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화
23. 오늘은 체리블라썸 4
생각보다 인사가 길어져 5분이 넘었다.
마음이 급해진 탓에 우리 대기실까지 달려왔더니 총총걸음으로 맨 뒤에서 쫓아오던 세리가 다리가 아프다며 툴툴거렸다.
“매니저 오빠. 나 다리 찢어졌어요. 햄스트링 금 간 거 같아요!”
햄스트링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다리를 만지작대는데 정작 세리의 손이 마사지하는 곳은 종아리다.
햄스트링 근육의 위치는 거기 아니다 세리야.
“세리야. 거기 햄스트링 근육 있는 데 아냐.”
논리왕 양은비의 말에 세리가 찌릿하고 째려본다.
“나도 알아!”
세리야.
근데 햄스트링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서 왜 손은 무릎 뒤로 가?
“알긴 모르면서~.”
양은비가 씨익 웃자 세리가 화난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른다.
안 찢어졌네 다리.
햄스트링 근육도 안 올라왔고.
“흥! 어 언니는 뭐든 다 알아?”
“아니. 다는 모르지.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다 알아?”
세리가 툴툴댔지만 양은비에게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일단 달래는 게 우선이다.
“세리야. 햄스트링이 어디 있는지 뭐가 중요해. 붙어만 있음 되지. 어쨌건 나중에 바르는 파스 사다 줄게. 어서 들어가자.”
“그쵸? 잘 붙어 있기만 하면 되지. 그리고 파스는 냄새 안 나는 거로 사 주세요!”
“오케이.”
세리가 자기편을 만났다는 듯 반색했다.
양은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면 이젠 그러려니 하는 눈치다.
일단은 방송국에서 거의 유일한 안식처인 대기실에 도착했으니 이젠 안심이다.
“얘들아 나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 말하고 잠깐 자리를 비우려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며 쫙 빠진 정장에 24K 금목걸이를 한 가수 매니지먼트 2실의 이동민 실장이 들어왔다.
“어? 이 실장님. 오셨어요?”
“우리 실장님이다~.”
“하하. 그래그래. 다들 고생 많지?”
“아니에요. 실장님.”
이동민 실장은 체리블라썸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격하게 인사를 나눴다.
한땐 유명한 프로듀서였었지만 지금은 현업에서 손을 떼고 관리자의 역할만 하는 중이다.
“실장님. 오셨습니까?”
세리와 손을 맞잡고 장난을 치던 이동민 실장이 내 인사에 고개를 돌렸다.
“오우. 오늘 배우 2실에서 한 명 차출되어 온다더니 그게 정 스타였어? 수고 많네. 우리 애들이 귀찮게는 안 하지?”
이동민 실장이 찡긋 윙크하며 말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 회사 내에 이동민 실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기. 실장님. 저 잠깐 자리 좀 비워도 되겠습니까?”
곤란한 표정을 지었더니 이동민 실장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급한가 보네. 다녀와.”
“예. 감사합니다.”
이동민 실장에게 인사를 꾸벅 한 나는 급히 최은혁 PD가 있는 비상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 * *
“최 PD님. 저희 플로렌이 그 빈 자리 바로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 애들이 ‘라디오빅잼’에 나와서 블링블링 추는 거 최 PD님도 보셨잖습니까? 그때 반응 진짜 좋았는데. 기억나시죠?”
“하긴 플로렌 멤버들이 팔다리가 길다 보니 춤 선이 좋은 편이죠.”
조심스레 문을 살짝 열자 다행히 아직 두 사람이 대화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CNS 엔터를 대표하는 걸그룹 플로렌은 전원이 170cm가 넘는 장신으로 구성된 팀이라 퍼포먼스가 좋기로 유명했다.
거기다 MBS의 예능 ‘라디오빅잼’에서 블링블링의 안무를 직접 선보인 일도 있었고.
일주일 뒤에 플로렌의 학폭 사건이 터진다고 해도 그건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아니다.
강희동 팀장의 거듭되는 설득에 최은혁 PD도 마음도 점점 저쪽으로 기우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래서 타이밍이 중요하다.
하지만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손에 땀을 쥐고 있는데 최은혁 PD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일단 긍정적으로 고려해 두고 있을 테니까 제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되면 바로 전화 주세요.”
“회사에 연락해서 두 시간 이내 아니 한 시간 이내로 답변드리겠습니다.”
강희동 팀장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럼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제의?
그렇다면 조건이 있다는 소린데?
최은혁 PD는 이미 출세 루트를 탄 사람이니 뇌물과 상납을 받아 자기 커리어를 망칠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섭외 요청일 가능성이 크다.
그 순간 최은혁 PD의 프로그램 몇 개가 떠올랐다.
현재 KBC 음악방송인 뮤직스테이지 PD이기도 한 그는 다음 달부턴 예능프로에도 손을 댄다.
잠깐.
그렇다면······
난 빠르게 다이어리를 확인해 최은혁 PD가 맡은 예능프로의 시청률을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4월 24일]
-PM 10:05 KBC 음악나라 첫 방송 시청률 9.5%
있었네.
지금만큼 다이어리에 온갖 프로의 시청률을 적어 놓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 때가 없었다.
금요일 밤 예능으로 첫 방송이 9.5%라면 대성공급이다.
게스트로 늘 걸그룹 한 팀이 출연했으니 아마 지금 거기 출연할 걸그룹을 영입하는 중일 거다.
본인으로선 불확실한 프로의 시청률을 띄우기 위해 내건 조건이지만 내가 먼저 제안해야 할 정도로 좋은 제안이다.
무조건 한다.
그렇게 결정하고 최은혁 PD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강희동 팀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자 최은혁 PD는 담배를 끄고 복도로 들어왔다.
난 입구에서 살짝 물러난 뒤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끼이익.
대기실 복도 쪽 문이 열리는 순간.
난 최대한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최은혁 PD님. 굴렁쇠 엔터의 체리블라썸 예쁘게 봐 주십시오.”
“아. 예. 지금은 내가 좀 바빠서.”
귀찮은 듯 지나가려는 최은혁 PD는 대화 자체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최은혁 PD가 이동민 실장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는 기억이 아슬아슬하게 떠올랐다.
뭐든 관심부터 붙잡는 게 우선.
난 이동민 실장의 이름을 팔았다.
“이동민 실장님께 PD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나가려던 최은혁 PD가 발걸음을 멈췄다.
“동민이 형한테요?”
통했다.
그런데 동민이 형?
그 정도로 친한가?
그것까진 몰랐었지만 난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이동민 실장님께서 최은혁 PD님 만나면 각별하게 신경 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동민의 이름을 계속 대며 말하자 최은혁이 피식 웃는다.
“동민이 형이 그렇게 좋은 말을 해 줄 사람이 아닌데. 욕은 안 하시던가요?”
“전혀요. 이동민 실장님이 어디 그러실 분입니까?”
“하긴 그러고 보니 동민이 형 본 지도 꽤 된 것 같네. 요즘 전화해도 연락도 잘 안 받던데······”
조금 전 만났을 땐 시간 남아도는 한량처럼 보였긴 했지만 시치미를 뚝 뗐다.
분위기가 좋았기에 간단한 인사 뒤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최 PD님. 그런데······ 죄송스럽게도 강희동 팀장님과 대화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웃고 있던 최은혁 PD의 얼굴이 언짢은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 내가 입조심 좀 해야지. 내 실수니까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말고 잊어 주세요. 부탁 좀 합시다.”
괜한 말실수를 했다는 듯 인상을 쓰기에 난 죄송하단 말보단 폰을 내밀었다.
“최 PD님. 결원 생긴 자리에 저희 체리블라썸도 한번 고려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허리를 굽힌 난 녹화 된 동영상을 전체화면으로 틀었다.
밝기는 최대로 음향은 조용히 말이다.
“블링블링~.”
스마트폰 화면에서 칼군무를 추는 체리블라썸의 움직임이 나오고 있었다.
영상을 본 최은혁 PD의 얼굴이 진중하게 변했다.
그의 눈은 한참 동안 내 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 디스크 올 것 같다.
잠시 후 동영상의 재생이 끝났다.
“허! 체리블라썸이 이렇게까지 잘했었나?”
최은혁 PD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자 난 욱신거리는 허리를 폈다.
허리는 아프지만 얼굴은 밝게!
“이건 리허설에 불과합니다. 조금만 몸이 풀리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일단 올려만 주시면 아이렌이 빠진 빈자리 확실히 채우겠습니다.”
이럴 때는 자신감을 어필해야지 쓸데없는 겸손을 떨 때가 아니다.
최은혁 PD가 조금 전 들어왔던 복도 쪽 비상구를 힐끗 돌아보기 시작했다.
강희동 팀장이 오기라도 하나 살피는 눈치다.
“음. 그쪽 말도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먼저 제의를 주신 분 체면도 있어서 좀······”
입맛을 다시는 최은혁 PD의 얼굴에는 고민이 역력했다.
내게도 뭔가를 바라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짐작만 할 뿐.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최은혁 PD의 입이 어렵게 열렸다.
“이렇게 합시다. 저기 사실은 내가 프로 하나를 준비 중인데······”
내 생각이 맞았다.
* * *
아이돌 그룹 하나를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곡과 춤 즉 컨텐츠 제작비용을 제외하더라도 걸그룹 한 팀을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트레이닝 코스에 샵에 피부과에 무대에 세우기 위해 들어가는 부가 인력들까지.
최소 인원인 4인조만 유지하려고 해도 한 달에 최소 5천만 원은 깨진다.
이런 상황인데도 작은 회사들까지 아이돌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한 곡만 뜨면 투자 비용의 수십 배를 벌어들이는 고부가가치 사업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 번 터지면?
빌딩 하나 세우는 건 문제도 아니다.
다시 말해 로또나 다름없다.
물론 그렇게 뛰어든 이들은 대성공은커녕 적자를 메꾸기 바쁜 게 이 판의 현실이다.
그런데 최은혁 PD는 하루를 통째로 비워달란 제안을 해 왔다.
행사를 뛰고 적자 줄이기에 바쁜 아이돌 그룹이 정기 일정에 묶인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껄끄러운 일이다.
거기다 뜰지 안 뜰지도 모르는 프로에 말이다.
“명색이 내가 음방 PD인데 솔직한 말로 아무 애들이나 쓰면 왜 못 채우겠습니까? 그래도 체리블라썸 정도면 내 기준은 넘으니까 이런 제한하는 거예요. 어때요? 반년 고정 출연 약속만 해 주면 바로 무대 세워주죠.”
곧장 ‘네’라고 답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건 내 결정 사항이 아니다.
“회사와 상의하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1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깐만요. 팀장이 그 정도 확정 지을 결정권도 없어요?”
인상을 찌푸린 최은혁 PD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정장을 입고 있다 보니 팀장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근데 말이 다르잖아.
아깐 강희동 팀장한테는 기다려 준다면서?
난 그제야 명함을 내밀며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 매니저입니다.”
“으흠······”
내 명함을 건네받은 최은혁 PD가 명함과 내 얼굴을 오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설마?”
“예. 1년 찹니다.”
최은혁 PD가 내 말에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무슨 1년 차가 이렇게 당돌해? 아 진짜 이걸 어쩐다······”
체리블라썸이 눈에 차지 않았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거다.
그냥 욕이나 한 바가지 퍼부었겠지.
물론 그땐 나도 방법을 달리했을 거고.
난 고민하는 최은역 PD에게 다시 한번 이동민 실장의 이름을 팔았다.
“최 PD님. 이동민 실장님이 지금 대기실에 와 계십니다.”
그제야 최은혁 PD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하하하. 이 친구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하네. 근데 저기 지금은 무대 준비 상황을 봐야 하니까 30분 뒤에 B 섹터에서 보자고 전해 줘요.”
최은혁 PD의 전화기는 아까 전부터 그를 찾는 연락으로 불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이동민 실장을 설득할 시간이 생겼다.
“예. 곧 뵙겠습니다.”
최은혁 PD가 사라진 후 난 이동민 실장을 설득하기 위해 대기실로 향했다.
* * *
“······고정이라고?”
대기실에 애들을 놓아두고 나와 이동민 실장과 구명호 팀장은 복도로 나와 대책을 상의하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예. 저도 고작 백스테이지에 세워 주는 조건으로 돈 안 되는 고정을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체리블라썸은 지방 행사 말고는 특별한 스케줄이 없잖습니까? KBC 예능에 고정으로 들어가면 인지도가 올라갈 테니 행사 페이도 늘어날 거고요.”
미래를 모르는 이들에게 프로가 성공한단 보장은 터무니없는 이야길 거다.
차라리 인지도가 올라가서 페이가 늘어간단 말이 더 먹히는 설득이다.
간곡한 내 부탁에 이동민 실장이 한명호 팀장을 보며 물었다.
“한 팀장. 윤호 말 어떻게 생각해?”
순간 한명호 팀장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