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241. 약속
김수명 클리닉에 들러 진단서를 끊어 놓고 회사로 돌아왔다.
난 곧장 본부장실로 올라가 강지영 본부장에게 오늘 일을 보고했다.
“나운석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이 감히 우리를 건드렸다 이거죠?”
나는 당장이라도 나운석을 만나러 가려는 강지영 본부장을 말렸다.
“본부장님. 무작정 만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우회적으로 풀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방법이 있나요?”
“KNET 대표님과의 자리를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손 대표님요? 자리야 만들 수 있는데 왜요? 무슨 정보라도 있어요?”
“네. 아이스톤의 나운석 대표가 횡령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횡령이라는 말에 강지영 본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스톤 엔터는 KNET의 자금으로 운영되는 자회사이기 때문이다.
“확실해요?”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서 들은 정보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횡령은 내부 감사만 돌려봐도 바로 찾아낼 수 있잖습니까?”
목이라도 걸 수 있다고 하자 강지영 본부장이 굳은 표정으로 묻는다.
“이참에 아예 나 대표를 갈아버리게요?”
“예. 그럴 생각입니다.”
내 가수를 건드린 이상 타협은 없었다.
지난번 강하나를 빼 올 때 봐준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잠깐 고민에 빠졌던 강지영 본부장도 결국 결단을 내렸다.
“바로 약속 잡을게요.”
그와 동시에 강지영 본부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 *
포탈 연예면이 김도진에 관한 기사들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쉘터 나인의 ‘김도진에게 숨겨둔 아이가 있다?’]
[아이스톤 엔터의 김도진. 고작 10개월 된 아이까지 폭행!]
긴급 체포된 김도진은 억울하다 했지만 유미를 폭행한 사진이 올라오자 아무도 그에게 동정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강하나에 관한 오해를 풀어주는 기사들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BJ 도진. 강하나 허위 저격! 오로지 인기를 시기한 자의 그릇된 행동!]
[C모 양. “하나 언니에 관한 루머는 모두 거짓. 삼자대면을 해도 좋다.”]
[강하나. “악플을 단 구독자들에 대한 원망은 없다. 오해를 푼 것만 해도 그저 감사할 뿐”]
[싱어송라이터 강하나. 음악방송 데뷔는 언제?]
[강하나 최단기간 구독자 10만 달성!]
강하나의 너튜브 채널은 의도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으로 인해 10만 구독자를 달성했고 쏟아지던 악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게다가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무려 50만 회를 넘겼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게 되었지만 이 사태를 일으킨 아이스톤의 나운석 대표와 양은철 실장을 그냥 둘 생각은 없었다.
아이스톤 엔터 모회사인 KNET 본사 건물 주차장에 차를 대자 강지영 본부장이 손양섭 대표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조심하세요. 손양섭 대표는 자기 쪽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분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횡령 건은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테니까 정 팀장은 분위기 봐서 끼어드세요.”
손양섭 대표는 음악인 출신으로 음악 전문 방송국인 KNET의 대표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
연예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기에 횡령 사건을 말한다고 해도 별 게 아니란 식으로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난 나운석 대표가 저지른 횡령 사건 말고도 손양섭을 상대할 무기를 가지고 있다.
바로 손양섭 대표의 ‘대표이사 연임’이 실패한다는 정보였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10월 10일]
-PM 09:00 KNET 신임 대표이사 이성준. 축하 화환 예약 발송.
현재 손양섭 대표는 KNET 대표이사 연임을 노리며 한창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였다.
그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은 KNET의 최태준 전무와 박형민 상무 그리고 이성준 이사까지 총 3인.
손양섭 대표는 그중 가장 위협적인 최태준 전무를 견제했었지만 최종적으로 대표이사가 되는 사람은 이성준 이사였다.
난 당시 이성준 이사가 로비로 대표가 된 과정을 알고 있었기에 이 정보로 손양섭 대표와 거래를 해볼 생각이었다.
“자 들어갈까요?”
난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정보들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강지영 본부장 뒤를 따랐다.
* * *
KNET의 대표이사실.
소파에 몸을 기댄 손양섭 대표가 미간을 찌푸린다.
“곤란한 이야기를 하는군. 나 대표가 횡령이라니······.”
강지영 본부장이 굳은 표정으로 굴렁쇠 엔터의 대응책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나 대표가 하나 씨를 건드렸으니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요. 명예 훼손으로 검찰에 고소할 생각인데 아마 모회사인 KNET도 거론될거예요. 그래서 미리 대비하시라고 찾아왔어요.”
손양섭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일종의 선전 포고군.”
“그렇게 받아들이실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전적으로 호의에서 미리 알려드리려고 찾아온 거예요. 손 대표님이랑 척을 지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내 선에서 알아서 처리해 달라?”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손양섭 대표의 얼굴에 웃음이 어린다.
“강감찬 대표의 딸이 제법 똑 부러진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군. 제법 매운데?”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손양섭 대표가 팔짱을 낀다.
“글쎄. 호의라고는 하지만 당하는 쪽에서는 그렇게 느껴지질 않는군. 게다가 나도 체면이 있는데······.”
말을 잠깐 끊은 손양섭 대표가 빙긋이 웃는다.
“굴렁쇠는 앞으로 KNET에 출연하기 싫은가 보지?”
만약 KNET이 언론에 언급되면 앞으로 굴렁쇠 엔터의 연예인들은 출연할 생각을 말라는 경고였다.
강지영 본부장이 입술을 깨문다.
“호의로 경고를 해 드렸는데 이렇게 나오실 건가요?”
“그러지 말고 며칠 말미를 주게나. 내가 천천히 알아보고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어떤가?”
대표이사 연임을 앞둔 손양섭 대표 입장에는 이 일을 유야무야 덮는 게 최고였다.
강지영 본부장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날 쳐다보며 뒤는 알아서 하라는 사인을 준다.
“대표님.”
내가 입을 열자 손양섭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자네가 누구였더라?”
만나자마자 명함을 줬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날 대신해 소개했다.
“저희 회사의 에이스 정윤호 팀장이에요.”
“굴렁쇠의 에이스? 그쪽 에이스는 김 실장 아니었어?”
“우리 에이스가 여기 정 팀장으로 바뀐 지가 언젠데요. 하여간 정 팀장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대표님.”
손양섭 대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그 대단한 김동수를 대신한 에이스라······. 좋아. 자네는 무슨 카드를 들고 왔나?”
손양섭 대표는 강지영 본부장을 대할 때와는 달리 훨씬 편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하지만 난 이내 그 얼굴을 단숨에 일그러뜨려 버렸다.
“손 대표님의 연임에 관한 정보를 드릴까 합니다.”
“젊은 친구가 입에 담을 주제가 아니군. 감당할 수 있나?”
손양섭 대표가 팔짱을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입은 웃고 있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허튼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제가 하는 말의 무게는 알고 있습니다.”
“허 그래? 그럼 한번 들어나 보지.”
“그 전에······ 제가 연임에 대한 좋은 정보를 드리면 나 대표님과 관련된 건을 즉시 처리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날 쳐다보는 손양섭 대표의 두 눈에 안광이 번뜩였다.
그의 눈길을 덤덤히 받아내었더니 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재미난 친구군. 일단 들어보고 도움이 된다 싶으면 당장 처리해 주지.”
먼저 말부터 하라는 게 조금은 치사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쉬운 쪽은 우리였으니 패를 깔 수밖에.
“약속은 지키는 분이라고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손양섭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차기 대표 자리를 놓고 최태준 전무님과 경쟁하고 계시죠?”
손양섭 대표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린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 회사 신입 사원도 다 아는 거 아닌가? 나 다음이 최태준 전무인데 당연히 그 친구를 견제하고 있지.”
“잘못 짚고 계신 겁니다. 다음 달에 열리는 주총 때 가장 유력한 후보는 이성준 이사님입니다.”
손양섭 대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성준 같은 핏덩이가 차기 대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난 손양섭 대표의 눈을 마주하며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말했다.
“방통위 박영환 위원장과 CK 그룹 부회장 손지명 부회장님이 이성준 이사를 이화원으로 불렀습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더니 이제까지와 달리 손양섭 대표의 표정에도 여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화원이라······. 뭔갈 듣기는 들었나 보군.”
이 당시 이성준 이사는 스스로 대표이사를 노리지 않는다며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기만전술.
이성준 이사는 회사 내부에서 정치할 시간에 방통위원장을 만나서 인맥을 다져놓고 그들의 힘을 이용해 차기 대표 선출 권한을 가진 부회장을 흔들고 있었다.
이런 수법이 차후에 알려진 뒤 그는 여의도 현역 정치인 뺨치는 고수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준 이사는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아랫사람들에게는 모질기가 그지없는 사람이다.
모든 연예 기획사는 그에게는 을이었기에 이성준이 대표이사가 된 뒤로 기획사들은 온갖 갑질을 당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난 손양섭 대표가 계속 연임하기를 지지하고 있다.
손양섭 대표가 조금 더 진중한 표정으로 묻는다.
“정보 출처가 어딘가?”
“내용이 중요하지 출처가 중요한 건 아닐 텐데요. 여기까지 말씀드렸으면 이 뒤는 손 대표님 힘으로도 알아보실 수 있으시잖습니까.”
손양섭 대표가 결국 결심을 내렸다.
“좋아. 뒤는 내가 알아보지. 그리고 자네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약속도 반드시 지키겠네.”
“감사합니다.”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강지영 본부장이 씨익 웃는다.
“어때요? 우리 정 팀장?”
손양섭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모르는 우리 회사의 고위 정보를 꿰고 있을 줄이야. 어디서 저런 친구를 구했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에이스라고~.”
“아무튼 이틀 안에 연락할 테니 그때까지 나 대표는 치지 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알겠어요 대표님.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우린 그렇게 손양섭 대표와의 미팅을 마무리 짓고 대표실을 나왔다.
* * *
이틀이라고 했지만 하루가 채 가기 전에 다이어리에 있던 일정이 사라졌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10월 10일]
-PM 09: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KNET 신임 대표이사 이성준. 축하 화환 예약 발송.)
얼마 지나지 않아 손양섭 대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날세 손양섭.
“예. 대표님.”
손양섭 대표가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큰 빚을 졌군.
기분 좋은 음색이었기에 나도 조금은 편하게 말을 받았다.
“잘 갚기만 하면 관계를 좋아지게 만드는 게 빚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맞는 말일세. 그리고 나 대표랑 양 실장은 내일쯤 처리될 테니까 그리 알고 기다리게나.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런데 그때였다.
-그나저나 신세를 졌으니 나도 갚아야 하는데······.
잠깐 뜸을 들이던 손양섭 대표가 이어서 말을 한다.
-길게 말하면 피곤하고 두 프로까지는 내 권한으로 내어주지.
KNET은 음악 전문 방송이지만 드라마와 예능을 만들기도 한다.
그중 두 개의 프로에 주연으로 내가 원하는 연예인을 꽂아 넣을 수 있게 해준단다.
그게 누구라도 말이다.
미처 상상도 못 했던 엄청난 기회였다.
그 탓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가 감사합니다. 대표님.”
-아닐세. 내 밥줄을 붙여줬으니 내가 더 고맙지. 더 해주고 싶지만 임직원들 눈치가 보여서 말이야. 하여간 조만간에 편성 본부 식구들과 같이 밥 한번 먹자고. 괜찮지?
“예. 대표님!”
-그럼 끊겠네.
달칵.
전화가 끊긴 순간 난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나운석 대표와 양은철 실장이 날아갔을 뿐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까지 받아버렸다.
잘만 활용하면 내 스타들을 하늘 끝까지 날게 해줄 비장의 무기가 될 터.
난 손양섭 대표가 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방법을 찾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 * *
굴렁쇠 엔터의 팀장급 이상 회의.
이기철 이사가 놀란 표정으로 내게 되묻는다.
“프로를 두 개나 받아왔다고? 그 그럼 조건은?”
“조건은 없습니다.”
순간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팀장들은 제대로 들은 게 맞냐며 되묻기까지 한다.
사실 팀장급 매니저의 힘으로 방송국에서 프로 하나를 따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통 크게 현금을 쏟아부어 제작 지원이라도 하면 또 모를까.
그순간 배우 3실의 강명길 팀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혹시 정 팀장이 두 프로 다 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예전엔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내가 배역을 꽂아주기 시작하자 최근엔 친한 척을 하고 있었다.
“프로 한 개는 강하나 씨를 위해 사용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말을 잠시 끊으며 팀장들을 쳐다봤다.
팀장과 실장들의 눈에 탐욕이 어린 게 보였다.
각 실마다 띄워줘야 하는 연예인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니까.
난 그들을 보며 기회를 양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른 프로 하나는 선배님들께 양보하겠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밀어줄지 결정해 주시면 제가 손 대표님께 직접 기획서를 전달하겠습니다.”
그 순간 다들 내게 잘 보이려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심지어 배우 1실의 방상영 실장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