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234. 하나 튜브 1
유진이가 발소리를 힘주어 내며 다가온다.
또각또각.
하이힐 뒤축이 내는 소리가 이명을 울리는 것처럼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유진이는 주변에 스태프들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주영인에게 반말로 따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뭐 하냐니까?”
주영인이 어깨를 으쓱한다.
“보면 몰라? 상담하고 있잖아.”
“상담? 같은 회사도 아닌데 무슨 상담을 해? 에이스 매니저들은 일 안 해?”
“야 너무 경계하지 마. 상대 드라마 주연에 소이영이 발탁되었다는 뉴스가 났길래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뿐이니까.”
“이유야 뭐가 됐든 너희 회사 매니저 놔두고 왜 우리 오빠랑 이야기하는 거냐고.”
“얘 웃긴다. 난 너희 매니저랑 말도 못 해?”
유진이가 더욱 활짝 웃으며 말한다.
“응 못 해. 특히나 단둘이서 있을 때는!”
주영인이 웃음을 거둔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주영인의 시선이 유진이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유진이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기 시작했다.
날 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대로라면 기껏 주영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었다.
“유진아.”
유진이가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주영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물러나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널 위해서 상담한 거니까 오해하지 마.”
그 순간 유진이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절 위해서요?”
눈싸움에는 이겼지만 이번엔 주영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산 넘어 산이다.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이 만족할 해답을 찾아내었다.
“지금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할 때야. 그래서 잠깐 상담해주고 있었어.”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풀리더니 의문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게 무슨······.”
“소이영의 인기와 연기력도 그렇고 한세화 대표도 언플에 능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번엔 영인이랑 손을 잡아야지.”
주영인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거봐. 이래서 내가 윤호 오빠와 상담을 하는 거라니까?”
조금은 안도한 유진이가 피식 웃는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넌 네 매니저 못 믿어?”
“누가 오빠를 못 믿는대? 널 못 믿지.”
잠깐 괜찮나 싶었는데 또다시 툭탁거린다.
그만 싸우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제작 스태프가 주영인을 찾아왔다.
“아. 여기 계셨네요. 영인 씨. 곧 슛 들어가야 합니다.”
“예. 알겠어요.”
스태프가 돌아가자 주영인이 날 쳐다본다.
“오빠가 말한 대로 할게요. 그럼 되죠?”
“예.”
다시 딱딱해진 내 말투에도 주영인은 윙크를 찡긋하며 사라져버렸다.
마치 유진에게 보라는 듯.
그런 주영인의 뒷모습을 보던 유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쟤는 날이 갈수록 더 하다니까요?”
투덜대는 유진이에게 물었다.
“유진아. 그런데 갑자기 왜 그렇게 날을 세워?”
“그래야지 쟤가 함부로 못 오죠. 요즘 들어서 툭하면 오빨 찾아오는데 저라도 으르렁거려야 겁을 먹지 않겠어요?”
“너 안 볼 때 나도 충분히 으르렁거리거든?”
유진이가 그것 가지고는 약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자자. 이 이야기는 그만 너도 빨리 다음 씬 준비해야지.”
“알겠어요.”
그 순간 유진이가 주먹을 살짝 쥐고 있는 게 보인다.
뭐 하냐고 물었지만 빙긋이 웃기만 하고 답하지를 않는다.
“혹시 때리려는 거 아니지?”
“에이. 설마요.”
하지만 이윽고 이어진 씬 49에서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씬 49는 ‘방신애’가 ‘청명’을 범죄자로 오해해 유치장에 가뒀다가 풀어주며 용서를 비는 씬이다.
촬영에 들어가자 ‘청명’을 연기하는 유진이는 애드립을 빙자해 주먹으로 ‘방신애’의 가슴팍을 툭툭 치며 쌍욕을 시전했다.
오디오 감독님이 화들짝 놀랄 정도의 욕설에 주영인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NG가 나냐 마냐 하는 순간.
김성운 PD는 컷을 외치지 않고 유진이의 애드립을 내버려 두고 있었다.
현재 상황에 너무도 어울리는 연기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진이는 눈앞에서 실컷 주영인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스태프들은 유진이의 화끈한 연기에 열띤 환호를 보냈고 주영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 *
한세화 프로덕션.
소이영은 핑크 색 에르메스 가든파티 백을 소파에 내려 두고 소파를 훑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가죽 질감에 웃음이 흘러나온다.
“한 대표님. 이 소파 얼마나 해요?”
“궁금해?”
“네. 이번에 건물 한 채 올리는데 저도 하나 놓으려고요.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데.”
“얼마 안 해.”
“그러니까 얼마요?”
소이영이 웃으며 묻는다.
“5천.”
“5천이요?”
소이영의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에르메스 가죽으로 이탈리아 장인이 손수 만든 거야. 한 땀 한 땀.”
“에르메스? 어쩐지 텍스처가 남다르다 했어요.”
“혹시 이영 씨도 관심 있어? 있으면 바이어 소개해 줄게. 그 사람 통하면 30% 디스카운트 할 수 있거든.”
소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정도면 적당한 거 같네요. 컬러는 핑크로도 가능해요?”
“핑크? 커스텀 오더 넣으면 시간도 더 걸리고 가격도 뛰겠지만 될걸? 해줘?”
소이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해줘요.”
눈이 번뜩이는 소이영을 향해 한세화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영 씨. 대신에 우리 인터뷰 몇 개만 잡자.”
소이영이 팔짱을 끼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인터뷰? 글쎄요. 그건 제 매니저와 상의를 좀 해봐야 하는데······.”
TNT 엔터에서 나온 소이영의 매니저 장삼덕이 곤란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한 대표님. 우리 이영이는 인터뷰 한 건당 별도 비용을 받는 거 아시면서······.”
그 순간 맞은편에 있던 홍장미 작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소이영. 너 적당히 해. 출연료를 그렇게나 받아먹고도 인터뷰 비용을 별도로 받아? 너무 욕심부리다 탈 나. 이 년아.”
TNT 장삼덕 실장이 나섰다.
“작가님. 그 부분은 저랑 이야기를 하시······.”
홍장미가 코웃음을 친다.
“장 실장. 개념 밥 말아 먹었어?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계약서에 사인도 했으니 드라마 안에서 제대로 굴려 줘? 똥물 한번 뒤집어쓰게 해 줄까?”
홍장미 작가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배우를 제멋대로 다루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과거 인기만 믿고 작가에게 덤빈 배우 최영지를 막장 불륜녀로 만들어 CF와 차기작을 1년간이나 끊기게 했던 적이 있었다.
소이영이 급히 매니저를 말렸다.
“장 실장님. 가만히 계세요. 사람이 그렇게 눈치가 없어?”
TNT 엔터의 장삼덕 실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빠졌다.
영화는 감독판.
드라마는 작가 판.
그 사실을 잘 아는 소이영이었기에 홍장미의 잔소리를 꾹 눌러 담아 참았다.
순간 한세화가 빙긋이 웃는다.
역시 홍장미를 데리고 온 게 신의 한 수라 생각하면서.
소이영의 기가 꺾이자 홍장미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상대가 주영인이야. 이영이 너도 준비 단단히 해. 너도 연기 제법 하지만 요즘 현장에서 주영인이 물올랐다는 소리가 자주 들리던 걸?”
소이영이 눈을 번뜩인다.
“작가님. 자존심 상하게 왜 이래요? 아무리 그래도 주영인이랑 비교하시면 저 섭섭해요.”
“방심하지 말란 뜻이야. 내 작품 주연이 상대 배우한테 발리는 건 진짜 기분 더럽거든.”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 순간 소이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그런데 정유진은 어때요?”
“왜 걔가 신경 쓰여?”
소이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솔직히 말하면 ‘아침이 간다’에서 ‘파란 하늘’까지. 조연만 맡았는데도 존재감은 어지간한 주연 이상이니까 당연히 신경 쓰이죠. 좀 거친 면이 있어도 눈빛이 살아 있던데요?”
홍장미가 한세화를 바라본다.
“한 대표. 들었지?”
한세화가 빙긋이 웃는다.
“알았어. 걔에 관해서는 내가 계속 주시할게. 그보다 우리 이영 씨가 오늘은 무슨 일로 여길 찾아왔을까?”
소이영이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넘긴다.
“드라마 투자자분이 화연 미디어의 장 회장님이라면서요?”
“그래.”
“혹시 그분 한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장 회장님을?”
“예. 우리 드라마에 최대 투자자이시니까 미리 인사라도 드리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은데······.”
한세화의 웃음이 조금 짙어지기 시작했다.
돈이 최고라는 소이영이라면. 장웨이 회장을 기쁘게 만들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경우 투자금을 더 받아낼 수도 있었고.
회사는 돈을 장웨이는 미녀를 소이영은 스폰서를 말이다.
한세화가 씨익 하고 웃음을 지었다.
“우리 이영 씨가 부탁하는 거라면 자리 한 번 만들어 봐야지.”
“한국에서 만나는 게 곤란하시면 중국도 괜찮아요.”
“오케이~ 바로 약속 잡아볼게.”
한세화의 웃음만큼 소이영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 * *
유진이를 집에다 데려준 뒤 곧장 회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있을 강하나의 첫 너튜브 방송 송출을 위해 지하 녹음실로 이동했다.
지하 녹음실 4번 방에는 마치 ‘보이는 라디오’를 연상하게 하는 장비들이 가득했다.
녹음 부스 안에는 최고급 카메라와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었고 테이블과 의자 기타를 거치할 수 있는 거치대까지 놓여 있었다.
‘이 정도면 우선 장비는 최상급이야.’
회귀 전 강하나는 회사의 도움 없이 홀로 너튜브 채널을 개설해 진행했다.
숙소에서 홀로 웹캠을 설치하고 직접 산 마이크와 자신이 오래전부터 쓰던 통기타만 들고서.
매일 오후 11시 30분부터 30분 동안 이어진 방송은 첫날에 구독자 3명으로 시작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20명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6년간 연습생 생활을 한 끈기로 매일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을 이어갔다.
한국의 지나간 명곡을 부르고 해외 팝송을 부르며 관심을 끌고 매일 자신의 자작곡을 부르면서.
그러던 어느 날.
구독자 103만 명을 데리고 있는 제이뮤직이라는 유튜버가 하나의 채널을 자신의 구독자에게 소개하면서 강하나의 채널은 조회 수가 급상승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강하나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매일 라이브 방송을 하며 성실하게 팬들과 소통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강하나는 일순간 치솟은 관심을 그대로 유지해 3개월 만에 구독자 10만 명을 달성하며 실버 버튼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번엔 제이뮤직 도움 없이 한 달 안에 그 구독자를 달성하게 해줄 생각이다.
“이 감독님. 준비 끝났습니까?”
녹음실 컨트롤 패널 옆에 새로 설치한 컴퓨터를 만지작대던 이석형 감독이 고개를 돌린다.
“아까 리허설까지 해봤습니다. 그리고 이젠 감독이 아니라 대리라 불러주십시오.”
“그럴 수야 있나요. 나중에 뮤직비디오도 또 찍으실 거잖아요.”
이석형 감독은 강하나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감독.
난 그를 편집자 겸 너튜브 방송 PD로 고용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찍게 되면 별도의 인센티브를 주기로 약속했었다.
이석형 감독은 회귀 전 뮤직비디오 쪽으로 꽤 이름을 알리는 감독이었으니까.
그때였다.
녹음실의 문이 열리더니 강하나가 도란희와 함께 들어온다.
“오빠. 오셨어요?”
“어. 그런데 왜 이렇게 얼어 있어?”
“하하. 그 그래요?”
강하나가 마치 로봇처럼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잘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강하나가 싱긋이 웃는다.
“그렇겠죠?”
그 순간 강하나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주춤거렸다.
“하나야 왜 그래?”
“오빠. 저 잠시만 기도 좀 해도 돼요?”
“기도? 그래. 아직 20분 정도 남았으니까. 자리 비켜줘?”
강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그거 말고요.”
“그러면?”
강하나가 눈치를 보다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이 내 오른쪽 어깨에 닿았다.
“응? 뭐 해?”
“세리가 오빠 붙잡고 있으면 복이 온다고 해서······요.”
본인이 말을 하면서도 황당한지 얼굴을 붉힌다.
그런데 하필이면 세리한테 그런 걸 물어보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세리처럼 등에 업힌 건 아니라는 거다.
“내가 무슨 복돌이야? 붙잡고 기도하면 복이 들어오게?”
“그 그게요······.”
마치 돌하르방이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강하나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현재 시각 10시 50분.
10분 뒤 11시가 되면 뮤직비디오가 먼저 업로드된다.
그리고 회귀 전과 달리 11시 11분이 되면 라이브 스트리밍을 할 생각이었다.
시청자들이 기억하기 쉬운 시간이 좋으니까.
“그래. 너 편할 때까지 그러고 있어.”
“감사해요 팀장님.”
강하나가 한숨을 쉬며 내 어깨를 붙들며 기도를 한다.
이제 강하나의 뮤직비디오가 업로드되기 1분 전.
강하나와 함께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도란희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묻는다.
“팀장님. 기자들 홍보를 안 해서 아무도 안 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누가 홍보를 안 했다고 그래?”
“예? 담당자인 저도 모르게 어디서 홍보를 했다고요?”
“기다려 보면 알아.”
뒤늦게 녹음실에 내려온 은지유 대리도 도란희를 따라 내 어깨를 붙들었다.
자기도 해야 할 것 같단다.
드디어 뮤직비디오 업로드 시간이 되었다.
“팀장님. 뮤직비디오 올릴 시간입니다.”
“올리세요.”
이석형 감독이 모니터 화면을 보며 외쳤다.
“뮤직비디오 업로드하겠습니다. 다섯 넷······ 하나! 올라갔습니다.”
<새로운 시작>의 공식 뮤직비디오가 강하나의 너튜브 채널인 ‘하나 튜브’에 업데이트되었다.
그때부터 이석형 감독이 화면을 ‘새로 고침’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어깨를 붙잡은 강하나의 손에 힘이 꾹 하고 실렸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와 동시에 뮤직비디오의 조회수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5십! 백이십! 2백! 3백! 4백5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