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6화
216. 그녀의 변신 2
촬영을 끝낸 주영인은 차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스타킹을 벗었다.
아스팔트 바닥을 전력으로 질주한 탓에 발이 까져 있었다.
심지어 곳곳에 조그만 돌도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타일리스트 지수현이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언니 신발을 벗고 뛰면 어떻게 해요? 발 다 까지셨네!”
“아야야. 얘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소독약이랑 반창고나 가져와!”
지수현이 한숨을 쉬며 응급 상자를 가져왔다.
주영인이 상처를 씻고 소독을 마치자 지수현이 한숨을 푸욱 내쉰다.
“언니. 꼭 그렇게 치마를 찢으셔야 했어요? 그거 최현호 부티크에서 받아 온 거라 엄청 비싼 건데······”
주영인이 피식 웃는다.
“걱정하지 마. 협찬할 곳이 거기뿐이라니?”
“지금 다음 협찬이 문제가 아니라 반납을 못 할 거 같아서 그러죠.”
지수현이 울상을 짓는다.
“얘는? 나 주영인이야. 그냥 내가 사고 쳤다고 말하고 그래도 군소리하면 그냥 산다고 해.”
“진짜요?”
최근 주영인은 스타일리스트 지수현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정 팀장 잘 관찰하랬지? 어때? 나 보고 있었어?”
지수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속삭이듯 말했다.
“언니 연기하는 거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요. 아예 눈을 못 떼던데요.”
“그럴 줄 알았어.”
순간 지수현이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 아니죠?”
“뭐가 아냐?”
주영인이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리자 지수현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왜~ 말해봐. 내 전속 스타일리스트가 하는 생각을 내가 모르면 되겠어?”
에이스 엔터로 이직한 주영인은 여러 스타일리스트 중 유독 지수현을 총애했다.
덕분에 같이 입사한 동기들이 날을 새어가며 고생하는 동안에도 지수현은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주영인은 고급 백이나 비싼 의상들을 툭툭 넘겨주기까지 했다.
최근에도 500만 원이나 하는 샤넬 백을 선물 받았고.
지수현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언니······ 혹시 정윤호 팀장 좋아하세요?”
주영인이 빙긋이 웃는다.
“그래. 맞아. 나 정윤호 그 사람 좋아해.”
지수현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언니!”
“왜? 너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거 같은데?”
“아 아니에요. 저 못 들은 거로 할래요. 그리고 비밀은 꼭 지킬게요.”
“왜. 이찬동 실장이 무서워서?”
“······”
“그 인간 내가 사고라도 칠까 봐 너한테 감시시켰을 거 아냐?”
“그 그게요. 언니.”
“거기까지만. 난 다 이해하니까.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 지금 이 순간부터는 편을 분명히 해 회사야? 나야?”
지수현은 눈알을 팽팽 굴리다 조심스레 말했다.
“어 언니. 그러면 저 책임져주실 수 있으세요?”
“내 말 못 들었어? 챙겨준다고 했잖아. 그리고 첫날부터 친언니 동생처럼 지내자고 한 거 기억 안 나? 그래서 내가 너한테는 내 옷이랑 백도 줬잖아.”
“죄 죄송해요.”
“하여간 나만 믿고 따라와. 회사 옮겨도 넌 데리고 갈게. 평생 같이 가자.”
잠깐 고민하던 지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았어요. 이제 언니만 믿을게요.”
지수현을 철저히 자기 수족으로 만든 주영인이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 지금부터 정윤호 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는지 세세하게 관찰하고 보고해. 그게 네 첫 번째 임무니까.”
주영인도 정윤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영인이 선택한 방법은 정윤호마저 탐낼 사람이 되는 거였다.
그리고 그걸 위해 주영인은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았을 맨발 투혼까지 보이면서 말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이것 좀 윤호 오빠한테 전달해 줄래?”
주영인은 꼬깃꼬깃 접은 쪽지를 지수현에게 건넸다.
* * *
누가 내 이야기를 하는지 귀가 간질거린다.
그 순간 메이크업을 마친 유진이가 승합차에서 나왔다.
“오빠. 나 어때요?”
부드럽게 웨이브 진 머리에 돌체 & 가바나의 골드프레임 선글라스에 샤넬 투피스 드레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탓에 어제까지 봐 왔던 유진이와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유진이가 맡은 ‘청명’이라는 역할은 청담동 70평짜리 빌라에 혼자 살며 페라리를 끌고 다니는 무당이자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이 대리님. 명품 브랜드 협찬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예. 아직 국내의 대형 부티크 쪽과는 발을 트지 못했는데 대신 해외 브랜드는 유진 씨한테 협찬을 못 해서 난리예요.”
아시아 마케팅을 고려하는 대형 브랜드들은 특히 한국의 스타에 큰 관심을 둔다.
아시아에서는 한국 스타들의 인지도가 할리우드 배우들을 뛰어넘으니까.
덕분에 지사에서 협찬 결정이 나지 않는 명품 브랜드도 본사 차원에서 나서서 협찬해 왔다고 한다.
워낙 뉴욕에 아는 인맥이 많다 보니 글로벌 명품 협찬을 받는 게 이미리 대리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광고 이야기가 슬금슬금 나오고 있단다.
“브랜드 마케터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이번 작품의 반응에 따라 광고가 들어 올 수도 있을 거 같더라고요.”
돈이 굴러오는 소리가 들린다.
“국내 쪽은 LM 의류와 독점 계약을 맺었으니까 유념해 주세요.”
“저도 그렇게는 말해 뒀어요.”
“대신 해외 쪽 광고는 LM 의류와 상의 후에 받을 수도 있으니까 제안을 완전히 물리치지 마시고요.”
“그럴게요.”
“그나저나 이미리 대리님 덕에 일이 너무 쉬워졌는데요?”
“아녜요. 유진 씨 인기 덕에 가능했어요.”
자기 앞에서 인기 이야기를 하자 유진이의 얼굴이 발개진다.
“오 오빠. 그런 이야기는 좀······”
칭찬에 약한 유진이를 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그나저나 명품이 좋긴 좋아. 그치?”
<파란 하늘>을 찍을 당시에는 교복 몸빼바지 학교 체육복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가 모두 명품이다.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옷보다 더 주된 관심사가 있었다.
“그런데 오빠. 영인이 연기 끝까지 봤죠?”
메이크업을 한다고 주영인의 연기를 못 본 유진이다.
“신경 쓰지 마. 언제나 그랬지만 넌 네 연기만 신경 쓰면 돼.”
유진이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유진이가 눈을 감고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유진이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수고해요. 정 팀장님~?”
유진이는 윙크를 하곤 도도한 걸음으로 세트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미리 스타일리스트가 혀를 내두른다.
“유진 씨는 극 중 배역으로 전환이 엄청나게 빠르시네요?”
보통 배우들은 어떤 캐릭터로 몰입하기 위해 준비 시간이라는 게 있었다.
대본을 읽고 캐릭터처럼 생각한 뒤에야 배역에 몰입하는데 일부 몰입하는 과정이 느린 배우들은 하루 전부터 고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진이에겐 그 과정이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 인격을 분리하는 방이 따로 있는 것처럼.
“저도 볼 때마다 놀랍니다.”
“제가 많은 배우를 본 건 아니지만 타고난 배우라는 게 정말 있긴 있나 봐요.”
새삼 연기를 하면 다중인격자가 편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명품 옷을 입고 나타난 유진이의 모습을 본 김성운 PD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벌써 발동이 걸렸네. 그러면 바로 연기 들어가야겠는데. 자자. 다들 서두르자고.”
김성운 PD도 대번에 달라진 유진이를 파악했다.
그리고 곧장 조금 전 씬 30에 이은 씬 31의 촬영에 돌입했다.
『뭐야? 누가 내 차에 주차 딱지 붙였어?』
씬 31은 자신의 페라리 승용차에 붙은 주차금지 딱지를 보고 화를 내던 청명이 두 주인공이 잡아 온 소매치기를 보며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씬이었다.
그렇게 두 주인공과 주요 조연인 청명의 만남이 극의 초반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 * *
주영인과 유진이는 NG 없이 단번에 촬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유진이 쪽으로 추가 기울었던 <파란 하늘>과는 달리 이번에는 막상막하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두 사람이다.
덕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내 눈앞의 주영인은 내 아내였던 주영인과 완연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저기 정 팀장님?”
“누구신지······?”
머리를 질끈 묶은 20대 초반의 여자가 내 눈치를 본다.
“영인 언니 스타일리스트예요. 지수현이라고 합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런데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지수현이 내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영인 언니가 이것 좀 전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런데 주영인의 쪽지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에이스에서 체리블라썸 가로채기에 들어갔어요.]
현재 은아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체리블라썸 멤버들은 재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
아직 6개월 정도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데다 이번 활동으로 다들 워낙 지쳐 있는 터라 재계약을 언급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이스 엔터가 그 틈을 노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런 발상을 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내가 이 정도도 대비하지 않았으리라고?’
체리블라썸과의 유대관계도 돈독하게 해뒀지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대비를 해뒀었다.
체리블라썸 본인들이야 나만 믿고 가겠다고 하지만 재계약에는 가족들의 입김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보다는 주영인이 내게 이런 쪽지를 보낸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쪽지 내용을 왜 제게 보냈답니까? 저를 돕는다는 걸 알면 그쪽 회사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건 저도 모르죠. 하여간 전 언니 쪽지를 분명히 전했어요. 그리고 우리 언니. 정 팀장님한테 도움 되려고 하는 건 사실이니까 그것만 알아주세요. 그럼 전 이만.”
지수현이 빠르게 자기 할 말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뭐야? 쟤는?”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이제 막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데 꽤 강단 있어 보이는 모습이 앞으로도 이 업계에 잘 살아남을 것 같은 성격이다.
“일단 전화는 해둬야겠군.”
사정이야 어떻든지 간에 알려준 경고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쪽지를 집어넣은 난 일단 체리블라썸의 상황 파악을 위해 도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팀장님!
“체리블라썸 멤버들 지금 다들 집에 갔지?”
체리블라썸은 활동 휴식기를 맞아 오늘 아침에 한 달짜리 휴가를 보냈다.
세리는 학교 때문에 집에서 주말만 보내고 바로 올라와야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예 안 간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은아는 안 갔어요.
“왜? 은아 어머니께서 잘 관리하시겠다고 해서 간다더니?”
-생각이 바뀌었나 봐요. 은아가 아빠 얼굴 보면 싸울 거 같다고 그냥 숙소에서 쉬겠대요.
“그러면 집에 혼자 있어?”
-지금은요. 그래도 이주영 대리님이 매일 한 번씩 들르기로 했어요. 저도 이따가 가 보려고요.
“그래. 란희 네가 수고가 많다. 그리고 당분간 체리블라썸한테는 신경 좀 써. 은아는 재계약했지만 다른 애들은 이번에 재계약해야 하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예. 팀장님. 주영언니랑 같이 티 안 나게 잘 챙길게요.
“오케이.”
일단 체리블라썸이 있는 곳을 체크한 나는 이번엔 이동민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이동민 실장은 법무팀과 곧바로 체리블라썸과의 재계약 준비를 하겠노라 말했다.
그리고 난 곧장 가족들의 단체 까톡방에 재계약에 관한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정윤호 팀장 : 자녀분과의 재계약을 위한 미팅을 2주 뒤에 열고자 합니다. 부디 참석하시어 자녀분들의 앞날에 관한 저희 굴렁쇠 엔터의 계획을 확인하시고 저희와 재계약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정산 및 금전적인 항목에 관한 것도 투명하게 공개할 예정이오니 가능한 한 참석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리를 제외하고 모두가 성인이라 재계약에 부모가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점을 간과하면 허점이 발생한다.
체리블라썸은 이제 20대 초반.
아직 부모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이였기에 무슨 일이든지 부모에게 통보를 해두는 게 좋았다.
그런데 까톡을 보낸 뒤 5분도 되지 않았을 무렵.
체리블라썸의 부모들이 보낸 까톡들이 차례로 도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