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9화
229. 추수 2
이말순 선생님이 날 가수 1실로 데려오라는 말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나 역시 조금은 놀랐다.
비록 내가 슬그머니 손을 쓰긴 했어도 이말순 선생님이 그 정도로 날 필요로 할 줄은 몰랐으니까.
이말순 선생님의 고함에 차상진 실장이 말을 버벅거린다.
“예? 그게 무슨······”
“왜? 다 해 준다며? 내가 바라는 게 그건데 그럴 수 있어? 그게 되면 내가 1실에 남을게.”
이말순 선생님이 직설적으로 요구 사항을 말했지만 차상진 실장은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아~. 선생님. 불만이 있으시면 그냥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정 팀장이 그딴 도시락이랑 굿즈를 기획해 줬다고 이러시는 게 전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때였다.
이말순 선생님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핸드백을 회의실 테이블이 내리쳤다.
캉!
핸드백의 징이 테이블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음을 낸다.
“그딴 도시락? 그딴 굿즈? 차 실장 말 심하게 하네 고작 그딴 것들 덕분에 콘서트에 온 내 팬들이 얼마나 좋아한 줄 알아?”
이말순 선생님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차상진 실장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서 선생님······.”
간단한 편지를 넣은 품질 좋은 도시락.
그리고 비싸지 않은 굿즈.
팬들은 이말순 선생님이 제공한 이번 이벤트에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대체 매니저가 뭐야? 연예인인 내가 최소한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게 도와줘야 하는 거잖아. 안 그래?”
그제야 차상진 실장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말순 선생님이 회의실 모두를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난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어. 하지만 이 기분을 계속 느끼려면 지금처럼 그딴 것이라고 말하는 변화가 필요해. 그 변화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정 팀장이고.”
이말순 선생님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회의실에는 헛기침만 나올 뿐이었다.
이말순 선생님이 차상진 실장을 쳐다본다.
“차 실장. 그동안 고생한 건 알지만 우린 여기까지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더 잘할 테니까······.”
그러나 그 순간.
이말순 선생님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충분히 설명했고 충분히 설득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차 실장. 자기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지?”
차상진 실장이 상황을 끌자 이말순 선생님은 30년의 포스를 뿜어내며 이기철 이사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기철 씨. 나 불편해. 이런 이야기 계속 듣고 있어야 해?”
이기철 이사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괜히 여기까지 발걸음 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기철 이사가 사과까지 하자 이말순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양 팀장도 같이 실을 옮길 예정입니까?”
“당연하지. 왜? 안 돼?”
여기서 안 된다는 말이 나오면 회사를 떠나고도 남을 사람이 바로 이말순 선생님이다.
순간 이기철 이사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아닙니다. 그저 확인차 여쭌 겁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고마워 기철 씨.”
그제야 이말순 선생님의 얼굴이 펴졌다.
그런데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갈 줄 알았던 이말순 선생님이 날 쳐다본다.
“정 팀장.”
“예. 선생님.”
“내가 성격이 급해서 먼저 지른 거 미안해. 정 팀장이 영문도 모르고 닦달당했다며?”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이말순 선생님이 빙긋이 웃는다.
순간 점수를 더 딸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그리고 선생님.”
“응?”
“오지랖일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 말해봐.”
“다음번 디너쇼에서는 ‘사연 추첨’을 통해 무대에 팬들을 한번 세워주십시오.”
이말순 선생님은 팬과의 소통이 미흡하다.
노래야 자타가 알아주는 실력파지만 옛날 가수답게 팬들에게 신비롭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수.
하지만 더는 그러면 안 된다.
곧 오디션 방송 붐을 타고 치고 올라올 젊은 트로트 가수들과 경쟁하려면 팬들과 소통은 필수였다.
시대에 뒤처진 대중문화 예술가는 그저 도태될 뿐이니까.
“사연 추첨?”
“예. 선생님과 무대 위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팬분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매번 한 자리 정도는 돈이 없어 디너쇼에 못 오는 분들을 위해 이벤트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기부 차원에서요.”
그 순간 이말순 선생님이 속이 시원하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이말순 선생님이 가까스로 웃음을 그쳤다.
“정 팀장. 앞으로도 지금처럼 생각나는 건 뭐든 말해. 알았지?”
“그러면 제가 말씀드린 건······.”
“해야지. 이 판에서 30년을 살아남으면서 깨달은 건 하나야.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다만 나이가 들수록 변화가 두렵더라고. 그러니까 정 팀장은 지금처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야기해 줘. 그럼 내가 따라갈게. 알았지?”
“예. 선생님.”
순간 회의실에 술렁이는 소란이 일었다.
그 까다로운 이말순 선생님이 이렇게 쉽게 수락을 할지 몰랐다는 표정이다.
이말순 선생님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나 먼저 나갈게. 다들 수고해.”
이말순 선생님은 양홍석 팀장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섰다.
차상진 실장이 새하얗게 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망했다는 표정이다.
그와 동시에 가수 1실의 분위기는 바닥을 찍었다.
골든로드에 이어 이말순 선생님까지 잃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동민 실장과 가수 2실 멤버들은 의기양양했다.
체리블라썸은 골든로드의 위치를 완전히 대체했고 이말순 선생님까지 관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난 그 틈을 타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 순간.
다이어리에 남아 있던 차상진 실장에 관한 일정들이 모두 사라지는 게 보였다.
‘설마 차 실장이 잘리는 건가?’
하긴 생각해 보면 골든로드의 스캔들 사건과 이말순 선생님의 소속 변경까지.
이 두 가지 사건만으로도 차상진 실장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자리를 지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나 할 무렵 강지영 본부장이 이기철 이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사님.”
“왜?”
“약속은 지키셔야죠.”
“무 무슨 약속?”
이미 끝난 일로 왜 그러냐는 말에 강지영 본부장이 싸늘한 표정으로 웃는다.
“실망이네요. 전 이사님이 약속은 지킬 줄 알았는데.”
강지영 본부장이 말하는 건 유진이와 약속한 것.
날 함부로 의심한 것에 관해 사과하겠다는 약속과 두 번 다시는 확실하지 않은 일로 날 멋대로 찾지 말라는 약속.
강지영 본부장은 부하직원들이 다 있는 전체 회의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약속을 이행하라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하라고?”
“예.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끄응······.”
미간을 와락 찌푸리던 이기철 이사가 날 향해 힘겹게 입을 연다.
“정 팀장.”
“예.”
“내가 이번 일의 전후를 확인도 안 하고 의심해서 일을 키웠어. 미안하게 됐네. 내가 사과······하지.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걸세.”
평소와는 달리 유달리 작은 목소리지만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회귀 전을 포함해 처음으로 받는 이기철 이사의 사과.
덕분에 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누른 채 덤덤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조심 좀 해주십시오. 이사님.”
순간 이기철 이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팀장과 실장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날 보는 시선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누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누구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예종 라인의 최고참이 고작 2년 차가 된 경쟁 라인의 막내에게 고개를 숙인 셈이었으니까.
김동수는 분한 눈빛으로 날 빤히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덤덤한 표정으로 그의 눈길을 받아넘겼다.
‘서예종 라인에 금가는 소리 들리지? 김동수?’
김동수가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린 순간 회의는 그대로 마무리되어 버렸다.
서예종 라인의 체면에 큰 상처를 남기고서 말이다.
* * *
새벽 회의를 마친 나는 곧바로 일산 TVM 으로 이동했다.
TVM 세트장에서는 이미 <먹방의 대가> 촬영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나는 모니터링에 열중하고 있던 이영진을 불렀다.
“왜 하필 TVM에서 호준 형이랑 만날 약속을 잡은 건데?”
“지금 호준 형도 TVM 드라마 촬영 중이잖아. 영웅의 탄생. 몰라?”
김동수가 스카우트 한 성호준은 현재 TVM에서 방송 중인 시청률 10.3%인 <영웅의 탄생>을 촬영 중이다.
그런데 오늘 바로 옆 세트장에서 촬영이 잡혔단다.
이영진은 내가 성호준을 만난다는 소문이 나지 않게 대기실에서 미팅 약속을 잡았고.
“이야 우리 영진이. 일하는 것 좀 봐라.”
이영진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 정도면 나도 대리 달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호준 형을 우리 팀으로 데리고 오면 그때 고려해 볼게.”
이영진이 뱁새눈을 하고 정색한다.
“그건 팀장님이 처리하셔야 할 문제 아닙니까?”
“갑자기 왜 높임말?”
“생각해 보니 업무시간이더라고요.”
삐졌네 삐졌어.
난 피식 웃으며 이영진에게 말했다.
“‘먹방의 대가’가 끝날 때 즈음해서 승진 요청 올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제야 이영진의 얼굴이 환해진다.
“예! 팀장님!”
그사이 메이크업을 마치고 나온 하루와 눈이 마주쳤다.
“하루야. 오늘도 파이팅!”
“예. 형.”
하루가 씩씩한 표정으로 대답한 뒤 자취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세트장으로 향했다.
세트장에 선 하루가 신호를 보냈다.
“준비됐어요. 감독님.”
카메라 앞에 선 순간 촬영 모드로 들어가는 하루의 모습에 스태프들이 혀를 내두른다.
“쟤는 아주 연기가 체질이야.”
“빠릿빠릿하고 NG도 없고.”
“덕분에 평소보다 촬영 속도가 20%는 더 나오는 중이라던데?”
“하여간 정 팀장도 저런 애를 어디서 데리고 와서······.”
연신 칭찬 소리가 울리자 괜히 내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자. 조용히 하고. 바로 슛 들어갑니다. 씬 30~ 레디~ 액션!”
유현지 PD가 확성기를 잡고 외치자 하루가 기지개를 켜며 연기를 시작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과 발성에 걱정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덕분에 난 이영진에게 현장을 맡겨 두고 TVM의 대기실로 향했다.
김동수가 데려오려는 성호준을 낚아채기 위해서.
* * *
TVM의 대기실.
제작 스태프들의 눈을 최대한 피해 성호준의 대기실로 향했다.
똑똑.
“누구세요?”
“정윤호입니다.”
말없이 달칵하고 문이 열리더니 성호준의 매니저이자 동생인 성영준이 낮은 저음으로 날 반겼다.
“사람들 보기 전에 빨리 들어오세요.”
명함을 나눌 겨를도 없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 안에는 호리호리한 체형인 성호준이 대기실 소파에 앉아 모바일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성호준은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은 채 흥얼거리며 다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성영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형. 정 팀장님 오셨어.”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어 성호준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성영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가려는 순간 난 성영준을 붙잡았다.
“예?”
“잠깐 기다리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손님을 모셔 놓고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금방 끝나잖습니까?”
성호준은 회귀 전에도 모바일 게임을 즐겨 했었다.
원래는 RPG 게임광이었지만 촬영 때문에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현장에서도 즐길 수 있는 모바일 게임으로 바꿨다.
성영준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눴다.
“영진이 형이 정 팀장님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요즘 활약이 대단하시다고.”
“활약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에이 아니긴요. 우리 회사 매니저들 사이에서도 정 팀장님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난 성영준과 통성명을 하며 슬그머니 운동 이야기를 꺼냈다.
같은 운동선수 출신이다 보니 꽤 통하는 게 있어 이야기가 시원시원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게임을 끝낸 성호준이 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준이 형. 오랜만이네?’
까다롭지만 자기 관리가 철두철미한 사람.
비즈니스로 얽힌 관계가 아니라면 때로는 크게 베풀 줄도 알던 사람.
그리고 나와는 꽤 친했던 호준이 형이었다.
너무도 반가운 내심을 감추며 심호흡한 뒤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정윤호라고 합니다.”
그 순간 성호준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제가 게임을 끝내길 기다리고 있던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