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9화
239. BJ 도진 2
조수영을 설득하는 데 며칠은 걸릴 줄 알았다.
하지만 유진이와 유미 덕에 곧바로 문제가 풀려버렸다.
“그러면 내일 오전에 알토란이랑 계약하시고 난 후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하시죠.”
“네. 계약이 끝나면 오후에 사진이랑 글 업로드하고 경찰에 신고할게요.”
조수영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자 유진이가 손을 잡아주며 용기를 준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조수영의 엄마 이지애가 나타났다.
양손에 검은 봉지를 들고 있는 이지애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수영아. 이분들은 누구니?”
“아 엄마 왔어?”
당황하는 이지애를 본 유진이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세요. 어머니.”
“아 아······ 예. 그 그런데 혹시 정유진 씨 아니세요?”
유진이가 비닐봉지를 받아들자 이지애가 넋이 나간 채 쳐다본다.
“말 편하게 하세요. 어머니. 저 이제 수영이랑 언니 동생 하기로 했어요.”
“유 유진 씨가 제 딸이랑요?”
“에이 어머니도 참.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이지애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김도진이 와서 행패를 부린 이후 이지애는 낯선 사람들에 대해 경계심이 강해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유진이 덕에 쉽게 경계심이 풀렸다.
“수영아.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조수영은 유진이와 내 도움으로 새 소속사를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아이를 외면한 김도진에게 복수하는 길을 알려준 것을 알게 되자 이지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정말이니?”
“응 엄마. 정 팀장님이랑 유진 언니가 앞으로 많이 도와준댔어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엄마.”
순간 이지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아이고 내 새끼. 잘 됐다. 잘 됐어.”
꼭 껴안은 두 모녀가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흑흑. 엄마. 그동안 미안해. 김도진 그 인간을 만나서 엄마까지 힘들게 만들고······ 흑흑.”
연신 두 모녀가 서로를 위로하자 현관문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든 유진이가 연신 눈물을 찍어 내었다.
그러자 내 품에 안긴 유미가 외쳤다.
“함미이~!”
이지애가 고개를 돌려 손녀를 쳐다본다.
“아이고! 우리 유미가 삼촌한테 안겨 있었네?”
“음빠아뺘!”
유미가 꺄르륵 웃으며 대답한다.
여전히 내 품에 꼭 달라붙은 채로 말이다.
“엄마. 그나저나 유미 쟤. 진짜 웃기다? 잘 시간이 넘었는데도 아까부터 계속 정 팀장님한테 안겨 있어. 낯도 안 가리고.”
조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우리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아 맞다. 엄마. 여기는 유진 언니 매니저인 정윤호 팀장님이고 이쪽은 이동민 실장님.”
난 유미를 안고 있어 앉은 채로 인사를 건넸다.
이지애가 내 무릎을 붙잡고 감사 인사를 한다.
“우리 수영이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팀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말을 하는 이지애의 표정이 조금 어둡다.
“왜 그러십니까? 어머님?”
“저기······ 그런데 유미 때문에 우리 수영이가 방송할 수 있을까요?”
이지애는 아이를 키우는 딸이 방송에 설 수 있겠냐고 물었다.
순간 유진이가 나섰다.
“왜 못해요? 저 보시면 모르세요?”
“아······!”
이지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야말로 아이가 있는데도 성공적인 연예인이 된 살아 있는 증거였으니까.
유진이 덕에 세세한 설명이 필요 없어졌다.
“처음부터 유미가 있다는 걸 알고 드린 제안입니다. 그리고 당분간 수영 씨를 맡아줄 알토란 기획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요.”
이지애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이를 먹으니 쓸데없는 걱정만 많아지네요. 주책맞게.”
이지애는 딸의 꿈이 뒤늦게라도 이뤄지게 된 걸 기뻐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저기······ 저녁 안 드셨죠? 소면을 사 왔는데 잔치국수라도 드시겠어요?”
“예 어머님.”
입맛을 다시자 유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걷어붙였다.
“저도 도울게요.”
“아니 유진 씨가 어떻게······.”
“저 요리 잘해요. 수영아. 넌 앉아 있어.”
“아니에요. 언니. 저도 갈게요.”
조수영도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수가 없다며 따라서 일어났다.
그 탓에 거실에는 이동민 실장과 유미를 안고 있는 나만이 남았다.
“윤호야. 유미랑 놀고 있어. 난 여기 전등 좀 확인해 봐야겠다.”
이동민 실장이 겉옷을 벗은 뒤 아까부터 깜빡이던 전등을 쳐다본다.
그러다 안 되겠다는 듯 주방을 향해 외쳤다.
“어머님. 여기 거실 전구 갈아야겠네요. 전구 사러 갈 건데 따로 필요한 거라도 있나요?”
“괜찮아요. 딱히 필요한 건 없어요.”
하지만 유진이가 외쳤다.
“실장님. 계란 애호박 청양고추 좀 사다 주세요.”
“딴 건?”
“유미 먹일 우유랑 요구르트요! 짜 먹는 요구르트로!”
유진이는 냉장고를 잠깐 본 것만으로도 필요한 게 뭔지를 알아차렸다.
작은 반지하 방이 활기가 넘치기 시작하자 품에 안긴 유미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그런데 한동안 내 품에 안겨 옹알거리던 유미가 한 손으로 거실 구석을 가리켰다.
“음마아마빠!”
거실 구석에는 어지럽게 쌓인 동화책이 놓여 있었다.
“유미야 책 보고 싶어?”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유미. 삼촌이 책 읽어 줄게.”
난 거실 한쪽에 꽂힌 동화책을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제목은 도깨비방망이.
모든 동화책은 똑같은 말로 시작한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내 품에 안긴 유미는 목소리를 들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한다.
“얼쑤~ 금 나와라~ 뚜욱~딱!”
“뚜우우따!”
“은 나와라~ 뚜욱~딱!”
“뚜따따따!”
즐거운 목소리로 날 따라 하던 유미는 5분 정도가 지나자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난 천천히 책을 읽는 목소리를 낮췄고 잠에 푹 빠진 유미를 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그사이 주방에서 잔치국수 육수의 고소한 냄새가 거실까지 퍼져왔다.
깜빡이던 전구는 이동민 실장이 갈아 끼운 덕에 환해져 있었다.
단 하루 만에 조수영의 집은 사람 사는 따뜻한 온기와 생기가 머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부산히 움직이며 판을 펴고 식기와 젓가락 숟가락을 가져왔다.
잠에 빠진 유미를 건네려고 했지만 내 품에서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유미야. 엄마한테 와야지?”
조수영이 불렀지만 잠이 든 유미는 더욱 내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하지만 결국 두 손에서 힘을 빼고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기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가 갑자기 가슴이 휑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너무도 어린 유미를 때렸다는 김도진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내 품에 쏙 들어올 작은 생명체에 손을 댈 데가 어디 있다고.
인간 같지 않은 김도진을 절대로 그냥 놓아둘 생각은 없었다.
“정 팀장님. 괜찮으세요?”
조수영 목소리가 떨린 순간 급히 화난 안색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괜찮습니다.”
조수영이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비싸 보이는 옷인데······ 죄송해요.”
조수영이 유미의 침 자국이 남은 내 옷을 가리켰다.
혹시나 그 이유로 인상을 찌푸린 줄 알고 안절부절못하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비싼 옷도 아니고 물 세탁하면 된다고.
그냥 유미가 떨어지니까 휑해서 그렇다고.
“유미를 안고 있다가 놓으니까 갑자기 허전해서 저도 모르게······ 하하.”
조수영이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팀장님이 아이를 참 좋아하시네요.”
곁에서 유진이가 동의했다.
“응. 우리 오빠가 미소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요 언니?”
언니 동생을 하더니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놓고 있었다.
유진이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지었다.
회귀 전에는 내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미소나 채은별이나 유미나 막상 접하자 모두가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오빠. 드세요.”
조수영의 말에 빙긋이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면 솜씨 한번 볼까요?”
그 순간 이지애가 양념장을 내 앞으로 내민다.
“양념장 듬뿍 넣어 드세요. 팀장님.”
계란 지단에 애호박 무침 바다 내음이 물씬 나는 김을 올린 잔치국수에 양념장을 두 스푼을 넣고선 맛을 보기 시작했다.
후루룩!
탄력 있는 소면과 육수의 궁합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내친김에 두 손으로 그릇을 들고 육수를 마시자 몸속까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먹어본 정성 가득한 잔치국수의 맛에 바닥까지 그릇을 싹싹 비워버렸다.
“크으~ 끝내줍니다. 어머님!”
“어찌나 맛깔나게 드시는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네. 한 그릇 더 드시겠어요?”
“아 아닙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려는 이지애를 진정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흰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뵙겠습니다.”
이지애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유미를 안은 조수영이 현관까지 따라 나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와주셔서 진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니 마음 단단히 먹으십시오.”
난 내일 아침에는 알토란 기획의 박 이사와 함께 다시 찾아오겠노라 말했다.
조수영과 계약하고 뒷정리를 해주는 건 그쪽에서 맡아줘야 했기 때문이다.
* * *
다음 날 새벽.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그런데 조수영과 관련된 일정이 삭제되어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1년 1월 13일]
-PM 07: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보고 사항) BJ 도진 여자 친구 페이스북 폭로! 김도진 체포.)
“이게 왜 벌써 사라졌지?”
어제 조수영을 만나고 나오던 중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일정이다.
순간 아차 하는 마음에 급히 조수영의 페이스북을 확인했다.
[조수영 페이스북]
김도진의 사생활.
-전 아이스톤의 출신 연습생 조수영이라고 합니다.
4년 전 저는 BJ 도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김도진의 유혹에 넘어가 충동을 참지 못하고 선을 넘었습니다.
그런 관계가 몇 달 동안 지속되며 결국에는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저는 회사를 나왔습니다.
김도진은 제게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대신에 돌아온 건 폭행뿐이었습니다.
(사진 : 김도진의 폭행 증거 1 – 제가 겪은 타박상 전치 4주.) (사진 : 김도진의 폭행 증거 2 – 아이의 목에 남은 상처) (사진 : 김도진의 폭행 증거 3 – 저희 엄마 팔에 남은 상처) ······그리고 BJ 도진이 강하나에 관해 언급한 일은 모두 거짓입니다. 하나 언니는 노래 연습과 아이돌 데뷔를 위해 연습만 하느라 남친을 사귈 시간 따위는 없었습니다. 가짜 루머로 돈을 버는 BJ 도진의 행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용기를 내어 글을 남깁니다······
원래는 오늘 오후에 올리자고 약속했었는데 새벽같이 글과 증거 사진을 남겨 놓다니.
‘어젯밤에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난 곧장 조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영 씨 이게 무슨 일입니까?”
-팀장님. 죄송해요. 이따가 올리자고 하셨는데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이유를 묻는 내 질문에 조수영은 그저 흐느끼기만 했다.
나는 그녀의 심경을 흔들 만한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공개하기로 한 거니까 안심하세요. 그리고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난 곧장 옷을 챙겨 입고 조수영의 집으로 향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김도진이 찾아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조수영의 집.
초인종을 누르며 나라는 걸 밝히자 대번에 문이 열렸다.
“정 팀장님······.”
조수영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뒤로 그녀의 엄마인 이지애가 유미를 안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오늘 새벽에 도진 오빠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혹시라도 하나 언니에 대해서 쓸데없는 소리라도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자기가 입만 뻥긋하면 내 앞길을 진흙탕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강하나와 나름 친했던 조수영의 입에서 연습생 시절의 증언이 나올까 싶어 입막음하려 했단다.
더군다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자신과 사귈 때 찍었던 사진과 영상들을 공개한다는 협박까지 들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하나 언니를 묻어버릴 영상도 아침에 올린다고 해서 그만······.”
조수영이 충분히 정신이 나갈 만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오후에 업로드할 내용이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수영 씨. 혹시 그 자식과 사귈 때 영상을 찍은 적이 있습니까?”
조수영이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절대 그런 건 없어요. 있었으면 미리 말씀드렸을 거예요.”
하긴 회귀 전에도 김도진은 그런 영상을 공개한 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흥분은 가라앉히세요. 어차피 올릴 글이었으니까 뒤는 제게 맡기고. 제가 다 해결해 드릴게요.”
순서가 꼬이긴 했지만 어차피 벌어질 일.
이제부터 대응이 중요했다.
“혹시 새벽에 통화 내용은 녹음하셨습니까?”
“예. 김도진 그 인간에게 전화가 오면 꼭 녹음하라고 하셨잖아요.”
“잘하셨어요.”
조수영을 안심시키자 이지애가 유미를 안은 채 묻는다.
“팀장님. 우리 수영이 괜찮겠죠?”
“예.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제 이야기부터 들으세요.”
난 곧 김도진이 들이닥칠 거라 말했다.
내가 아는 김도진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양아치니까.
난 우선 이지애와 유미를 방 안으로 들여보내며 절대 나오지 말라 말했다.
그 뒤 곧장 알토란 기획의 박우민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곧 출발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동민 실장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난 김도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거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쿵쾅거리는 김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문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