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7화
227. 기회 2
회귀 전 예뜨랑의 주식은 상장 후 1년도 가기 전에 20배가량이 올랐었다.
그런데 안석훈 대표는 그런 주식을 현금 대신 광고 계약금으로 지불하면 안 되겠냐고 묻고 있었다.
신규 화장품 생산라인을 증설해서 현금이 부족하다면서 말이다.
무조건 받아야 하는 제안이다.
하지만 강지영 본부장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현물을 제의하시는 광고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굴렁쇠는 그런 제의를 승낙한 적이 없습니다 대표님.”
“곤란한 제의라는 건 저희도 압니다. 하지만 자금 사정이 풀리는 다음 달까지 기다리면 절호의 기회를 놓칠 것 같아 그렇습니다.”
안석훈 대표의 설득에도 강지영 본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강지영 본부장을 설득할까 고민하는 사이 유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대표님.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뭐든 물어보십시오.”
“브랜드 이름은 뭔가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안석훈 대표가 신상 브랜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제품은 미소(美笑)라는 이름으로 출시할 계획입니다. 피부가 예민한 여성도 쓸 수 있는 제품으로 UV 차단을 기본으로 피부 보습과 재생 효과를 갖추고 있는 기능성 제품입니다.”
‘예뜨랑에서 벌써 기능성 제품군을 만들었군.’
회귀 전 기능성 제품군의 이름은 안석훈 대표의 둘째 딸 ‘다연’의 이름을 붙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소의 이름을 붙여 발매하려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예뜨랑의 기능성 화장품은 뛰어난 품질로 유명했다.
그리고 차후에는 세계 유수의 학자들을 동원해 그 효과의 우수함을 증명하기도 했고.
예뜨랑의 성장 속도가 빨라졌다는 걸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유진이는 미소라는 이름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브랜드가 저희 미소 이름이랑 같네요?”
“예. 안 그래도 코카리스웨트 광고에서 나온 유진 씨와 미소 양을 미소를 보고 브랜드명을 떠올렸습니다.”
화장품 브랜드 미소(美笑).
아름답게 웃는다는 뜻을 가진 브랜드명은 미소의 한자 이름과 같은 한자를 붙였다.
미소의 이름은 한글로 읽을 때는 미소(媚笑)란 뜻을 가지지만 한자로는 미소(美笑)를 쓴다.
예쁘게 크고 웃음 가득한 아이로 자라길 바라며 지은 미소의 이름은 유진이의 언니가 지은 이름.
그런데 마치 운명처럼 안석훈 대표가 브랜드명을 미소(美笑)로 지었다.
유진이가 날 쳐다본다.
“오빠. 이 광고는 돈을 떠나서 해 보고 싶어요. 주식으로 지불 하시는 걸 제가 다 떠안으면 안 돼요?”
유진이를 어떻게 설득할까 하는 고민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요즘 예뜨랑이 잘 나가니까 주식으로 받아도 절대 손해는 안 볼 거야. 장담해!”
손해가 아니라 수십 배는 뛸 거라는 말을 가까스로 참았다.
유진이가 안도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럼 저 이 계약은 무조건 하고 싶어요. 세리가 준 예뜨랑 제품 사용해 봤는데 진짜 좋았거든요. 새 화장품도 왠지 잘될 거 같아요. 이름도 좋고요.”
제품이 좋다는 칭찬에 안석훈 대표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유진 씨. 정 팀장님 말대로 저희 주식을 가지고 계시면 절대 손해는 안 보실 겁니다!”
배우 본인이 하겠다고 하니 강지영 본부장도 알겠다며 허락했다.
현물을 받기 꺼리는 회사의 부담을 유진이가 모두 떠안았으니까.
“배우가 원하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저희도 그런 조건이라면 불만이 없어요.”
그때부터는 곽무혁 법무팀장과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현금 분 1억을 회사에 넘기고 나머지 2억에 해당하는 주식은 유진이가 받는 식으로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그제야 안석훈 대표가 환한 표정으로 웃는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진 씨.”
“저야말로요. 우리 미소 화장품 꼭 성공시켜주세요.”
어려웠던 문제가 단숨에 풀려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안석훈 대표와 동행한 동생 안명훈 홍보 이사가 날 쳐다본다.
“정 팀장님. 차후 저희가 언론 대응을 할 때 유진 씨가 저희 회사에 투자했다는 사실을 알려도 괜찮으십니까?”
모델 제의를 받다 보면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
회사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연예인에게 주식을 증여하고 그 사실을 은근히 퍼트리는 방법.
여의도에 떠도는 증권사 찌라시에 회사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것만으로도 개미들이 주식을 매입해 주가가 올라가는 효과가 있었다.
슬쩍 강지영 본부장을 쳐다보자 알아서 하라는 사인이 왔다.
난 안명훈 홍보 이사에게 조건부 찬성의 뜻을 밝혔다.
“현재 진행 중인 드라마가 공개된 후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계약서에 그 항목을 추가하도록 하지요. 상장에 대비해서 저희도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요.”
그 순간 자연스레 상장 시기를 물을 기회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언제 주식을 사야 하는지 알 기회이기도 했었고.
“안 이사님. 실례가 아니라면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희도 미리 언론 대응도 해야 할 테니까요.”
“상장 시기는 이번 미소(美笑) 브랜드의 성공 여부에 달렸습니다. 사실 틴용 화장품인 ‘예지’ 라인은 마진이 작아서 유명세에 비해 큰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거든요. 우리 형님이 아이들이 쓸 건 싸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도 고집을 부리셔서······.”
아무래도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회귀 전 예뜨랑의 기능성 제품은 없어서 못 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현금이 씨가 말랐으면 이참에 나한테도 주식을 좀 팔라고 해 볼까?’
당장 현금이 부족한 예뜨랑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1억도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든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마치 내 속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안명훈 홍보 이사가 제안을 해왔다.
“정 팀장님.”
“예.”
“혹시 저희 주식을 매입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수십 배나 뛰는 주식을 상장 전에 살 기회가 내게도 저절로 굴러왔다.
게다가 지금 주식을 사게 되면 상장 직후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수익을 노릴 수도 있었다.
덥석 수락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대답을 참고 물었다.
“왜······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아 혹시 내키지 않으시면······.”
“아닙니다. 제 통장에 있는 1억을 다 부어서라도 사고 싶습니다. 단지 갑자기 왜 제게 그런 제의를 하신 건지 궁금할 뿐입니다.”
안석훈 대표가 빙긋이 웃는다.
“지난번 체리블라썸에 이어서 이번 유진 씨의 광고 계약도 정 팀장님이 저희 회사를 좋게 봐주셔서 성사된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신경 써주신 데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안석훈 대표는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내 덕에 회사가 성장했으니 그 대가로 주식 매입 기회를 주겠다는 거였다.
“상장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주식을 팔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정 팀장님이랑 체리블라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순전한 호의.
그렇다면 대환영이다.
난 안석훈 대표에게 감사를 표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건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였으니까.
“감사합니다. 그 제안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다행입니다. 아 그리고 살 수 있는 주식은 말씀하신 대로 1억까지도 가능합니다. 주당 가격은 5천 원인데 괜찮으십니까?”
“예.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1억 원까지 매입하겠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지금은 1억이라지만 실상 수십억은 나가는 주식이었으니까.
우리 둘의 대화가 끝나자 곽무혁 법무팀장이 유진이의 광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자 여기에 사인 하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유진이와 안석훈 대표가 각각 사인을 하며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난 일주일 뒤에 따로 만나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약속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 팀장님.”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광고 계약을 마친 안석훈 대표와 안명훈 홍보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면 정 팀장님은 나중에 따로 회사에서 뵙고 사인 하시죠.”
“예. 대표님.”
체리블라썸을 광고 모델로 소개해준 덕에 생각지도 못하게 예뜨랑의 주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 * *
안석훈 대표 형제를 배웅하고 본부장실로 올라왔다.
소파에 앉자 강지영 본부장이 혀를 내두른다.
“두 사람. 진짜 깡 좋다. 휴짓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주식을 받고도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싱글벙글해요?”
유진이가 빙긋 웃는다.
“그 돈이 몇 배로 더 뛸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그동안 윤호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해서 실패를 한 적이 없거든요.”
강지영 본부장이 씨익 웃는다.
“아 그러면 회사가 현금이 아니라 주식으로 받았어야 했었네요.”
“이미 늦었어요. 본부장님.”
강지영 본부장이 이번엔 날 쳐다본다.
“그런데 우리 정 팀장님은 1억을 주식으로 바꾸면 남는 돈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올해 말에 보너스 들어오잖습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하긴 팀 수익 배분받는 게 있었죠? 그러면 예뜨랑 주식 대박 나면 밥이나 한 끼 사 주세요.”
“당연히 사드려······.”
그런데 그 순간 유진이가 내 말을 끊으며 나섰다.
“밥은 제가 사 드릴게요.”
“유진 씨가요?”
“늘 회사에서 도움을 받긴 했는데 본부장님한테 해드린 게 없는 거 같아서요. 앞으로는 종종 살게요.”
강지영 본부장이 씨익 웃는다.
“왜 해 준 게 없어요. 유진 씨가 이렇게 광고도 따오고 저번에 미소 어묵 건도 그렇고. 회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데요?”
“그래도요. 제가 그렇게 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두 사람 다 분명히 웃고 있는 표정인데 진짜 웃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지 이 상황?’
잘은 모르겠지만 빨리 분위기를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부장님. 유진이 홍보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신의 이름으로>의 첫 방송까지는 대략 10일.
그제야 고개를 돌린 강지영 본부장이 미소를 짓는다.
“홍보팀장이랑 같이 전 언론사 편집장들 싹 다 만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돈의 축제’에 이길 자신 있어요?”
슬쩍 떠보듯 묻는 강지영 본부의 말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이야~ .그러면 올해 유진 씨. 상 복 터지겠는데요?”
“당연히 최소 2개 정도는 가져와야죠.”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에 환하게 빛이 나기 시작한다.
“아 맞다. 그리고 진유정 여사님은 잘 챙겨 드리고 있으세요?”
구성철 실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결재를 한 터라 강지영 본부장은 유진이가 진유정 여사란 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강지영 본부장에게는 말할까 고민할 때였다.
갑작스레 이기철 이사가 본부장실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강지영 본부장! 자네 나하고 끝까지 가 보자는 건가?”
뜬금없는 이기철 이사의 고함에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두서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이말순 선생님이 가수 2실로 옮기겠다고 통보를 해왔어! 자기 요청을 안 들어주면 재계약도 없다면서 말이야! 이게 정윤호 이놈과 자네가 획책한 일이 아니면 뭔가?”
이말순 여사는 내가 이벤트 건으로 조언을 했던 인기 트로트 가수.
그런데 그녀가 2실로 담당을 옮겨달라고 했단다.
이기철 이사가 씩씩거리며 내게도 소리를 내질렀다.
“정윤호! 너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순간 난 다이어리에 있었던 일정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그날인가?’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7월 17일]
-PM 03:00 (회의 사항) 이말순 12집 <누나 한번 믿어봐!> 대박 행진. 디너쇼 매진. 스케줄 회의. 가수 1실 회의실.
이말순 여사가 갑작스럽게 그런 요청을 했다면 어젯밤에 있었던 디너쇼 매진 사태가 이 일의 원인일 터.
회귀 전 이말순 선생님은 한동안 디너쇼 예매율이 50%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최근 발매한 신곡으로 인해 다시 인기를 얻으며 일정 조정 회의를 열었었다.
그런데 바로 그 회의에서 이말순 선생님이 담당실의 변경 요청을 했단다.
가수 2실로 옮겨달라고.
그것도 내 이름을 거론하면서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넘어오시네.’
이기철 이사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외친다.
“정윤호! 대답 안 해? 네가 이말순 선생님을 꼬드긴 거 맞지? 응?”
이벤트 제안 건으로 양홍석 팀장을 만나기는 했어도 이말순 선생님과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다.
다만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
내 생각보다는 훨씬 빨랐지만 말이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으신데 이말순 선생님을 만나 뵌 적조차 없습니다. 당연히 실을 옮기니 마니 하는 권유를 한 적도 없고요.”
강지영 본부장 역시 이기철 이사를 말리고 나섰다.
“이사님. 다짜고짜 이렇게 몰아붙이시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은데 진정 좀 하시죠?”
“이 자식이 이렇게 은근슬쩍 수를 쓴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내가 이번은 절대로 못 넘어가니까 그렇게 알아!”
강지영 본부장이 미간을 찌푸린다.
“정 팀장이 수를 썼다는 증거라도 있으세요?”
“지금 내 앞에서 이 자식을 두둔하는 거야?”
“두둔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잖아요!”
“증거가 뭐가 필요해. 정황이라는 게 있는데!”
증거야 없을 수밖에 없다.
뭘 했어야 증거가 있지.
하지만 이제 1년 차도 아니고 팀장도 되었는데 더는 이런 대우를 참을 생각은 없었다.
난 이기철 이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사님. 증거도 없이 몰아세우는 건 좀 너무하신 것 같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예?”
날 선 내 목소리에 이기철 이사가 당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