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214. 새로운 시작 2
강하나의 고혹적인 음색은 그녀의 소울과 감성을 찐하게 드러내며 날 흠뻑 매료시키고 있었다.
그 탓에 난 녹음실을 왜 옮겼는지에 대한 의문은 잠시 내버려 둔 채 강하나의 노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말해요.
할 수 없을 거라고.
아픈 순간. 힘든 시간.
모두 다 내 잘못이라고.
하지만 바보같이 나만 몰랐죠.
그 모든 게 책임지지 않는 참견이라는 걸.
그래서 난.
무섭지만 두렵지만.
용기를 냈어요.
그 순간 조그만 길이 눈앞에 나타났죠.
안녕.
어제와는 다른 나 하이~
힘든 날은 이젠 안녕 바이~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나만의 길.
걷다 보면 그 길의 끝에 무지개 속 난쟁이의 황금 단지가 있을지.
사막 속 오아시스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멈춰 있으면 난 영원한 모래사막 개미지옥에 버둥대는 개미 한 마리.
그래서 앞으로 발걸음을 디뎠어요.
개미같이 작은 나지만
짧은 다리로 내딛는 발걸음이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가는 건 사실이잖아요.
안녕.
어제와는 다른 나 하이~
힘든 날은 이젠 안녕 바이~
······.』
과거 주변 사람들로 인해 받았던 상처를 잊고 새로운 인생에 도전한다는 가사.
강하나는 힘들어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그녀의 유니크한 목소리로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절박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과거 아이스톤 엔터에서 데뷔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하나야.’
그녀를 안심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노래가 끝이 났다.
노래에 빠져 잠시 멈췄던 발걸음이 이제야 움직인다.
“란희야. 어서 가자.”
“네. 팀장님.”
강하나를 달래려고 4번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녹음실 문고리를 잡은 순간 원곡의 통기타 반주에 다른 음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띵~♬.
“응? 웬 피아노?”
녹음실에서 또 다른 버전 <새로운 시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변수가 생기면 미래가 바뀐다.
어떨 때는 좋은 쪽으로.
또 어떨 때는 나쁜 쪽으로.
그래서 강하나와 관련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선의를 가지고 한 일이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디에서나 흔한 일이니까.
그런데 강하나의 곡에 피아노 반주라니.
통기타만 썼었던 회귀 전과 달라져 버렸다.
잠시 후.
피아노 간주가 들어간 버전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녹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녹음실 안에는 터무니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야 이건?”
녹음실 안에 별도로 분리된 공간인 녹음 부스에는 Steinway & Sons라는 브랜드가 금색으로 각인된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김종훈이 자세를 잡고 있었다.
“종훈이가 친 거였어?”
그 순간 녹음실 컨트롤 패널을 만지던 방선우가 몸을 돌렸다.
“형 왔어요?”
“어 그래. 근데 저건 뭐야?”
“아 피아노요? 오늘 새벽에 종훈이 형이 가져왔어요. 하나 누나 노래에 피아노 반주를 해보겠다면서요.”
“저 큰 걸 어떻게 여기까지 끌어 내렸어?”
“사람 불러서 분해해서 옮기니까 순식간이던데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SJ 엔터 물건을 가지고 온 건 아니겠지?’
머릿속으로 SJ 엔터의 이서준 회장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재활을 핑계로 김종훈이 굴렁쇠에서 지내는 날이 길어지자 이서준 회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까톡을 보내고 있다.
연습생부터 소중히 키워 온 프랜차이즈 스타를 우리 회사에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서준 회장은 여전히 내 말을 믿지 않고 있다.
“그러면 저것 때문에 4번 방으로 녹음실을 옮긴 거야?”
“예. 저희 다 같이 작업을 하려니까 제일 넓은 녹음실이 좋겠더라고요. 뭐 종훈 형 피아노를 놓을 장소도 여기 밖에 없고요.”
다행히 가수 1실의 압박 때문에 녹음실을 옮긴 건 아니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장비 싹 다 업그레이드해 달라고 요청할게. 대신 앞으로는 방 옮길 일 있으면 나한테 미리 말하고.”
“네!”
그때 녹음 부스의 문이 열리더니 땀에 젖은 강하나가 걸어 나왔다.
“오빠! 제 노래 어땠어요?”
“알면서~. 당연히 최고지.”
“다행이다.”
한숨을 내쉬는 강하나의 눈을 마주한 채 덤덤히 말했다.
“그리고 네 너튜브 데뷔 일정은 들었지?”
“네.”
“그리고 음방 쪽은 지금 스케줄 잡고 있으니까 그때까지 목 관리 잘 해. 너튜브 반응 쌓고 한방에 터트릴 테니까.”
순간 강하나의 안색이 확연히 밝아진다.
“아 알겠어요.”
내가 생각한 대로 그녀는 데뷔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걱정한 거였다.
그 순간 도란희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하나 너. 나랑 말할 때랑 리액션이 왜 이렇게 달라? 우리 팀장님이 오시니까 너무 환하게 웃는데?”
동갑인 도란희의 말에 강하나가 아니라며 두 손을 젓는다.
“아 아냐. 그냥 오늘 노래도 잘되고 기분이 좋고 그냥 그래서 그래.”
도란희가 눈을 좁히며 말한다.
“못 믿겠는데······.”
“얜 또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실 노래를 좋아하는 이에게 가수만큼 지루한 직업도 없다.
앨범 하나를 낼 때마다 같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수백 수천 번을 불러야 했으니까.
거기다 연습의 횟수만큼 걱정 또한 쌓인다.
이 곡이 뜰까?
팬들이 좋아해 줄까?
수많은 질문이 자신을 괴롭히는 순간의 횟수만큼 자신감이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칭찬 한마디에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자 앞으로는 더 자주 말해줘야겠다 싶었다.
그 순간 강하나의 뒤를 따라 녹음 부스에서 나온 김종훈이 손을 치켜들었다.
“어이~ 많이 바쁘다고 하더니 이 시간에 웬일이냐?”
“그러는 너야말로 저게 뭐야? 설마 회사 물건을 가져온 건 아니지?”
녹음 부스 안의 피아노를 가리키자 김종훈의 입가로 장난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별 걱정을 다 한다. 내 피아노야.”
“다행이다. 난 또······.”
김종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야. 언제는 남들 눈 의식하지 말고 내 맘대로 살아 보라며? 선우랑 같이 살라고 숙소에 방도 빼줬으면서. 근데 왜 우리 회사 눈치를 보냐?”
“설마 이렇게 오래 버티고 있을 줄 알았냐. 며칠 있다가 갈 줄 알았지.”
순간 김종훈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영 그렇게 불편하면 내가 아예 그냥 굴렁쇠로 옮길까?”
그 순간 SJ 엔터의 이서준 회장이 노발대발하며 뛰어오는 상상이 그려졌다.
“아냐! 오지 마! 돌아가! 너 받아줄 자리 없어!”
사실 김종훈이 우리 회사로 온다면 나쁠 건 없지만.
하지만 그를 가족처럼 대해주는 SJ 엔터의 이서준 회장에 아직 그를 기다리는 그룹 멤버들이 있는 이상 김종훈에게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나저나 갑자기 웬 피아노래?”
원곡 그대로 내보내면 흥행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방금 들었던 피아노 리믹스 버전도 나쁘지 않다는 게 문제다.
“하나가 만든 곡을 듣다 보니 중음이랑 저음대가 허전해서 보강해 주는 게 좋겠다 싶더라고. 그런데 마침 선우가 피아노를 추천하기에 시도해 본 것뿐이야.”
방선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피아노를 베이스로 넣으니까 확실히 좋아지더라고요. 그런데 윤호 형은 어떤 버전이 좋아요?”
통기타 버전과 이번에 새롭게 편곡된 통기타에 피아노가 더해진 리믹스 버전 중 하나를 골라 달라고 한다.
내가 아는 기억만 생각하면 통기타 버전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피아노가 추가된 버전이 듣기엔 좋은 게 사실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난 강하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하나야. 어떻게 생각해?”
강하나가 빙긋이 웃으며 답한다.
“전 도저히 못 고르겠으니까 그냥 오빠가 골라주세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려 버렸다.
* * *
우린 제4 녹음실 있는 커다란 소파에 둘러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 의견도 좀 들어보자.”
안정적인 성공이 예정된 원래 버전을 고르겠지만 피아노 버전이 보통 좋은 게 아니었으니까.
순간 도란희가 말한다.
“팀장님. 종훈 오빠와 하나를 동시에 띄우는 건 어때요? 조인트 이벤트로 홍보하면 효과가 끝내줄 거 같은데요?”
연락을 받고 녹음실로 내려온 홍보팀 김미혜 대리도 같은 반응이다.
“종훈 씨가 지난 앨범 활동을 갑작스럽게 중지한 덕분에 아직도 이유를 궁금해하는 대중이 많아요. 저도 란희 씨의 의견에 한 표예요. 종훈 씨한테는 죄송하긴 한데 이름을 빌릴 수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 같아요.”
김종훈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뭐 도움만 된다면 내 이름은 얼마든지 팔아도 됩니다. 회장님한테도 이미 말해 뒀으니까요.”
SJ 엔터의 이서준 회장한테 까톡이 미친 듯 날아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 거 같다.
“덕분에 너희 회장님이 계속 까톡 보내오는데 내가 씹고 있다. 아주~ 고맙다.”
“친구 사이에 뭘.”
김종훈은 과거 죽음을 시도한 일 이후 성격이 180도로 바뀌었다.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고 생각이 많은 타입이었다.
하지만 음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아진 탓인지 최근에는 쾌활하고 밝아져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김종훈이 이름을 팔자는 말에 오히려 결정이 쉬워졌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아무래도 하나가 연주하는 원래 통기타 버전으로 가야겠네요.”
다들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설마 김종훈의 이름을 팔아 홍보할 기회를 버릴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윤호야. 진짜로 통기타 버전으로 내려고?”
“어. 솔직히 니가 세션으로 참여하면 홍보는 크게 되겠지만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될 거 같아.”
“왜?”
“강하나의 이름이 네 이름에 가려지는 걸 원치 않으니까.”
“뭐?”
난 다른 매니저들에게도 내 뜻을 알렸다.
“싱어송라이터 강하나란 브랜드를 확립하려면 좋든 싫든 하나는 혼자서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김종훈의 이름과 함께 홍보하게 되면 ‘싱어송라이터 강하나’의 이미지가 약해진다.
단지 피아노 세션으로 참여할 뿐이라고 해도 김종훈의 이름은 강하나의 이미지를 다 덮어 버릴 정도로 파급력이 있었으니까.
그 순간 김미혜 대리가 물었다.
“팀장님. 뜻은 알겠는데 그래도 하나에게 책정된 홍보 비용으로는 얼굴을 알리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요?”
김미혜 대리의 말에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기자들에게 돈 뿌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따로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제 생각대로 되면 기자들한테 홍보 의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효과가 나올 겁니다.”
“어떻게요?”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일단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나는 강하나에게 되물었다.
“하나야. 내 결정은 이런데 어떻게 생각해?”
강하나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말씀드렸잖아요. 전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고요.”
매니저로서는 이런 순간이 가장 고마웠고 가슴 뛰는 순간이다.
내 연예인이 날 믿어준다는 데서 오는 충만감.
덕분에 난 강하나를 보며 빙긋이 미소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김종훈이 애원하듯 말한다.
“윤호야. 그래도 이 곡 좀 살려주면 안 되냐? 피아노 반주는 별도 트랙으로 넣어줄 순 있잖아. 내가 했지만 정말 괜찮게 나왔거든.”
늘 느끼는 거지만 김종훈의 곡에 대한 집착은 방선우와 비슷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같은 반응이다.
“제가 듣기에도 이렇게 묻기에는 너무 아까운데요.”
“예. 팀장님! 저도요.”
나 역시 아까운 건 사실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방법이 한 가지 떠올랐다.
“종훈아.”
“어!”
“네 이름 가려도 되냐?”
“그게 무슨······ 잠깐 설마?”
“그래. 피아노 세션 이름을 가명으로 하면 피아노 리믹스 버전도 공개할게. 단 원곡 나가고 나서 2주 뒤.”
김종훈의 입이 닫혀 버렸다.
설마 자기의 이름조차 쓰지 못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한참 고민하던 김종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할게.”
“진짜?”
“그래. 그나저나 이 살벌한 자식.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름도 못 쓰게 하냐?”
“미안해. 나중에 하나가 싱어송라이터로 인지도를 가지게 되면 그때는 네 이름 찾게 해줄게.”
“어느 세월에?”
난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3년?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3개월만 기다려. 그 안에 모든 게 분명해질 거야.”
그 순간 모두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