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5화
225. 재능이란
강은기를 구한 다음 날.
건강검진을 끝낸 엄마는 의사에게 잔뜩 잔소리를 들었다.
위에 염증이 많으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지금부터 식단 관리 잘하고 음식을 잘 먹어야 한다고.
덕분에 곁에서 함께 결과를 듣던 이연실이 쌍심지를 켜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엄마! 이제부터 엄마 식단은 내가 관리할 거야.”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삼시 세끼 제때 드시고 스트레스 안 받게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그리고 위궤양이 생겼다가 나았다가 하는 게 반복되면 위암이 될 수도 있어요. 일단 오늘은 헬리코박터 치료부터 시작하죠.”
위내시경으로만 봐도 나오는 내용이었기에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오는 일주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이연실은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해댔고 엄마는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엄마에 관한 다이어리의 일정이 삭제되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4년 11월 11일]
-PM 01: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성모병원 장례식장 1층. 미카엘라 수녀님. 그리고 나의 엄마. 영면.)
‘설마 강은기가 키였어?’
강은기를 구한 덕에 곁에서 잔소리해 줄 연실이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덕분에 그토록 막고 싶었던 엄마의 죽음마저 막을 수가 있게 되었다.
얽혀 있는 운명의 실타래가 풀리는 순간 내가 가장 후회했던 일 또한 사라졌다.
운명이란 이렇게 터무니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었다.
‘구하길 잘했어.’
강은기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날 뻔했다.
덕분에 난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강은기를 배웅할 수 있게 되었다.
* * *
검찰청 앞 부대찌개 집.
자수를 앞둔 강은기가 뜨끈한 부대찌개를 먹은 뒤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은기의 곁에는 정장을 입은 다섯 사내가 서 있었다.
함께 자수할 동생들이라고 한다.
“잘 다녀와. 아들.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몸조심해 오빠.”
“나오면 연락해.”
엄마와 이연실 그리고 내 배웅을 받자 강은기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는다.
“어서 들어가세요. 엄마. 그리고 연실이 너도.”
은기는 우리에게 인사한 뒤 내 뒤로 도열해 있는 일명 ‘전투조’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니들도 어서 들어가라. 이러다가 다 잡혀갈라.”
강은기가 없을 동안 뒷정리를 맡길 최동혁과 이수찬 뒤로 20명 정도의 어린 동생들이 도열해 있었다.
강은기가 몸을 돌리는 순간 전투조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형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이곳은 검찰청 앞에서 100m는 떨어져 있었지만 근처에 검사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탓에 강은기가 짜증을 부렸다.
“우리 이제 조폭 아니다. 이제 그런 인사도 그만해.”
강은기의 말에 전투조원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 없는 동안 엔터 업무는 윤호한테 자문 구하고. 알겠지?”
뒤처리를 맡은 최동혁과 이수찬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형님!”
그 순간 최동혁과 이수찬이 나를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강은기의 짜증 탓에 작은 목소리로 고개만 까닥인다.
“다들 아는 얼굴이니까 긴말 안 할게. 매니지먼트 관련 업무는 빠삭하니까 언제든지 전화해. 대신 니들 옛날 버릇 나오면 가만 안 둔다?”
어릴 적 한 번씩은 내 얼굴을 봤던 동생들이다.
8명은 천사 보육원 출신이고 나머지 애들은 근처 보육원 출신.
버릇없이 굴다가 나한테 한 번 정도는 혼쭐이 났던 경험이 있었다.
쩔쩔매는 동생들의 모습에 강은기가 웃음을 터트렸고 전투조들이 머리를 긁적거린다.
특히 최동혁과 이수찬이 따로 교육을 시켰는지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은기가 운영하는 엔터 업체의 이름은 이제 ‘리버스 엔터테인먼트’로 변경한다고 한다.
주류 납품은 리버스 유통.
건설 쪽은 리버스 건설.
그렇게 다시 태어나겠다는 뜻으로 지은 회사명을 듣고는 얼마든지 도와주겠노라 말했다.
“그러면 나 간다?”
강은기가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마치고 동생들과 함께 검찰청으로 들어갔다.
* * *
이영진이 엄마와 연실이를 광주로 데려다주겠노라 자청했다.
어차피 광주 현장에 가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검진 결과 나오면 또 올라오세요.”
“알았어.”
“그리고 연실이 너도 같이 올라오고. 행복이 정기 검진은 서울에서 받아.”
“알았어. 그나저나 오빠도 은근 잔소리 심하다.”
엄마가 피식 웃는다.
“몰랐어? 얘 진짜 잔소리쟁이야. 아까 그 동생들이 눈치 살피는 거 봤지? 평소에 애들을 얼마나 쪼아댔으면 쯧쯧.”
엄마의 말에 이연실이 맞장구를 친다.
“주먹도 좀 썼지 아마?”
난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실아 나 걔들 거의 안 때렸어. 그리고 엄마. 쪼긴 누가 쪼았다고 그래요. 자기들 잘되라고 그냥 잔소리 조금 한 거예요.”
“그게 잔소리라고? 잔소리 두 번만 들었다간 경기하겠던데 아들?”
엄마와 여동생이 편을 먹고 나서니 이겨낼 재간이 없다.
난 운전석에 앉은 이영진을 보며 어서 빨리 출발하라 말했다.
“영진아. 운전 조심하고 어서 빨리 좀 데리고 가.”
“어. 걱정하지 마.”
아쉬워하는 엄마와 여동생에게 또 놀러 가겠다 말하며 배웅을 마쳤다.
이영진의 차가 떠나고 곧바로 사무실로 올라갔다.
2주 앞으로 다가온 <신의 이름으로>와 <먹방의 대가>의 회의를 하다 보니 금세 퇴근 시간이 되었다.
“다들 오늘은 하던 일 놓고 그만 퇴근합시다.”
오후 6시.
오랜만에 칼퇴근을 하게 된 탓에 날아갈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부터 우린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 * *
“오빠. 저희 왔어요.”
1층 거실에 하루와 체리블라썸 멤버 네 사람이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둥글게 모여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해? 아직 휴가가 2주 넘게 남았잖아.”
우연희가 콩나물 대가리에 붙은 껍질을 따내며 웃었다.
“집에서 쉬고 있으니까 몸이 근질근질하더라고요. 그리고 은아랑 세리 둘이서만 숙소에 있다고 하니까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요.”
한 달짜리 휴가였지만 은아는 집에 가질 않았고 세리는 3일 만에 다시 올라와 학교를 나가는 중이었다.
곁에서 콩나물 꼬리를 떼 내던 양은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저도 세리 저 말썽꾸러기를 혼자 놓아두면 사고를 칠 것 같아서요.”
툭.
세리도 내심 찔렸는지 다듬던 콩나물을 반으로 끊어 먹었다.
“내 내가 뭘? 나 공부하느라 바빴어! 은아 언니! 뭐라고 말 좀 해 줘!”
은아가 세리를 거들었다.
“맞아. 대부분은 잠에 빠져 있긴 했지만.”
세리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냐! 그렇게 말하면 나 공부 안 하고 잠만 잔 것처럼 들리잖아!”
티격태격하는 아이들을 보자 체리블라썸이 기운을 찾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방으로 올라가 편한 옷을 입고 온 다음 함께 콩나물 다듬기에 참가했다.
저녁 무렵까지 이어진 다듬기가 끝나자 정인지 아줌마가 저녁으로 콩나물국밥을 내밀었다.
다듬은 콩나물을 푹 고아낸 다음 수란과 삶은 오징어를 넣은 콩나물국밥을 먹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뒤 난 기다렸던 이야기를 꺼냈다.
“애들아. ‘먹방의 대가’ 5화에 출연 약속을 잡았거든. 까메오라서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돼.”
우연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전 연기 레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데요?”
“괜찮아. 그냥 밥만 먹으면 돼.”
<먹방의 대가>의 5화의 대본에는 하루가 찾아간 돈가스 맛집이 ‘체리블라썸’의 단골 최애 맛집이라는 설정이 되어 있다.
체리블라썸은 그 5화에 까메오로 출연해 녹화하는 동안 말없이 돈가스만 먹게 된다.
그 순간 세리가 묻는다.
“유노 오빠. 우리 대사 같은 거 없어요?”
“대사?”
“네!”
세리가 연기 욕심이 나는지 눈을 번뜩였다.
회귀 전 기억 속에 세리 연기는 꽝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해주는 것보다 남들에게 평가를 받는 게 훨씬 납득시키기 좋을 것 같았다.
“하루야. 대본 좀 줘 볼래?”
난 하루가 가져온 대본을 세리에게 넘겼다.
“그러면 씬 17. 야채 파는 아줌마 대사를 한번 해봐.”
“아줌마 연기를 하라고요?”
“응. 연기자가 자기가 원하는 배역만 할 수 있어? 그리고 이건 테스트니까 크게 부담가지지 말고. 테스트 통과하면 PD님한테 대사도 달라고 부탁해 볼게.”
연기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본인과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게 시키는 것.
잠깐 고민하던 세리지만 뭐든 다 할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알았어요. 에헴!”
세리가 대본을 들고 대사를 외우는 동안 나머지는 모두 소파로 올라가 세리의 연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폰의 녹화기능을 켜고 물었다.
“세리야. 준비됐어?”
세리는 대사를 다 외웠다며 대본 책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동 오일장의 할머니가 된 듯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오른손에는 파리채를 쥐고 흔들어대면서 말이다.
‘일단 시작은 좋네.’
난 그 타이밍에 맞춰 하루에게 연기를 부탁했다.
“하루야. 네가 상대역 좀 해줄래?”
“예. 형.”
세리 앞으로 간 하루가 손님 연기를 시작했다.
『아줌마. 요즘 파 한 단에 얼마씩 해요?』
하루가 묻자 세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학.생. 파는 한 단에 2천5백.원.에 가져.가! 』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현대 한국어와 중국식 성조가 결합된 기묘한 대사 톤이었다.
한국어가 저렇게 높낮이가 풍부한 언어였나?
세리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 싶은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순간 난 시작과 동시에 컷을 외쳤다.
“커 컷!”
순간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감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기계음 같았어. 그것도 한국어가 아니라 중국어.”
은아의 묵직한 한 방에 세리가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난 책 읽어주는 어플. 파는 한 단에 2천5백 원. 2천5백 원.”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하는 양은비의 발언에 세리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우연희가 애써 세리를 달랬다.
“그래도 우리 세리는 노래 잘하잖아.”
말은 부드러웠지만 담긴 내용은 ‘연기는 못 하니까 포기하렴’이다.
세리가 볼을 화난 복어처럼 부풀리고 몸을 홱 하고 돌렸다.
“나 연기 안 해!”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는데.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대신에 난 세리의 기운을 나게 하는 데 힘썼다.
연기는 아니라도 세리의 재능은 따로 있었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세리야. 연기 좀 못하면 어때? 세리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 곧 OST와 싱글 곡 잡아줄 테니까 기분 풀어.”
세리가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다.
“진짜요?”
“그래.”
하지만 풀 죽은 세리는 더는 연기를 시도하지 않았다.
소파로 돌아온 세리가 우연희의 품에 안겼다.
“언니. 내 연기 인생은 이제 끝이야.”
“미안한데 세리야. 시작도 안 했으니 끝났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지 않을까?”
세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우연희에게 투덜거렸다.
“그럼 언니가 해봐! 연기 엄청 힘들어.”
“난 연기할 생각 없는데?”
“아냐. 언니들도 다 해봐야 해!”
마치 다 같이 부끄러움을 감수하자는 물귀신 작전에 우연희와 양은비가 움찔거린다.
하지만 사실은 나도 궁금했다.
연기자로 크게 성공하는 은아 가수로 크게 성공하는 세리의 미래는 알았지만 나머지 두 사람의 재능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까.
“그래. 어차피 까메오 연기도 해야 하니까 일단 경험한다 생각하고 해보자.”
그렇게 떠밀리듯 두 사람이 대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연기를 시킨 순간.
의외의 결과가 나타나 버렸다.
‘제법 잘하는데?’
우연희는 차분한 성격을 가진 아줌마를 양은비는 똑 부러진 성격을 가진 아줌마를 연기해냈다.
우연희와 양은비는 미소나 하루 같은 연기 천재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빠지는 데가 없었다.
‘뮤지컬이랑 성우를 하면 괜찮겠네.’
전달력이 꽤 좋은 발성을 가진 우연희는 뮤지컬을 또렷한 개성이 느껴지는 양은비는 성우를 시켜도 될 것 같았다.
우연희와 양은비의 연기에 세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잘해? 두 사람?”
“그 글쎄?”
“그러게?”
세리가 마치 마지막 동지를 찾는 표정으로 은아에게 연기를 부탁한다.
“이번엔 언니 차례야! 어서 해봐. 언니.”
세리의 독촉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느라 애를 써야 했다.
‘세리야. 은아가 젤 잘해.’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세리는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두 손을 꼭 쥐었다.
은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루의 앞에 자리했다.
“은아야. 힘내.”
눈치를 살피던 은아를 달랬더니 한숨을 휴 하고 내쉬었다.
“네. 열심히 할게요.”
하루와 은아가 서로를 쳐다보며 자리를 잡았다.
“자. 그럼 가 볼까? 레디~ 액션!”
하루가 연기를 시작하자 은아가 그 연기에 화답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두가 놀란 눈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은아의 연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