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0화
230. 추수 3
연예인들이 힘든 연예계 생활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잠시 머리를 식힐 것들이 필요하다.
술이나 담배 같은 것들이 주로 그 대상인데 성호준에게는 그 역할을 게임이 해주고 있었다.
그 탓에 성호준에게는 게임을 하는 시간만큼은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그딴 게임 좀 그만하면 안 되냐?’고 말하는 TNT 엔터의 장유식 실장을 잘라버리고 자기 동생인 성영준을 매니저로 삼아버릴 정도로.
“호준 씨. 게임 좋아하시잖습니까? 당연히 제가 기다려야죠. 어차피 모바일 게임이라서 판당 2분이면 끝나잖습니까?”
성호준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네요. 이거 배려도 할 줄 아시고. 요즘 정 팀장님 소문이 좋게 돌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성호준이 환한 표정으로 소파를 가리킨다.
“자자. 앉아서 이야기하죠.”
“예.”
그사이 성영준이 대기실에 있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왔다.
내게 음료수를 내민 성호준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화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집중해야 했다.
성호준은 유쾌하고 장난을 잘 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눈치 빠르고 계산적이기도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인사는 이쯤하고 날 보자고 한 이유는 뭡니까?”
“굴렁쇠 엔터로 이적하시면 제가 속한 정 팀으로 와주십시오.”
직설적인 말에 성호준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닙니까?”
어깨를 으쓱하자 성호준이 재차 묻는다.
“제가 김 실장과 계약하기로 한 거 들었을 텐데요?”
“예. 압니다.”
성호준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우리 정 팀장님이 잘 나간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듣긴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옮기자마자 다른 팀으로 옮기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성호준이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진짜 관심이 없었다면 만나주지도 않았을 거다.
현재 난 이영진을 통해 성호준이 우리 회사로 오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TNT 엔터에서 이제껏 성호준에게 골라준 작품들은 그의 급에 비해서는 수준이 낮은 작품들이었다.
성호준은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싶은 욕심에 회사를 옮기려고 하고 있었다.
김동수는 그 점을 노리고 접근해 성호준을 설득했다.
그리고 천재 이한수 감독의 <천벌>의 주연 보장과 함께 막대한 홍보를 약속하며 성호준을 영입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이영진이 성영준을 통해 알아낸 일.
난 그 배경지식을 가지고 성호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밑져야 본전이니 들어나 보시죠.”
“알겠습니다. 한번 말씀해 보시죠.”
난 태블릿으로 미리 정리한 오피스 파일을 열었다.
“이건 성호준 씨의 필모를 보기 좋게 정리한 표입니다.”
태블릿 화면에는 성호준이 출연한 영화와 해당 관객 수가 시간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래프를 보시면 출연작의 관객 수가 여실히 하향세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드라마입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성호준이 출연한 드라마의 제목과 시청률이 나왔다.
사극부터 스릴러까지 폭넓은 연기와 심도 있는 심리 묘사로 최고의 연기자로 평가받지만 갈수록 흥행이 떨어지고 있었다.
성호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잘도 이런 걸 모아뒀군요.”
“현재 성호준 씨에게 필요한 사람은 작품을 보는 눈을 가진 매니저입니다. 그리고 흥행에 관해서는 김 실장님보다 제가 더 낫습니다.”
심지어 미래의 흥행지표를 이 손에 쥐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성호준은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김동수 실장이 몰래 약속한 건을 꺼낸다.
“다음에는 다를 겁니다. 천재라 불리는 이한수 감독님의 천벌이 제 차기작으로 정해져 있으니까요.”
난 태블릿을 내려놓고 성호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 별명이 박수무당이라는 건 아실 겁니다.”
“들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를 알려드리죠. 김 실장님이 잡아주기로 약속한 그 이한수 감독님의 ‘천벌’. 그 영화 폭망할 겁니다. 개. 폭. 망.”
성호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뭐라고요?”
기대하고 있던 차기작이 망한다고 말한 순간 성호준의 씩씩거리기 시작한다.
“천하의 이한수 감독님의 작품이 망한다고요? 개폭망이요? 지금 장난하십니까?”
성호준이 날 거칠게 몰아세우자 성영준이 끼어든다.
“형.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너도 내가 이한수 감독님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그분이 이번 작품을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데. 시나리오도 잘 나왔고!”
“본인의 작품 고르는 선구안에 그렇게 자신이 있었다면 회사를 옮길 생각도 안 하셨겠죠. 솔직히 호준 씨 개인기로 끌고 온 영화나 드라마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호준의 가장 큰 약점은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약하다는 것.
하지만 본인 연기력과 인지도가 뛰어나 망할 드라마나 영화도 어느 정도 본전을 달성하곤 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본인에게는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번 영화 시나리오가 그만큼 엉망이라는 뜻입니까?”
“예. 아쉽게도요.”
단답형의 대답에 성호준이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많은 관계자가 시나리오가 잘 나왔다며 극찬을 했다면서.
하지만 시나리오가 좋다는 건 이한수 감독에게 잘 보이려고 다들 의례 하는 소리였다.
게다가 <천벌>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현재 이한수 감독님이 거느린 스태프들 간에 사이가 심각하게 안 좋은 건 알고 계십니까?”
현재 카메라 감독 구천상의 아내와 제작 실장 정은석이 불륜 관계였다.
영화가 크랭크인 되자마자 터진 그 불륜 사건으로 인해 이한수 감독의 스태프들은 편을 나눠 현장에서 패싸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싸움으로 인해 이한수 감독의 팀은 완전히 찢어지게 된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성호준은 그게 뭐 어떠냐고 말한다.
“일하다 보면 스태프들 사이에 감정이 좀 틀어지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잖습니까?”
“이번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스태프들 간에 상당히 심각한 치정문제가 얽혀있습니다. 게다가 그 스태프들이 꽤 주요한 포지션이고요.”
성호준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성영준에게 묻는다.
“영준아. 너 이한수 감독 스태프들 사이에 문제 있다는 것 들어봤어?”
“아니 난 못 들었는데.”
성호준이 다시 날 쳐다본다.
반신반의.
하지만 의심의 씨앗이 심어지자 천하의 성호준도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일단 정 팀장이 말한 것부터 확인해 보고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요.”
“예. 그렇게 하시죠.”
더 밀어붙여 봤자 부작용만 날 뿐이었기에. 뒤로 살짝 물러났다.
대신 문밖으로 나서기 전 성호준에게 말했다.
“지금 하시는 게임 ‘스타쉽워 2’ 맞죠?”
“예. 혹시 윤호 씨도 이 게임 하십니까?”
“아뇨. 그런데 그 게임. 일주일 후에 서비스 종료할 겁니다. 아이템 사지도 말고 강화도 하지 마세요.”
“예? 그 그게 무슨······.”
난 눈이 휘둥그레진 성호준을 뒤로 남긴 채 유유히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난 문이 닫히자마자 다이어리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그 순간 다이어리의 일정이 지워지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11월 22일]
-PM 12: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성호준 주연의 <천벌>. 박스오피스 70만 명. 스크린 아웃.)
아무래도 성호준이 내게로 오는 때가 빨라질 것 같다.
* * *
“팀장님. 됐습니까?”
이영진이 들뜬 표정으로 묻는다.
“모르지 뭐. 일단 씨는 뿌렸는데 싹이 트나 지켜봐야지.”
“팀장님이 모르면 누가 압니까? 분위기라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괜히 초 치지 말고 전화 오면 내가 연락 올 줄 알았다고 이야기나 잘해.”
“잘 풀렸나 본데요?”
씩 하고 웃으며 대꾸한 뒤 하루의 촬영 상황을 확인했다.
“하루는 문제없지?”
“완전히요.”
“아직 미소는 안 왔고?”
오늘 촬영하는 <먹방의 대가> 3화는 미소가 출연하게 된다.
그런데 아직 현장에 미소가 오지 않고 있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그때였다.
“어. 저기 온다.”
세트장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멜빵바지를 입은 미소가 이태풍의 손을 잡고 나타나고 있었다.
분홍 신발에 레이스 양말 그리고 멜빵바지를 입은 미소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깨금발을 뛰고 있었다.
이제는 연잘 다비드가 된 이태풍이 인자한 표정을 지은 채 미소가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사기네 사기야.”
이영진이 혀를 내두른다.
그냥 웃고만 있는데 사람을 홀릴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 이태풍이다.
거기다 천사 같은 미소와 손을 잡고 있자 그것만으로도 CF 같은 분위기를 풍겨낸다.
그 탓에 스태프들이 저마다 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댄다.
촬영이 중단된 상태라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 소란이 일어날 뻔했다.
두 사람의 뒤로 이대호와 정상봉이 옷과 의상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내 곁으로 다가온 이태풍이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형. 오늘 여기 계셨네요?”
“어. 너랑 미소 나오는 거 보고 가려고.”
미소가 이태풍의 손을 놓고 활짝 웃는다.
“삼촌. 미소 보려고 온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성호준 때문에 온 거였기에 가슴이 약간 찔려온다.
하지만 가끔은 착한 거짓말도 필요한 법.
“당연하지! 우리 미소 보려고 왔지.”
“우와! 진짜요?”
“응. 그런데 우리 미소. 숟가락이랑 젓가락 세트는 가지고 왔어?”
미소가 늘 끼고 다니는 가방을 앞으로 내민다.
“여기! 가지고 왔어요! 나 엄청 많이 먹을 거예요!”
미소가 윙크하며 이쁜 짓을 한다.
<먹방의 대가>는 결국 잘 먹는 게 주요 콘텐츠.
미소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순간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자 그러면 PD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네!”
미소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유현지 PD에게로 향했다.
미소가 방긋 웃으며 인사하자 유현지 PD가 발을 동동 구른다.
“우리 미소. 오늘 잘할 수 있지?”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
곧바로 촬영을 시작한다는 말에 이태풍과 미소 하루가 준비를 마치고 세트장에 들어섰다.
스태프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촬영 준비를 시작한다.
준비가 끝난 순간 유현지 PD가 확성기를 잡고 외쳤다.
“자 씬 30. 레디~ 액션!”
이태풍과 하루 그리고 미소의 첫 번째 합동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먹방의 대가> 촬영 현장.
씬 30은 엄마와 단둘이 사는 옆집 아이 ‘이윤진’이 밥을 안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하루가 집으로 데려와 부침개를 해주는 씬이다.
그리고 삼촌 역을 맡은 이태풍은 오래간만에 회사에서 일찍 돌아왔다는 설정이라 세 사람이 함께 촬영하게 되었다.
촬영이 시작되자 이태풍의 곁에 앉은 미소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다 갑자기 배를 붙잡았다.
꼬르륵하는 소리에 미소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윤진아. 엄마 오기 전에 뭐 좀 먹을래?』
『괘 괜찮아요. 엄마가 남한테 피해 주면 안 된댔어요! 있다가 한 시간 정도면 엄마 올 거예요. 저 그때까지 참을 수 있어요.』
미소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이태풍이 안타까운 눈으로 미소를 쳐다보다 방법을 떠올렸다.
『일식아. 어제 만들어 놓은 부침개 반죽 많~이 있지?』
이태풍이 하루를 쳐다보며 살짝 윙크한다.
하루가 알아들었다며 윙크로 화답했다.
『네. 삼촌. 반죽이 엄~청 많이 남아 있어요. 그거 우리끼리 다 못 먹을 거 같은데 어떻게 하죠?』
『그러게~. 오늘 못 먹으면 싹~ 다 버려야 할 것 같은데······』
순간 미소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머 먹을 거 버리면 벌 받는다고 했는데······. 꿀꺽.』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미소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미소의 연기에 디테일이 살아 넘치자 스태프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세트장으로 나가 ‘우리 미소가 이 정도입니다!’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그러면 우리 윤진이가 조금만 도와줄래? 반죽을 버리면 아깝잖아~.』
이태풍이 미소를 온화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미소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그 그래도 돼요?』
『그러~엄. 윤진이가 도와줘야지 반죽을 안 버린다니까? 그리고 있다가는 엄마 것까지 구워줄게.』
『가 감사합니다!』
엄마 몫도 있다는 말에 미소가 발딱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미소의 얼굴에 어린 걱정과 고뇌가 사라졌다.
미소의 커다란 눈이 반달로 휘어졌고 입은 활짝 벌어져 새하얀 치아를 자랑했다.
미소의 얼굴이 변하는 순간 스태프들 역시 흐뭇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부침개는 제가 구울게요. 삼촌은 윤진이랑 놀아주세요.』
『그래. 알았어. 수고 좀 해.』
하루가 벌떡 일어나 가스레인지로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미소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세트장 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벽에 세워둔 2~3인용 밥상을 붙잡더니 혼자서 거실 한가운데로 옮겼다.
『끄응~차!』
밥상을 거실 한가운데로 끌고 온 미소는 이번엔 상다리를 펼치려 애를 쓰기 시작했다.
이태풍이 슬쩍 도와주자 달칵 소리를 내며 상다리가 펴졌다.
미소는 오른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제가 더 도울 건 없어요?』
『그래. 이제 부침개가 될 때까지 TV나 보면서 좀 쉴까?』
『네~.』
이태풍이 흐뭇하게 웃자 미소가 따라서 배시시 웃는다.
그 순간 주방에 있던 하루도 거실을 쳐다보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세 사람의 웃음이 한 화면에 잡힌 순간 유현지 PD가 외쳤다.
“컷! 오케이~! 이야~ 그림 끝내주는데?”
그 순간 스태프들은 저마다 환호를 터트렸다.
“이야. 다들 연기를 왤케 잘해?”
“살아 있네~ 살아 있어!”
“태풍 씨. 연기 진짜 좋아지셨네요?”
“하루야 난 네 편이다!”
스태프들의 칭찬 릴레이가 이어지자 세 사람이 감사하다며 화답한다.
그때였다.
유현지 PD가 들뜬 표정으로 다급히 조연수 작가를 불러들였다.
“연수야. 여기 좀 와봐.”
“네 감독님.”
태블릿을 들고 있던 조연수 작가가 급히 뛰어간다.
“여기랑 여기 좀 바꿔줘. 미소가 여기에 더 나오면 좋을 거 같지 않아?”
“흐음. 알겠어요.”
조연수 작가는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대본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유현지 PD가 날 부른다.
“정 팀장. 미소가 출연하는 씬을 좀 더 늘리고 싶은데 괜찮아?”
“예. 당연히 괜찮죠.”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자 유현지 PD가 움찔거렸다.
“정 팀장. 부 불안하게 왜 그렇게 웃어?”
난 씨익 웃으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