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213. 새로운 시작 1
“솔직하잖아.”
이지연 작가는 워낙에 강하고 기가 센 이미지가 있어 다들 말도 잘 못 붙인다.
괜히 말을 둘러대면 호통만 떨어지고.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상대로 솔직하고 담대한 모습으로 다가온 게 마음에 들었단다.
이지연 작가가 김솔잎 작가를 힐끗 쳐다본다.
“솔잎도 기억나지? 우리 유노 처음 만났을 때?”
김솔잎 작가가 춘권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날 우리 작가님이 말단 매니저 하나 생으로 씹어 먹는 날이구나 했죠. 이렇게.”
잘 튀겨진 춘권 하나가 김솔잎 작가의 입에서 와그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순간 이지연 작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셔럽~! 내가 무슨 마녀야? 아무 죄도 안 지은 사람을 씹어 먹게?”
틱틱거린 이지연 작가가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새파랗게 어린 매니저와 신인 배우가 당당하게 구는 게 기특했었어. 그런데 이게 웬걸? 시간이 지날수록 둘 다 보통이 아니더라고?”
회귀한 첫날을 회상하는 이지연 작가였다.
“처음 마음가짐 그대로 변함도 없고 연기 하나에 목숨을 건 모습도 보기 좋아. 그리고 여전히 솔직한 것도.”
난 젓가락을 놓고 이지연 작가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순간 유진이와 미소도 날 똑같이 따라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이지연 작가가 따듯한 표정을 짓는다.
“감사는 무슨. 본인들이 열심히 하니까 이뻐서 그러는 거지. 자자 고개 들어. 누가 보면 내가 우리 유노 미워하는 줄 알겠어?”
이지연 작가의 재촉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재차 물었다.
“그러면 제 부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지연 작가가 피식 웃는다.
“이거 봐. 이거. 하여간 대단하다니까? 그래. 알았어! 넣어준다고 해!”
이지연 작가가 혀를 내두르며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대신에 알지? 나 망신시키면 혼나?”
“좋은 배우들이 아니면 이런 부탁을 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좋아. 내가 앞으로도 좀 까칠하게 굴 때도 있을 거야.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변치 말아줘. 어딜 가도 눈치만 보는 사람들뿐이니까.”
작품을 창작하다 보니 외로운 순간이 많다는 이지연 작가였다.
오늘따라 감성적인 그녀를 보며 알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소가 반대편에 있던 이지연 작가에게 다가가더니 생각지도 못한 짓을 해버렸다.
“미소야. 왜?”
이지연 작가가 자기에게 다가온 미소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미소가 이지연 작가를 꼭 껴안았다.
모두가 깜짝 놀라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지연 작가를 더욱 꼭 껴안았다.
“외로우면 안 돼요!”
이지연 작가의 얼굴이 어찌할 바 모른 상태로 변했다.
“어머! 얘가?”
“나 자주 놀러 올게요! 그리고 작가 선생님도 미소 보러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세요!”
미소의 돌발 행동에 유진이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리려고 한다.
하지만 난 유진이의 팔을 붙들며 잠깐 기다리라 말했다.
이지연 작가가 잔잔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우리 미소. 참 예쁘다.”
마음이 참 예쁘다는 말이다.
“작가 선생님도요!”
이지연 작가가 따뜻한 표정으로 미소를 꼭 껴안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짓는 이지연 작가의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회귀 전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으니까.
날카로운 인상에 직설적인 말투와 드라마에 미쳐 사는 사람.
그리고 때로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이지연 작가였지만 미소에게는 봄날 따스한 햇볕처럼 인자했다.
두 사람의 포옹이 끝나고 난 뒤 이지연 작가는 미소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는 음식을 먹여주기 시작했다.
마치 아기 새에게 모이를 주는 엄마 새처럼.
그렇게 한참 동안 우린 이지연 작가의 집에 머물며 <신의 이름으로>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집을 나오기 전 이지연 작가는 내게 선물 한 가지를 더 안겼다.
* * *
“진짜로······ 됐어?”
굴렁쇠 엔터의 팀장급 회의.
방상영 배우 1실장은 양치성과 박예은 두 사람 모두를 끼워 넣기에 성공했다고 하자 오히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예. PD와 작가님 두 분 모두 오케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명이 아니라 두 명 더 총 네 자리를 넣을 수 있으니 같은 급이면 더 추천해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원 플러스 원이 아니라 투 플러스 투다.
“둘 중 하나만 되어도 다행이다 싶었는데······ 넷? 하하하. 이거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을 다 끼워 넣기에 성공한 데다 TO를 2명이나 더 얻어왔다.
그것도 깐깐하기로 유명한 이지연 작가한테 말이다.
그때부터 부서를 가리지 않고 여러 팀장이 날 향한 구애를 시작했다.
아무리 단역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이지연 작가의 작품.
특히 MBS에서는 <신의 이름으로>를 올 한해 최고의 기대작으로 밀고 있었으니까.
“정 팀장. 우리 송치한 어때? 얘가 요즘 연기에 물이 올랐거든.”
“웃기고 있네. 솔직히 연기는 우리 응기가 한 수 위지! 기회만 오면 크게 될 배운데 그놈의 기회가 안 와서 그렇지.”
“박 팀장. 그건 아니다. 연기만 잘하면 뭐 해? 배우는 일단 탈이 좋아야······”
내 기억에도 없는 배우들의 이름이 쉬지 않고 튀어나왔다.
인생 한 방!
연예계에서는 그 한 방이 유독 많이 있기에 모든 매니저는 한 번의 기회를 소중하게 여긴다.
유진이만 하더라도 한 번의 단역을 성공시키며 지금의 위치를 차지했으니까.
심지어 배우 3실에 속한 팀장들도 자기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하자 김동수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이기철 이사가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방 실장이 2명 꽂았으니까 나머지 두 자리는 배우 2실이랑 배우 3실에서 각각 한 자리씩 가져가도록 하지. 불만들 있나?”
마음 같아서는 우리 배우 2실에 다 몰아주고 싶었지만 회사라는 게 뜻대로 되는 곳만은 아니었다.
강지영 본부장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게 좋겠네요.”
배우 2실과 3실이 각각 한 명씩 TO를 나눠 가지자 그제야 다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칭찬이 이어졌다.
심지어 어떻게든 날 잡아먹으려고 하던 배우 3실의 강명길 팀장도 은근슬쩍 칭찬을 시작한다.
“하여간 우리 정 팀장. 재주도 좋아?”
“투 플러스 투야?”
“수완이 좋다고는 들었지만 천하의 이지연 작가를 살살 녹이다니······”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나선 순간 방상영 실장이 날 보며 군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 눈빛을 덤덤히 받았다.
방상영 실장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건 나쁠 게 없는 일이었으니까.
* * *
강하나의 너튜브 채널 개설과 너튜브 음원 공개는 앞으로 2주 뒤인 7월 18일로 잡혔다.
뮤직비디오 역시 당일 날 공개한 뒤 그날 바로 라이브 스트리밍 방송을 할 생각이었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음악방송 데뷔일.
강하나가 음악방송에 나가는 시기는 강하나와 악연으로 얽혔던 <글로벌 프로듀스 47>의 합격자들이 EVE*ONE 이란 이름의 걸그룹으로 데뷔하는 9월 12일.
그날 음악방송에서 정면 대결을 펼칠 생각이었다.
오디션 합격자와 불합격자의 대결이라는 소재를 언론에 풀면 그 자체로 마케팅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고 일단 코앞으로 다가온 너튜브 업로드용 뮤직비디오 제작 상황이 더 중요했다.
난 회의에 참석한 도란희에게 물었다.
“란희야. 뮤비 촬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니?”
도란희가 곧장 대꾸한다.
“일단 인사동 카페에서 1차 촬영은 끝났고요. 내일 부안으로 내려가서 삼일 정도 촬영하면 거의 끝날 것 같아요.”
“빠진 건 없지?”
“예. 일단 시키신 건 다 했어요.”
회귀 전에도 강하나의 첫 번째 뮤직비디오는 단출했다.
뮤비 감독 이석형이 자주 가던 인사동 카페와 부안의 넓은 간척지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는 게 끝이니까.
돈이 없어서 단 두 곳에서 찍은 거였지만 팬들은 감성적이란 호평을 늘어놓으며 환호했다.
그래서 그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라 했더니 다들 불안한 기색이다.
그때 도란희가 손을 들었다.
“저 한마디 해도 되나요?”
“어.”
“사실 지금이라도 다 바꿨으면 좋겠어요. 하나에게 진짜 미안해 죽겠단 말이에요.”
난 빙긋이 웃으며 이석형 감독의 실력을 물었다.
“그래서? 감독이 실력도 없어 보이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면?”
몇 번을 추궁하자 망설이던 도란희의 입에서 방언이 터졌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그래. 말해봐.”
“감독님한테는 아~무 불만이 없어요. 성실하고 센스도 있으신 거 같고요. 그런데 뮤비 제작비에 3천만 원은 너무한 거 아닌가요! 내가 해외 로케를 해달래요? 탑 스타를 섭외해 달래요? 나 우리 하나 망하면 팀장님한테 들러붙어서 한 달 동안 잔소리 퍼부을 거예요! 이게 다 팀장님 때문이라고요! 헉헉!”
숨도 쉬지 않고 말한 탓에 도란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숨 좀 쉬고 이야기하지.’
난 빙긋이 웃으며 도란희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러면 내기할래? 잘 되나 안 되나?”
도란희가 흠칫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 또 이렇게 나오면 약해지는데······. 박수무당 정 스타. 아 진짜. 비겁하게 감으로 승부나 하고.”
“왜? 겁나? 쫄?”
쫄았냐고 도발한 순간 도란희가 발끈했다.
“와~ 진짜 우리 팀장님. 승부욕을 자극하시네. 좋아요! 대신 내가 이기면 뮤직비디오는 다시 만들어 줘요. 예산은 최소 3억!”
“미친······. 3억이 뉘 집 애 이름이야?”
“쫄리면 뒈지시든지!”
난 도란희와 시선을 마주하며 외쳤다.
“콜! 3억. 내가 지면 빚을 내서라도 그 돈 만들어 준다. 대신 내가 이기면 넌 뭐 해줄래?”
순간 도란희가 씨익하고 웃는다.
“뭐든지 말만 하세요.”
“우리 란희 자신감 좀 보소. 오케이. 내가 이기면 넌 지금 하는 일의 딱 2배만 더 하는 거다. 알았지?”
순간 도란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사라진다.
“팀장님! 지 지금에서 두 배요?”
“어. 그러면 얼추 영진이랑 업무량이 같아질걸? 그리고 잊지 마. 이거 네가 먼저 내기하자고 한 거다?”
도란희가 자기 머리를 콩콩 친다.
“미 미쳤어! 나 노조에 다 이를 거예요!”
“우리 회사는 노조 없는데?”
“그럼 내가 결성하고 만다 진짜!”
“어. 수고. 노조 만들어지면 나도 가입할게. 그리고 네가 거기 위원장 해. 난 일반 조합원 할 테니까 그때 날 갈구던지.”
“지 진짜죠?”
“그래.”
그 이전에 노조를 만들 시간이나 있을까 모르겠다.
하여튼 뮤직비디오를 2차로 만들 자금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는지 도란희의 모습이 의기양양했다.
그 순간 괜스레 장난기가 돌았다.
“그런데 란희야. 너 요즘 영진이랑······”
도란희가 갑자기 정자세를 취한다.
“예? 영진 오빠랑 뭐가요? 아무것도 한 거 없는데요? 아닌데요?”
어색하다. 란희야.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몸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있잖아.
썸을 타긴 타나 본데 일단 모른 척해 줘야겠다.
사실 매니저들은 바쁘게 살다 보면 연애는 꿈도 못 꾼다.
그런데 이렇게나마 이어질 수 있으면 좋은 상황이니까.
‘힘내라 란희야.’
그때 은지유 대리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팀장님. 그런데 혹시 ‘글로벌 프로듀스 47’ 시청률 보셨어요? 초반부터 만만치 않게 올라오던데요.”
“최신화 시청률이 2.8%였던가요?”
은지유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6월 19일 첫 방송을 한 <글로벌 프로듀스 47>은 현재 3화까지 공개된 상태다.
원 기획자인 안준희 PD는 털어버렸지만 대신 메인 PD로 실력파 최상현 PD가 왔다.
그 덕인지 내가 알던 것보다 시청률도 높아졌고
강하나를 비롯한 박예슬과 최소영은 현재 둘 다 A등급 판정을 받아 이슈 몰이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EVE*ONE이라는 11인조 그룹에 들어갈 게 확실했다.
이미 SNS에서 반응이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은 대리님. 혹시 하나한테 박예슬이랑 최소영과 정면 대결을 할 거라고 알렸나요?”
“아뇨. 아직 그 이야기는 안 했어요.”
“예. 괜히 미리 걱정시킬 필요 없으니까 그건 그때까지 보안으로 해주세요.”
강하나는 현재 너튜브 스트리밍 일정을 빼고 음악방송 데뷔 일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하나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소리에 당장 보러 가자 말했다.
“일단 녹음실로 내려가서 상황부터 확인하죠.”
“예. 팀장님.”
뮤직비디오에 대한 회의를 끝낸 우린 강하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지하 녹음실로 향했다.
* * *
지하 2층에는 4개의 녹음실이 존재한다.
그중 1번 방이 가장 관리가 잘 되어 있었기에 방선우와 장예빈은 그곳에서 살면서 작업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1번 방이 아닌 4번 방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들 왜 저기서 연습해?”
“글쎄요? 어제까지만 해도 1번 방에서 연습했는데······”
녹음실로 쓰이는 4개의 방 중에서 4번 방은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녹음 부스도 다른 3개를 합친 것만큼 크고.
하지만 다른 방에 비해 시설이 조금 떨어지는 곳이었다.
‘왜 4번 방으로 간 거지?’
대체 왜 이제껏 잘 사용하던 녹음실을 옮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가수 1실에서 비키라고 한 건가?’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도란희를 재촉했다.
“어서 가 보자. 란희야.”
“예. 팀장님.”
그런데 그 순간.
4번 방에서 흘러나온 강하나의 노랫소리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