리가 알려 준 일을 마치 루머가 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거기다 한 가지를 더해 조수영의 집에 갔을 때 최지영이 내게 해준 유진이의 찌라시 설을 언급했다.
“여배우 대기실에서도 유진이 찌라시가 돈다고 하더라고요.”
“대체 무슨 내용인데요?”
잠깐 한숨을 내뱉은 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답했다.
“유진이가 저랑 사귄다는······.”
말을 더듬자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건 좀 치명적인데요?”
어처구니가 없다며 대번에 코웃음을 칠 줄 알았다.
그런데 강지영 본부장은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본다.
“아니죠?”
대체 왜 그러는지 잠깐 의아했지만 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서둘러 대답했다.
“매니저가 자기 연예인이랑 사귀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요? 절대 아닙니다.”
다른 배우와 사귀는 스캔들도 문제였지만 24시간 붙어 다니는 매니저와 열애설이 나면 문제가 더 심각하다.
광고주들은 미친 듯이 회사에 소송을 하기 시작할 거고 팬들은 여름철 소낙비처럼 우수수 떨어져 날아가 버릴 거다.
절대 아니라고 항변하자 강지영 본부장이 긴 한숨을 내쉰다.
“아니면 됐어요. 나도 그냥 좀 놀라서.”
강지영 본부장이 마시던 찻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고민에 빠졌다.
잠시 후.
“지혜 언니가 찌라시를 허락했을 리는 없는데······ 요즘 편집에서 손을 떼서 그런가?”
고민에 빠진 강지영 본부장의 한숨이 깊어졌다.
“유진 씨가 너무 빨리 떠서 그런지 사방에 적이네요. 위치가 어중간하니 견제가 심한 거겠지만.”
“그만큼 위협적이란 소리도 되겠죠.”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코카리스웨트 광고도 그렇고 칠성전자 광고까지. 상반기 핫한 광고는 다 쓸어 담았으니······.”
현재 유진이는 광고 노출도만 보면 S급 주연들에게 뒤지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한다······.”
고민하는 강지영 본부장에게 말했다.
“장 대표님을 따로 만나게 해주실 순 없습니까?”
“아직 소문뿐이라면서요? 증거도 없이 만나서 어떻게 하려고요?”
“현재 정 이사님이 증거를 찾고 계십니다.”
잠깐 고민하던 강지영 본부장이 혹시나 하고 묻는다.
“증거가 없으면요?”
“그래도 들이대 봐야죠. 우먼즈가 찌라시를 쓸 거라는 이야기만으로도 흘려들으실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강지영 본부장이 날 힐끔힐끔 쳐다본다.
“저기 정 팀장님. 혹시 골프 쳐 봤어요? 그 언니가 요즘 골프장에서 살거든요. 만나서 이야기하려면 골프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강지영 본부장은 내가 고아라는 걸 안다.
게다가 최근까지도 돈이 없었기에 골프를 접할 환경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
“아니. 제가 실언을 했네요. 그냥 저 혼자 만나볼게요.”
강지영 본부장이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난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저 싱글입니다.”
“싱글이요?”
강지영 본부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골프에서 싱글이라는 건 18홀을 73에서 79타로 칠 때 부르는 아마추어들의 용어였다.
그리고 아마추어 골퍼들이 꿈에도 그리는 경지였고.
“아니 골프는 또 언제 그렇게까지 배우셨어요?”
회귀 전 탑 엔터테인먼트에서 이사가 된 이후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타고난 운동 신경 덕분에 어렵지 않게 싱글에 이르렀고 그때부터 접대 골프를 쳤었다.
“제가 운동 신경이 좀 좋잖습니까? 테니스와 골프는 접대의 기본이라고 하길래 혹시나 하고 짬짬이 익혀뒀습니다. 대신 제가 싱글이라는 것은 좀 숨겨주십시오.”
대놓고 접대 골프를 치겠다는 말에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이 환해진다.
“알겠어요. 그러면 한 82타 정도로 이야기하죠. 그 언니 레슨 받아서 딱 80타 정도거든요?”
“필 받으면 80 언저리까지 간다고 해주세요.”
원래 접대라는 건 티 나지 않게 상대에게 져주는 게 최고였다.
오래 관계를 유지하려면 가끔은 이기기도 해야 했고.
“그 언니 요즘 골프장에서 살고 있으니까 내일 스케줄 되는지 물어볼게요.”
강지영 본부장이 전화를 걸자 얼마 되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언니. 혹시 내일 새벽에도 골프 나가세요? 네? 같이 치자고요? 알았어요. 그리고 저희 회사 팀장도 한 명 데리고 갈게요.”
잠깐 대화를 나누던 강지영 본부장이 날짜를 잡는다.
“약속해 놓고 빠지면 죽을 줄 알라고요? 언니나 시간 지켜요!”
강지영 본부장이 엄지와 검지로 오케이를 만든다.
“그래요. 그럼 내일 새벽 6시에 H 골프장 라운지에서 봐요.”
전화를 마친 강지영 본부장이 한숨을 내쉰다.
“정 팀장님. 골프 약속 빠지면 큰일 나는 거 아시죠?”
“라운딩 약속은 본인 사망 때나 빠질 수 있는 거잖습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피식 웃는다.
“그런 걸 아는 거 보니까 진짜 골프 쳐보셨네. 알겠어요. 그럼 내일 5시 30분까지 우리 집 앞으로 오세요. 같이 출발해요.”
“예.”
“그런데 클럽은 없죠?”
“렌트해 오겠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젓는다.
“장비 따로 빌리지 말고 그냥 오세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장지혜 대표와 골프 약속을 잡은 우린 모든 인맥을 동원해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 * *
정수혁 이사가 본부장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냈네.”
정수혁 이사는 이번 일의 배후에 글로벌 화장품 회사인 ‘블랑’이 끼어든 정황을 찾아내었다.
“잠깐만요. 블랑이라고 하셨습니까?”
“왜? 혹시 뭐 들은 거라도 있는가?”
글로벌 화장품 회사 5위인 ‘블랑’은 프랑스계 회사.
그리고 현재 ‘블랑’의 대주주는 화연 미디어 그룹이다.
화연 미디어 그룹은 <신의 이름으로>의 경쟁작인 <돈의 축제>의 최대 투자자.
거기다 아직은 관계자들만 아는 비밀이지만 블랑은 조만간 장웨이 회장이 통째로 삼키게 된다.
그리고 그 정보가 내 다이어리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11월 13일]
-PM 03:00 (보고 사항)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블랑’. 화연 미디어 그룹에 인수.
아마도 장웨이 회장은 글로벌 화장품 회사 ‘블랑’을 이용해 유진이의 찌라시를 터트리려 하는 모양이다.
‘장웨이 회장. 제법인데?’
유진이가 스캔들을 견디지 못해 꼬꾸라진다면 경쟁작인 <돈의 축제>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
더군다나 유진이가 광고 모델인 화장품 ‘예뜨랑’에게도 타격을 입힐 수가 있었다.
“장웨이 회장 쪽에서 손을 쓴 거 같습니다. 블랑의 대주주가 화연 미디어이거든요.”
그 순간 강지영 본부장과 정수혁 이사가 고개를 훽 하고 돌린다.
“뭐라고요?”
“뭐라고?”
‘블랑’의 주식을 화연 미디어 그룹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현재 극소수.
그 탓에 강지영 본부장과 정수혁 이사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화연이 대주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블랑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가 있을 겁니다.”
정수혁 이사가 놀란 눈으로 묻는다.
“어디서 들었나?”
“제가 아는 친구가 주식 쪽에 있어서 우연히 들었습니다. 예뜨랑 주식을 사고부터는 관심이 생겨서요.”
“그런가······”
누가 손을 쓴 건지 정확히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어떻게 갚아줄까를 고민하면 될 차례.
강지영 본부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정 이사님. 내일 새벽에 우먼즈 대표랑 골프 치기로 약속 잡혀 있어요. 힘드시겠지만 내일 새벽까지 눈에 보이는 증거를 다 모아주세요.”
“알겠네. 나만 믿어.”
정수혁 이사는 다시 본부장실을 나섰고 강지영 본부장과 난 내일 있을 장지혜 대표와의 만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최영은 편집장을 잡고 찌라시를 없애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