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5화
215. 그녀의 변신 1
김종훈이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기자들을 부를 것도 아니고 쇼케이스를 열지도 않는데 강하나를 띄운다고 자신했으니까.
“윤호야. 하나를 3개월 안에 어떻게 띄우려고? 그게 가능해? 돈도 많이 안 쓸 거라며?”
“가능하지. 방법은 말할 수 없고.”
회귀 전 강하나가 어떻게 성공하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거기다 내 경험을 더하면 강하나를 최단 기간 내에 알릴 수가 있었다.
다만 그 세세한 이야기를 모두에게 할 수는 없었다.
난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김종훈에게 웃으며 말했다.
“대신 3개월을 넘기면 네가 먼저 이름 밝혀도 좋아.”
김종훈이 날 빤히 쳐다본다.
“진짜지?”
“그렇다니까?”
잠시 말없이 내 얼굴을 보던 김종훈은 결국 손을 내밀었다.
“오케이. 그렇게 할 게.”
3개월 만에 ‘싱어송라이터 강하나’란 브랜드 확립.
그걸 공언한 탓에 모두의 얼굴에 기대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종훈아. 가명은 뭐로 할 거야?”
김종훈이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EOD.”
“설마 Explosive Ordnance Disposal 그러니까 폭발물 처리반?”
“아니 End of Day. 하루의 끝!”
“하하. 그 그래?”
어색한 웃음을 짓자 김종훈이 혀를 내둘렀다.
“EOD에서 어떻게 폭발물 처리반을 생각하냐?”
“그럴 수도 있지.”
“그나저나 너 진짜 너무 하다. 한국에서 내 이름 안 팔려고 하는 건 너뿐일 거다.”
“내가 늘 말하잖아. 종훈이 너 생각보다 별로야.”
“알아. 그리고 그렇게 콕 짚어 이야기 안 해줘도 돼.”
툴툴거리는 말과는 달리 김종훈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생각이 깊었던 김종훈은 이런 농담에도 어울릴 정도로 밝아졌다.
방선우 같은 천재들과 어울리다 보니 부담감이 많이 줄어든 이후 생긴 변화였다.
그때였다.
도란희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말했다.
“팀장님! 하나 팬클럽 이름은 뭐로 하죠? 설마 벛꽃패밀리처럼 하나 패밀리 뭐 이런 거로 할 거 아니시죠?”
체리블라썸의 팬들은 ‘벚꽃패밀리’라는 임시 명칭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다.
정식 팬클럽을 창단한 게 아니라 팬카페만 유지한 채였기 때문이다.
“설마 벚꽃패밀리 때문에 그래? 그것도 정식 팬클럽으로 전환할 때 이름 바꿀 거야. 이거 왜 이래?”
도란희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난 또 팀장님 취향인가 했죠······”
취향이라니.
대체 날 뭐로 생각하고.
“그러는 넌 팬덤 이름을 뭐로 하고 싶은데? 너부터 말해봐.”
도란희가 목청을 가다듬고 말한다.
“완자요.”
“뭐?”
순간 제대로 들은 건가 싶었다.
“하나의 원(ONE) 그리고 사람 자(者). 그래서 원자. 하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뜻인데 원자라고 하면 특색이 없으니까 완자라고 하는 거죠. 어때요? 완빤치 완타치라고 할 때의 완이요. 기억에 팍팍 남지 않을까요?”
뿌듯해하는 도란희의 표정을 본 순간 제대로 미쳤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팬덤이 고기 완자 해물 완자. 뭐 이렇게 불리는 꼴을 보고 싶어?”
“에이~ 누가 그렇게 불러요. 우리 완자를~”
이미 마음속에 강하나의 팬클럽 이름을 정한 모양인데 절대 불가였다.
강하나 역시도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저 저기 완자는 좀······”
“별로야?”
“어.”
도란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그 그러면 팀장님은요? 팀장님은 뭐로 지으려고 했는데요?”
“나? 팬들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도란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비겁하게 이렇게 피해가시네.”
“뭐야? 그 불량한 눈빛은 뭐지?”
“제가 뭘요?”
안 되겠다.
팀장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내 생각을 말해야겠다.
“나보고 팬덤 명을 지으라면 난 ‘온리원’이나 ‘원앤온리’로 지을 생각이었는데? 하나의 유일한 팬들이라는 뜻을 담아서.”
도란희가 의외라는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그게 아니면 하나의 원(ONE)이란 음을 따서 원츄라고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하나를 원한다는 뜻을 담아서.”
팬덤 이름으로 ‘완자’를 말했을 때보다 강하나의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도란희가 강하나에게 물었다.
“하나야. 마음에 드는 거 있어?”
강하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전부 다 마음에 드는데?”
도란희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하나 너 팀장님 의견은 다 좋다고 하는 거 아냐?”
“아 아냐. 내가 무슨······”
당황한 강하나가 손을 흔들어댄다.
결국 팬덤의 이름은 팬들에게 맡기되 ‘완자’ 같은 게 나오면 내가 만든 것 중에 하나로 하기로 결정 났다.
하지만 도란희는 꽤 끈질겼다.
“하나야.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완자로 하자 응?”
강하나가 흐뭇하게 웃으며 답변한다.
“아니. 싫어.”
도란희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눈가를 훔친다.
“응. 알았어. 우리 불쌍한 완자들. 빛도 못 보고 사라지겠네······ ”
도란희의 혼잣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새벽 5시 30분.
미소가 정인지 주인아줌마의 손을 잡고 우릴 배웅하러 나왔다.
파워터프걸 파자마를 입은 미소는 졸린 눈을 하고서 스프린터 2호 차 뒷좌석에 올라왔다.
유진이의 품에 폭 안긴 미소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촬영장에 나 없어도 슬퍼하거나 외로워하지 마.”
“응. 그럴게.”
“그리고 삼촌 말 잘 듣고. 알았지?”
“알았어.”
“그리고 어 여름이라고 너무 차가운 물 마시지 마. 그러면 배 아프다고 그랬어!”
미소가 아는 게 많아질수록 당부의 인사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미소가 자신의 왼쪽 손을 쳐다본다.
꼭 쥔 다섯 손가락 중 세 개가 펼쳐졌는데 나머지 두 개가 여전히 접혀 있다.
“뭐였지? 어. 나 생각해놨었는데?”
미소가 졸린 눈을 비비며 기억을 떠올리려 한다.
“미소야. 근데 엄마 이제 가야 하는데?”
순간 미소가 기억이 났다며 두 눈을 번쩍 뜬다.
“아 맞다. 엄마. 연기 잘해야 해!”
손가락이 하나 더 펴진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뭘 할까 싶어 궁금했는데 미소가 생각났다는 듯 마지막 손가락을 펴며 외쳤다.
“엄마! 파워터프!”
유진이가 웃으며 똑같이 따라 한다.
“파워터프!”
그 순간 나도 함께 나온 정인지 주인아줌마도 그 포즈를 따라 했다.
그 후 미소는 엄마의 볼에 뽀뽀한 뒤 차에서 내렸다.
“엄마. 잘 갔다가 와? 빨리 오면 더 좋아!”
“응. 미소야. 잘 놀고 있어.”
그렇게 우린 미소와 정인지 주인아줌마의 배웅을 받으며 세트장으로 향했다.
* * *
양평 촬영장에 가까워질 무렵 뒷좌석에 앉아 대본을 보던 유진이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왔다.
“오빠. 요즘은 에이스 엔터랑 TK 엔터에서 영입 제의 안 와요?”
“요즘은 좀 잠잠하네. 내가 너무 단호하게 선을 그어서 포기했나 본데?”
“그래도 방심하지 마세요. 오빠가 엄청 일 잘한다고 배우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단 말이에요.”
최근 현장의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내 이름을 거론하는 일이 점점 늘고 있단다.
그 탓에 날이 갈수록 유진이의 경계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괜찮아. 너 버리고 갈 일 없다니까. 솔직히 다른 회사로 갈 바엔 독립하는 게 낫지. 안 그래?”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그제야 유진이가 안도한다.
잠시 후.
촬영 장소인 양평 우체국 앞에 도착했다.
“왔어요?”
역시나 오늘도 차수연 제작 PD가 우릴 반긴다.
그런데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LM 의류 쪽에서 의상 지원을 빵빵하게 해줬거든요. 유진 씨 덕에 매출이 10%나 상승했다면서요.”
“10%요?”
“못 들으셨어요? 유진 씨가 주로 광고하는 라인업뿐만 아니라 전체 LM 의류의 브랜드 이미지가 상승했다던데요?”
LM 의류의 매출만 따지면 수천억은 될 거다.
그런데 그중 10%면 적어도 몇백억이 증가했다는 소리였다.
“하여간 유진 씨 덕에 제작비도 아끼고. 늘 고마워요 유진 씨.”
“별말씀을요.”
유진이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차수연 제작 PD가 우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LM 의류 대표님한테 인사드리러 가야겠네요.”
“그러면 제가 정말 감사드린다고 꼭 좀 말해주세요.”
“예. 그럴게요.”
LM 의류는 HK 의류의 공격을 막아주고 전속 계약까지 맺게 해준 은인.
감사함에 대표이사와도 만날 약속을 잡으려 했지만 상대가 너무 바빠서 아직도 못 만나고 있었다.
차수연 제작 PD와 인사를 마치고 스태프들과 배우들과도 인사를 마쳤다.
그런데 주영인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지?”
아무리 친구 먹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주연을 맡은 선배였기에 인사를 하는 게 기본이었으니까.
그때 최일섭 FD가 우체국 뒤편 공터에 있다고 알려왔다.
감사하다 말한 뒤 유진이와 함께 우체국 뒤편 공터로 향했다.
그 순간 주영인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쟤 왜 저래?”
내 기억 속 주영인은 어떤 촬영 현장에서도 긴장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연습보다는 주로 힘 있는 스태프나 배우들과의 친목질에 몰두했다.
그런데 오늘은 주변을 쳐다도 보지 않고 날이 잔뜩 선 표정으로 대본에만 몰두하는 중이었다.
“뭘 잘 못 먹었나. 쟤가 저럴 애가 아닌데······”
유진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많이 겪어보진 않았어도 영인이 성격이라면 이미 이곳저곳에 인사하며 다니고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조심하자. 오늘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다.”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 메이크업이랑 의상 준비하고 올게요.”
대본에 푹 빠진 모습을 보니 한가하게 인사나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그 탓에 유진이도 촬영 준비를 하러 승합차로 되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주영인이 촬영할 차례가 돌아왔다.
“영인 씨. 슛 들어가야 합니다.”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난 주영인은 집중에서 깨지 않으려는 듯 내게 인사도 하지 않고 AD를 따라나섰다.
‘변했네. 주영인.’
* * *
오늘 주영인이 처음으로 찍을 씬은 우체국에서 일을 보고 나오던 여검사가 소매치기범을 발견하고 추격하는 씬이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느린 여검사는 소매치기를 잡지 못한다.
대신 주차위반 스티커를 떼던 남자 주인공인 경찰이 소매치기를 잡으며 두 남녀 주인공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 첫 번째 씬 촬영을 위해 두 주인공인 ‘방신애’ 역의 주영인과 ‘최강인’ 역의 박남철이 리허설에 들어갔다.
동선에 대한 점검을 끝나자 김성운 PD가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자 영인 씨. 성인 배우들 나오는 첫 씬이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
“예. 감독님.”
“자 씬 30. 준비하시고. 레디~ 액션!”
큐 사인이 떨어진 순간.
미리 준비하고 있던 소매치기 단역이 할머니의 지갑을 훔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 저! 나쁜 놈이! 도둑이야! 저놈 잡아라!』
할머니 역의 단역 배우가 주저앉아 외치는 순간 주영인도 연기에 들어갔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소매치기를 막아서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도 없냐? 세상 참 각박하게들 사네!』
씩씩대던 주영인이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주영인이 갑작스레 치마 옆 단을 부욱 하고 찢었다.
순간 주영인의 스타일리스트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반대로 김성운 PD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주연이 몸을 사라지 않고 배역에 몰입하고 있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주영인은 스타킹만 신은 채 소매치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헉헉! 거 거기 양아치! 이 일단정지! 지금 서면 최대한 정상 참작해 준다니까! 어휴! 저 씨X 새X! 진짜 발만 X나게 빨라 가지고!』
느릿느릿하게 뛰는 주영인의 입에서는 연신 쌍욕이 튀어나왔다.
두뇌파에 의협심은 있지만 운동은 지지리도 못하는 입이 거친 신참 여검사.
그게 바로 주영인이 맡은 ‘방신애’란 캐릭터였다.
하지만 느린 달리기 속도에 범인 역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 틈을 타 범인 역의 배우는 뒤를 돌아보며 놀려대기까지 해댔다.
그때였다.
형사과 에이스였다가 좌천당한 젊은 열혈 경찰인 ‘최강인’ 역의 박남철이 그 광경을 눈치챘다.
불법 주차한 페라리 승용차에 주차 딱지를 붙이던 박남철은 팔을 뻗어 소매치기를 가로막았다.
박남철의 팔에 목을 맞은 소매치기역의 배우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뒤늦게 달려온 주영인이 숨을 쌕쌕 몰아쉬며 소매치기 역의 배우 위에 올라탔다.
『헉헉. 이 새X가 죽을라고.』
주영인이 위로 고개를 치켜들고 묻는다.
『헉헉. 그나저나 X나게 고맙네. 당신 헉헉. 이름이 뭐야?』
박남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X나게 싸가지 없네 그러는 당신은 이름이 뭔데?』
『나? 방신애.』
『이름이 뭐 그래?』
『뭐? 그러는 넌? 이름이······ 최강인? 풉. 푸하하하.』
주영인은 박남철의 가슴팍에 붙은 이름표를 보고 실소를 터트렸다.
『이 여자가 미쳤나? 어디 사람을 보고 웃어?』
『이 여자라고? 야! 말조심해! 얻다 대고······』
소매치기범을 다 잡아놓고 주영인과 박남철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씬 30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김성운 PD가 만족한 표정으로 컷을 외쳤다.
“컷! 오케이! 영인 씨. 괜찮아? 스태프 빨리 확인해 봐요!”
“예 감독님!”
순간 스태프들이 우르르 뛰어가 주영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이힐까지 벗어 던지고 스타킹만 신은 채 인도 위를 달렸으니까.
“괜찮아요. 감독님. 별거 아니에요.”
주영인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괜찮다면서 웃고 있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스타킹은 다 찢어져 있었고 발바닥은 까져 있었다.
회귀 전 주영인은 몸이 재산이라며 이런 일은 대역을 시켰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진정한 연기자가 된 것처럼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연기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으니까.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주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