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화
24. 겨울에도 꽃은 핀다 1
“괜찮은 거 같습니다. 어차피 녹화하면 하루 날아가긴 해도 꽃피는 4월 대학가 축제까지는 스케줄도 많지 않으니 시기는 좋습니다. 대신 장기적으로는 좀 무리일 거 같고요. 3개월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될 거 같습니다.”
한명호 팀장은 일주일에 하루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말했다.
“그래?”
“예. 그리고 오늘 윤호 꿈이 좋았답니다. 얘 꿈 샀으니 아마 프로도 잘될 거 같습니다. 거기 꽂으시죠. 애들.”
설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스케줄이 별로 없는 게 오히려 이럴 땐 유리했다.
거기다 한명호 팀장이 날 믿어 주고 있다.
“오케이. 그럼 한 팀장은 대기하고 윤호는 나 따라가자. 거래를 한번 해보자고.”
“저요?”
곁에 있던 한명호 팀장이 씨익 웃는다.
“그러면 내가 가리? 난 오늘 최은혁 PD를 찾아서 방송국을 뒤졌는데 얼굴 구경도 못 했다. 그러니까 운 좋은 네가 움직여야지. 오늘은 정 스타 네 날인가 보다.”
한명호 팀장이 내게 기대고 있었다.
“뭐해? CNS 엔터도 움직인다며? 한발 앞서야지. 어서 움직이자.”
“예. 예.”
난 나보다 더 애가 탄 이동민 실장의 뒤를 따랐다.
* * *
“한 달 고정? 동민이 형. 2군급 아이돌이 방송에 출연할 기회야. 반년이면 거의 특혜나 다름없는 거 몰라? 다 형이라서 내가 이런 제시를 한 거라니까.”
“특혜라······ 글쎄다? 보약인지 독약인지는 마셔봐야 알지. 너 예능은 처음인데 시청률이 애국가랑 경쟁하면 어쩌려고?”
최은혁 PD는 애가 닳은 데 비해 이동민 실장은 튕기는 모양새다.
“와 시작부터 초를 치네. 협상을 하러 온 거야? 파투를 내러 온 거야?”
“당연히 협상이지.”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래? 체리블라썸이 내 제안을 튕길 급은 아니잖아?”
“깡은 무슨. 우리 애들 실력 봤다며? 막말로 우리 체리블라썸이 언제까지 2군일 거 같냐? 3집은 제대로 준비 중인데 터지면 바로 한류 스타라고.”
이동민 실장의 밀당이 보통이 아니다.
필요하면 내가 나서려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만들지도 않은 3집에 수십억을 넣을 거네 마네 뻥을 치고 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저 입장이라고 해도 같은 전략을 사용했을 거다.
결국 최은혁 PD가 한숨을 쉬더니 최후 통보를 알렸다.
“석 달! 석 달은 고정 출연해 줘야 해! 아니면 판 엎어!”
버럭 화를 낸 최은혁 PD의 말에 이동민 실장이 웃으며 손을 내뻗었다.
“엎긴 왜 엎어? 콜!!”
최은혁 PD가 이동민과 악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이 형은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니까.”
“야. 생색내지 마라. 우리도 공들여 키우는 애들이야. 걔들 금방 큰다? 나도 너 아니었으면 이 자리 안 왔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한턱 제대로 쏴.”
“프로나 잘 만들어. 그럼 한턱만 쏘겠냐? 두 턱 세 턱도 쏴야지.”
툴툴대는 최은혁 PD와 히죽거리는 이동민 실장이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장난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정윤호 씨는 오늘 무대 준비 잘 해 주시고 체리블라썸 신곡 나오면 PR할 자료는 까톡으로 보내세요.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울 테니까.”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은혁 PD가 사라지자 이동민 실장이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하여간 만만치 않은 놈이라니까.”
넥타이를 풀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이동민 실장의 이마 위로 차갑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이제까지 보인 태도가 뻥카였나?
“왜? 사람 쫄아 든 거 처음 보냐?”
“······진짜 쫄긴 쪼신 겁니까?”
“야. 나라고 용뺄 재주가 있겠냐? 쟤가 연말 가요제 말고도 음방 메인 PD도 겸하고 있는데? 그런 인간이 딜을 걸어오는데 쫄아야지.”
그래도 좋게 정리된 게 다행이라며 식은땀을 닦은 이동민 실장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수고했다. 윤호 네 덕분에 이렇게나마 기회라도 잡았네. 요즘 우리 애들 푸쉬를 못 해줘서 미안했었는데 오늘은 내가 큰 신세를 졌다.”
“아닙니다. 체리블라썸의 퍼포먼스가 워낙에 좋아서 제가 한 게 없었습니다.”
이동민 실장이 기특하다는 듯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제법 겸손할 줄도 알고. 어쨌건 이번 일은 니가 직접 이야기해 줘라. 2부 무대 스케줄 하나 더 생겼다고.”
“제가요?”
“이런 건 일 딴 사람이 직접 전해야지. 나도 구 실장님에게 니 신세 톡톡히 졌다고 전하마.”
따뜻한 한마디를 듣는 순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공을 가로채고 남을 밟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돕고 챙겨주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니.
이게 바로 내가 그토록 바랐던 삶이었다.
* * *
“꺄아아악! 리얼? 레알? 진짜로요?”
2부 쁘띠모의 백스테이지에 선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세리가 파닥파닥 날갯짓을 한다.
이대로 대기실 천장을 뚫고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
만사를 쿨하게 받아들이던 양은비도 잘되었다며 등 뒤에서 세리를 껴안고 기뻐했고.
“세리야. 이번 무대는 진짜 중요해. 절대 실수하지 말자?”
아빠 미소를 지으며 모두의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명호 팀장은 곧 박수를 쳐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자! 다들 잘 알겠지만 2부 백스테이지는 다른 팀들과 경쟁하는 자리다. 이길 수 있지?”
한 무대에 무려 5팀의 걸그룹이 올라와 군무를 추는 자리다.
실력의 고하는 물론이고 누가 더 매력이 있는지 한눈에 드러날 거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바빠졌다.
메이크업 팀이 급히 뛰어오고 이동민 실장도 대기실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전화를 돌리는 중이다.
나 역시 회사 홍보팀과 자료를 주고받은 뒤 급히 PD에게 체리블라썸에 관한 자료를 보냈다.
그렇게 내 다이어리의 일정 하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09:3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쁘띠모 백스테이지 합동 무대 결원 발생.)
한고비를 넘었지만 아직 더 큰 고비가 남았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11:00 체리블라썸 3집 앨범 제작비 삭감 통보
여전히 11시에 있는 제작비 삭감에 관한 일정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 * *
“오빠! 그까짓 백스테이지 하나 따는 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자신 있다고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핑크다이아 멤버들의 성화에 그녀들을 담당하는 최명길 매니저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아니 최은혁 PD님과 우리 대표님이 관계가 아주 좋아서 성사시켜 볼 만하다고 한 것뿐이지 내가 언제 잘난 척을 했다고.”
폭설이 오는 바람에 쁘띠모의 백스테이지에 결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 최명길은 곧바로 최은혁 PD를 찾아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대타가 구해졌다니 말을 붙여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오빠가 무능해서 못 딴 건 아니고?”
“아니라니까 그러네. 플로렌의 매니저 강희동 팀장 알지? 그 사람도 까였더라고. 막 항의를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라니까.”
최명길 매니저가 두 손으로 파닥대며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다고 그냥 오면 어떻게 해! 우리 TK잖아. 쁘띠모의 자매 그룹인 우리 핑크다이아가 그 백스테이지 안 서면 누가 서는 건데!”
구민지의 날카로운 쇳소리에 최명길 매니저가 궁지에 몰렸다.
“체리블라썸.”
“뭐? 걔들이?”
구민지는 하마터면 게거품을 물 뻔했다.
자기들보다 순위도 낮은 체리블라썸이 그 무대 위에 선다는 게 말도 안 된다 생각했으니까.
“아 진짜. 짱나! 그게 말이 돼?”
그때였다.
달칵.
“누가 이렇게 언성을 높여? 웬 소란이야?”
마동팔 본부장이 대기실 밖에 소리가 다 들린다며 인상을 찌푸리고 들어왔다.
“보 본부장님.”
최명길 매니저가 벌떡 일어났고 핑크다이아들도 모두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이를 앙다문 구민지가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은 마동팔 본부장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예?”
“어쩌라고?”
“쁘띠모 선배님들의 직속 후배는 저희뿐이니까 본부장님이 이야기만 좀 잘 해 주시면······”
“어이. 구민지.”
“예. 예.”
“정신 못 차리지? 내가 주제 파악 못 하는 인간 싫어하는 거 알아 몰라?”
마동팔이 인상을 찌푸리자 구민지와 나머지 핑크다이아 멤버들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박은빈의 연기자 전향이 실패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자 그녀를 담당하는 마동팔도 덩달아 저기압이다.
“죄송해요. 본부장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구민지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를 잘해달라는 말은 곧 청탁을 해 달라는 뜻이다.
회사의 2인자인 마동팔에게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PD에게 청탁을 해보라는 요구를 하다니.
누가 들어도 선을 넘은 행동이다.
마동팔은 바싹 얼어있는 핑크 다이아 멤버들을 보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삐를 조였다가 다시 푸는 것.
이것이 마동팔이 선호하는 일종의 아이돌 조련법이니까.
“쯧. 내가 너희들 기를 죽이려고 이러겠냐? 아니야. 미리미리 이야기했으면 진즉에 내가 손을 써 줬을 게 아니냐!”
그러자 구민지가 고개를 힐금 들고 물었다.
“그러면?”
“저쪽에서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데 뭘 어쩌라고?”
구민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제 마동팔의 타켓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최명길.”
“예? 예!”
“넌 뭐 하는 새끼야?”
그 말과 함께 마동팔이 최명길 매니저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빠악.
“매니저라는 놈이 이 상황이 벌어질 때까지 뭐 했냐고.”
“크흐흐흑. 죄 죄송합니다.”
아픈 다리를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면서도 연신 고개를 숙이기 바쁜 최명길을 본 순간 구민지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자기의 짜증이 풀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으니까.
“대타로 누가 들어갔는지 알아는 봤냐?”
“체 체리블라썸이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체리블라썸? 굴렁쇠에서 키우는 4인조?”
“예. 체리블라썸이 대타로 들어간다고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마동팔의 미간이 팍하고 일그러졌다.
“거참 짜증 나네. 굴렁쇠와는 뭐가 이렇게 재수 없게 계속 얽혀?”
마동팔 본부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급히 최은혁 PD를 찾아 나섰다.
구민지에겐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한번 밀어볼 생각이다.
결코 핑크다이아를 아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박은빈을 X 먹인 정유진에 이어 이번에는 체리블라썸이라니.
굴렁쇠 엔터와의 악연이 계속해서 걸렸다.
그 탓에 이번엔 자신이 굴렁쇠 엔터의 계획에 태클을 걸어볼 생각이었다.
* * *
1부 무대 녹화를 마치고 내려오는 체리블라썸을 기다리는데 마동팔 본부장이 최은혁 PD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최은혁 PD를 찾아 뭔가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아무래도 또 로비를 시도하려는 모양이다.
“이 실장님. 저 인간 로비하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동민 실장은 코웃음을 쳤다.
“걱정하지 마. 은혁이 저놈이 저리 순하게 생겼어도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지독한 독종이다. 로비? 돈을 들이밀면 오히려 성질만 낼걸?”
자신감인지 센 척하는 건지.
이러다 최은혁 PD가 저쪽으로 넘어가면 말짱 황인데.
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 사이에 점점 웃음이 줄어들고 마동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거봐라. 내 말이 맞지? 마동팔 저 인간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을 거다. 아마.”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동민 실장의 손엔 땀이 흥건해 보였다.
이런 건 봐도 모른 척해 주는 게 직장인의 미덕이지.
마동팔이 부들부들 떨며 사라지는 걸 보던 이동민 실장이 날 쳐다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윤호야.”
“예. 진짜 실장님 말씀대로 됐네요. 대단하십니다.”
엄지를 치켜세우자 이동민 실장이 말한다.
“그게 아니라 너 혹시 가수 2실로 안 올래?”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마치 오늘이 인생의 모든 운을 모조리 끌어쓰는 것처럼 내게 온갖 제안이 들어오고 있었다.
유진이의 광고 제안에 김솔잎 작가의 배역 제안. 그리고 가수 2실의 스카우트 제안까지.
좋은 말로 거절했지만 이동민 실장은 단번에 ‘노’라고 대답하지 말고 곰곰이 생각해 보라 말했다.
“지금의 체리블라썸에겐 네가 꼭 필요한 거 같다. 그리고 가수 2실로 오면 너 내가 제대로 키워줄게.”
날 빤히 쳐다보는 이동민 실장의 얼굴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이거 어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