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0화
220. 가족 2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이연실을 보며 강은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연실아. 중국 갔다 오는 대로 윤호를 찾아가 다시 용서 빌게.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그 녀석도 모난 구석이 많이 없어졌더라고.”
이연실이 눈물범벅이 되어서 고개를 들었다.
“진짜지?”
“그래.”
그날의 기억은 두 사람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당시에 이연실은 뒤늦게서야 강은기가 수작을 부렸다는 걸 알아차렸었다.
멍청하게도.
몇 개월이 지나서야 정윤호와 함께 있던 여자를 직접 만나 사정을 물어보고서야 말이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이연실은 그날 강은기를 상대로 죽이니 살리니 했었지만 자신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겠다는 남자를 끝까지 미워할 순 없었다.
정윤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부터 비바람을 다 막아준 남자였으니까.
강은기가 이연실의 눈가를 닦아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울지 마. 우리 행복이 놀라겠다.”
이연실은 정윤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자기 아랫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으 응. 알았어.”
이연실은 억지로 눈물을 그쳤다.
그리고 잠시 뒤 강은기를 보며 말했다.
“오빠 출장 갔다 오면 바로 윤호 오빠 만나러 가자. 그래야 마음 편히 결혼식도 올릴 수 있을 거 같아.”
강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난 윤호한테 한 방 맞을 생각도 하고 있다니까.”
이연실이 눈물을 닦으며 피식하고 웃는다.
“윤호 오빠가 제대로 때리면 오빠 죽어. 대신 내가 살살 때리라고 부탁할게.”
순간 강은기가 움찔하며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비 비행기 시간 다 된 거 같은데. 나가봐야겠다.”
강은기는 솔직한 말로 정윤호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조폭 시절 자신이 강한파에서 빠르게 위로 올라간 건 오직 싸움을 잘해서였다.
그러나 그 싸움을 잘한 이유가 바로 그들보다 월등히 센 정윤호와 주먹질을 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주로 맞은 건 자신이었지만.
정윤호보다 싸움이라도 잘했으면 이연실을 자기 여자로 만들 때 치사한 방법을 쓰진 않았을 거라 투덜대던 강은기가 현관을 나섰다.
“잘 다녀와요. 행복이 아빠.”
“아 몰라.”
“에이 또 삐졌네. 미안. 안 놀릴 테니까 조심해서 다녀와. 그리고 윤호 오빠 보러 가자. 꼭”
강은기는 캐리어를 붙잡은 채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러자.”
정윤호의 얼굴을 생각하자 미안한 감정만큼이나 그리움이 샘솟았다.
엄마에게 버림받고 가시가 돋아 있는 자기를 형제로 품어준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저번에 만났을 때처럼 허세를 부리지 말고 차라리 빌어볼 생각이었다.
자신의 아이에게 정윤호라는 든든한 삼촌을 선물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 *
미카엘라 수녀님은 강은기와 이연실이 그리고 내가 자란 천사 보육원의 원장 수녀님이다.
우리 원생들 모두에게 엄마가 되어준 분이었고.
-아들. 왜 전화했어?
“네. 갑자기 전화 드려서 죄송한데 혹시 연실이 연락처 아시나요?”
-그럼. 당연히 알지.
엄마에게 이연실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았다.
하지만 막상 전화하려니 막막하기만 했다.
강은기도 없는데 만나서 할 말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고 만났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차라리 엄마를 직접 만나 도움을 요청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난 일단 15일에 엄마의 건강검진부터 예약했다.
우선 엄마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 숙박 건강검진을 시킨 다음 이연실과 강은기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으로 오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두 사람의 성격상 엄마가 병원에 있다고만 말해도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올 테니까.
그렇게 되면 강은기의 죽음을 일단은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이 선 나는 곧장 회사에 휴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의 천사 보육원을 찾아왔다.
“별로 멀지도 않은데······”
보육원 옆 공터에 차를 댄 나는 다이어리부터 살폈다.
여기 직접 찾아온 이유는 강은기의 죽음을 막기 위험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4년 11월 11일]
-PM 01:00 성모병원 장례식장 1층. 미카엘라 수녀님. 그리고 나의 엄마. 영면.
역시나 엄마가 죽는 기록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여간 본인 몸도 좀 챙기시지. 원생들 먹이느라 뼈가 삭도록 일만 하시고······.”
미카엘라 엄마의 사망 원인은 나와 같은 위암.
아직은 4년이라는 시간 여유가 있지만 이번 기회에 엄마의 죽음도 확실히 해결해 볼 참이다.
회귀 전에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그리고 성공하고 난 후 당당하게 찾아갈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내가 성공했을 땐 이미 엄마는 세상에 없었다.
좋은 사람은 하늘이 먼저 데려간다던데 우리 엄마가 그랬다.
평생 자신이 아닌 타인을 돌보면서 살다가 일찍 돌아가셨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이제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 * *
끼이익!
하늘색 철문으로 된 천사 보육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경기도 광주의 천사 보육원은 고작 20명 정도만 받을 수 있는 자그마한 보육원이다.
보육원 마당에는 각종 야채를 심어 놓은 텃밭들이 있었고 자그마한 담벼락은 정겹게 보육원을 두르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크다고 생각했던 곳인데 다시 보니 너무도 조그마하고 허름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뒷마당으로 가니 호미로 텃밭을 가꾸던 백발의 수녀가 보였다.
넉넉하지 않은 사정에도 어떻게든 잘 먹이겠다고 씨앗을 얻어서 키우고 있는 우리 엄마 미카엘라 수녀님이다.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난 탓일까.
내가 몇 걸음 다가가기도 전에 엄마가 시선을 돌렸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아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난 그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안 본 사이 주름이 늘었고 귀밑에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였기 때문이다.
그 탓인지 난 다정한 말이 아닌 퉁명스러운 말부터 나왔다.
“무릎도 안 좋다면서 왜 또 일하고 계세요? 이제 애들한테도 좀 시키라니까요?”
엄마가 씨익 웃으며 대꾸한다.
“무릎이 안 좋긴. 우리 아들이 약도 보내주고 해서 다 나았어. 이거 봐봐. 이거!”
말을 마친 엄마가 벌떡 일어나 다리를 흔들어댄다.
워낙에 많은 일을 해서 관절이 안 좋을 텐데 애써 괜찮다고 하고 있었다.
관절 약을 사서 보내드렸지만 나이를 이기는 장사는 없다.
그냥 쉬는 게 약일 텐데 말이다.
“오래간만에 보니까 우리 엄마도 많이 늙으셨네.”
순간 엄마가 호미를 든 채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생각해보니 전화가 아니라 직접 얼굴을 보고 엄마라 부른 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어느덧 엄마의 눈에 눈물이 그렁대기 시작했다.
자기는 날 아들로 부르면서 정작 본인이 엄마란 소리를 들으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는 주름이 생긴 눈가로 눈물이 주르륵 떨어져 내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쉰 소리가 나왔다.
“또 운다. 우리 엄마. 울긴 왜 울어요? 평소에는 그렇게 괄괄하시면서.”
160cm 키의 작은 체구였지만 수녀가 아니었으면 여러 사람 휘어잡고 다녔을 성격이다.
하지만 우리 형제자매들을 대할 때면 늘 이렇게 소녀 감성이다.
난 천천히 다가가 울고 있는 엄마를 품에 꼬옥 껴안았다.
내 품에 안긴 엄마는 작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무뚝뚝한 아들이었던 난 엄마를 이렇게 안아준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는 많이 안아드려야겠다.’
연신 눈물을 찍어내던 엄마는 한참이 지나서야 머쓱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 이건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눈이 따가워서 그래.”
참 우리 엄마지만 거짓말도 못 한다.
그런데 늘 느끼는 거지만 나 같은 무뚝뚝한 놈이 뭐가 그리 이쁘다고 이렇게 사랑해주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피도 한 방울 안 섞였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우리 아들. 서울 물 먹어서 그런지 좀 많이 세련되어지긴 했다. 요새 잘 나간다며?”
“엄마가 그건 어떻게 알아요?”
“왜 몰라? 신문에도 나오던데. 그리고 엄마 정보력 몰라? 독립해서 나간 애들이 다 그러더라. 네가 우리 보육원 출신 중에서 제일 잘 나간다고.”
괜히 머쓱해진 난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동생들은요?”
“다들 학교 갔어. 그리고 애기들은 낮잠 시간이고.”
경기도 광주의 천사 보육원은 유치원생 이하의 5명 정도와 큰 아이들 10명 정도로 이루어진 작은 보육원이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니 예전보다 살림이 많이 나아져 보였다.
무너져 있던 담벼락도 깨끗하게 수리가 되어 있고 늘 해져 있던 보육원 입구 문도 페인트칠이 되어 있다.
회귀한 이후.
용돈을 꼬박꼬박 보내드리긴 했는데 이 정도를 수리할 정도의 돈은 아니었다.
“요즘 교구에서 지원금이 빵빵하게 나오나 봐요?”
“아 그 그거? 호호호. 그나저나 우리 아들이 간만에 엄마 보러 와서 왜 이리 궁금한 게 많을까?”
천상 거짓말은 못 하는 엄마가 딴청을 피웠다.
그때 양손에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그레이스 수녀님이 들어왔다.
33살의 보조 수녀님으로 나에게는 친누나 같은 사람이다.
“누나!”
“이게 얼마 만이니? 세상에! 얘 얼굴 좋아진 것 좀 봐?”
난 그레이스 수녀님의 수다를 한참 받아준 후에야 보육원이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됐다.
“은기가 매달 후원금을 넣어줘서 살 만해.”
“누구요?”
“은기. 강은기. 네 단짝.”
엄마가 황급히 손짓하며 그레이스 수녀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온 후였다.
“왜요? 얘도 알 건 알아야죠.”
“어휴. 저 입 싼 것.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강은기와 나 그리고 이연실 사이에 얽힌 일을 알고 있는 엄마였다.
하지만 그레이스 수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얘들 사이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아요.”
말을 마친 그레이스 수녀님이 날 쳐다본다.
“그래도 은기가 그간 보내준 돈이 보통이 아니야. 그리고 걔 그렇게 나쁜 애 아냐.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야 회개하고 길을 찾은 거지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레이스 수녀님께 물었다.
“누나. 자세히 좀 말해봐.”
순간 엄마가 한숨을 푹 쉬며 보육원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자. 들어가서 내가 이야기해 줄게.”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턴 엄마가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스. 너도 따라와.”
“저는 왜요?”
“왜긴 왜야. 누나가 동생 왔는데 밥도 안 차려 주려고 그래? 총각김치가 잘 익었으니 좀 내어오고.”
“아차. 그렇지.”
김장독으로 가려던 그레이스 수녀가 몸을 돌려 날 바라본다.
“그건 그렇고 정윤호.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내가 널 어떻게 가르쳤는데.”
지긋이 날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난 빠르게 대꾸했다.
“누나. 다녀왔어요.”
그제야 그레이스 수녀님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잘 왔어. 내 동생.”
엄마보다 더한 군기반장이자 누구보다 우리를 아껴줬던 누나가 나를 꼭 껴안았다.
덕분에 다시 한번 회귀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 * *
오래된 성당과 숙소를 개조해 만든 보육원의 가장 안쪽에는 수녀님들이 기거하는 방이 있었다.
그 방 한구석에 있는 작은 탁자에 세 사람이 함께 앉아 내가 가지고 온 커피를 마셨다.
“세상에! 넌 서울 가서 커피 타는 법만 배웠니?”
“괜찮죠? 이 커피가 내 비장의 무기예요.”
“그래? 호호. 정말 맛있다 얘.”
“그나저나 이제 말 그만 돌리시고 이야기해 주세요. 은기가 돈을 보내다뇨?”
엄마가 한숨을 푹 쉬며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주먹질로 번 돈은 나도 땡전 한 푼 받은 적이 없단다.”
“그럼요?”
잠시 멈칫거리던 엄마의 입은 계속되는 나의 성화를 못 이기고 다시금 열렸다.
“몇 달 전에 연실이랑 같이 여길 들렀는데 큰돈을 내놓더라고. 이 돈은 사람 때려서 번 돈이 아니니까 동생들을 위해서 써 달라고 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우리 회사를 찾아왔을 때 거친 말을 하긴 했어도 막 가지는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더 큰 행패를 부리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은기가 정말 손을 씻었을까요?”
“내가 볼 땐 거짓말이 아닌 것 같더라. 걔가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나는 타입이니까. 그리고 이제 더는 조폭 짓은 안 하겠대. 앞으로는 엔터 업계에서 최고가 될 거라고 하던데?”
내 기억으로는 강한 엔터는 크게 성공한 적이 없는 회사다.
조폭에서 양지 사업으로 전환을 한다고 했었지만 강은기가 죽고 난 뒤 어찌 된 영문인지 사업을 축소했었다.
이연실을 장례식장에서 멀찍이 보고 돌아섰기에 뒷사정을 알지도 못했었고.
‘진짜 손을 씻긴 씻은 건가······’
미소의 죽음 때문에 머리가 헝클어진 난 다른 사정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만 더 알아봤으면 지금 도움이라도 됐을 텐데.
“제가 있는데 자기가 무슨 수로 최고가 돼요?”
엄마가 빙긋이 웃는다.
“하여간 요즘은 은기가 자기 월급에서 떼서 엄청 보내주고 있어. 연실이도 아르바이트 나가서 번 돈 보내주고 있고. 덕분에 동생들 먹이고 입히는 게 좋아진 건 사실이야. 아 물론 우리 아들이 보내준 돈도 큰 도움이 됐지.”
나 역시 한 달에 50만 원씩은 보냈다.
더 보내고 싶었지만 굴렁쇠 엔터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 역시 돈을 모아야 했으니까.
아무튼 강은기가 진짜로 변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엄마의 주름진 손이 내 손을 붙들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때처럼 그렇게 따뜻한 온기를 건네준 그녀가 힘겹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들. 엄마가 꼭 바라는 소원이 한 가지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