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2화
212. 끼워 넣기
『왜? 내 미래는 안 보여?』
『응!』
『진짜야?』
『그 그래.』
진공주는 빠르게 대답하는 미소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역들의 연기라고 하기에는 손에 긴장이 흐를 정도로 잔뜩 날이 서 있는 광경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진공주가 갑자기 짙은 웃음을 머금기 시작했다.
눈은 날카롭게 좁혀지고 입꼬리를 올린 채로.
『근데 있잖아. 너 왜 이렇게 몸을 떨어?』
섬뜩한 표정을 지은 진공주의 질문에 미소가 침을 꼴딱 삼켰다.
그 순간 진공주 또한 연기력이 늘어났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제법인데?’
아마도 미소 때문에 진공주의 연기자로서 능력이 발아해버린 모양이다.
그때였다.
떨고 있던 미소가 입술을 앙다물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어? 이건 대본에 없는 내용인데?’
미소의 얼굴에 공포가 천천히 지워지더니 이내 애잔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미소의 행동에 진공주가 흠칫하고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발 더 앞으로 다가가더니 진공주의 뺨을 오른손으로 어루만졌다.
『포기하지······ 마. 포기하면 안 돼. 알았지 은소야?』
미소는 어린 ‘청명’ 그 자체가 되어 ‘청명’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 덕에 상대의 연기에 맞춰 어렵지 않게 애드립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대단하네 우리 미소.’
미소는 미래를 바꿀 수 없는 어린 무당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며 울음을 삼켰다.
들썩이는 미소의 어깨를 멍하니 쳐다보던 진공주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입술을 꽉 깨문 진공주는 자신의 볼에 닿아 있는 미소의 손을 떼 내었다.
『네 네가 본 거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 알았지? 안 그러면 나 너 가만 안 둬!』
미소와 진공주의 섬세한 감정 연기에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은 멍하게 쳐다만 볼 뿐이었다.
* * *
“컷! 오케이! 이야~ 이거 성인 배우들이 긴장해야겠는데?”
김성운 PD가 컷을 외치며 극찬을 이어갔다.
그 순간 진공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소의 연기에 빨려 들어가 자신도 모르게 한계 너머의 힘을 발휘한 까닭이다.
그 모습을 본 스태프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 미소 최고다!”
“휘유~ 공주도 만만치 않은데?”
“다들 수고했어 얘들아!”
시청자들이나 현장 스태프들이나 아역들에 대해서는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 떨어지는 아이들이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하고 표현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미소가 보인 연기 덕에 상황이 급변해 버렸다.
“와. 이거 역대급 나오겠는데?”
“이 친구 당연한 소리를 왜 해?”
누군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미소의 연기력은 상대 배역인 아역들을 혼돈에 빠지게 할 정도로 흡입력이 있었으니까.
환호가 벌어지는 사이 미소는 바닥에 주저앉은 진공주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있던 진공주가 미소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순간 스태프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잘했어! 얘들아!”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인사를 건네며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스태프 선생님들!”
미소는 내가 가르쳐준 대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마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진공주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미소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시작했다.
“쟤들이 무슨 이야기 하는 거지?”
함께 있던 정상봉도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처음엔 저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미소 역시 진공주와 뭔가를 귓속말로 속삭이더니 다른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촬영을 마무리 지은 미소가 내게로 뛰어왔다.
“삼촌~!!”
“뛰지 마. 다칠라.”
색동한복을 입은 미소가 치마를 풀썩이며 뛰어왔다.
두 팔을 벌린 미소가 내게 달려와 안겼다.
“어이쿠.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미소가 싱긋이 웃는다.
“나 달리기 일등이라서 안 다쳐요!”
난 흐트러진 미소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칭찬을 퍼부었다.
마음 같아서는 미소를 업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보는 눈이 많아 가까스로 참을 수가 있었다.
“미소. 오늘 연기 너무 잘하던데?”
“진짜요?”
“응. 오늘 아역 연기자 중에서 최고였어. 미소가 짱이었어!”
“헤헤. 감사합니다.”
미소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어린다.
“그런데 미소야. 아까 공주랑 무슨 이야기 했어?”
미소가 주저주저한다.
“왜? 비밀이야?”
한참 내 눈치를 보던 미소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알았어. 안 물을게.”
하지만 미소가 정상봉을 힐끔 쳐다본다.
잠깐만.
설마 나한테는 말해주겠다는 뜻인가?
난 고개를 갸웃하는 정상봉을 향해 말했다.
“상봉아. 미소 먹이게 생수 한 병만 가져다줘. 얘가 연기하느라 목이 마른 거 같으니까.”
“아 예. 팀장님.”
정상봉이 부리나케 승용차로 뛰어간다.
그제야 미소가 안도하며 내게 귓속말을 시작했다.
“공주가요. 나보고 진짜 친구 하재요.”
순간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그래?”
미소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해맑게 씨익 웃는 미소의 표정을 본 순간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소미와 진공주.
두 악연의 고리 중 하나가 끓기는 모양이다.
운명이 바뀌어버린 진공주는 미소 덕분에 성격마저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미소는 뭐라고 대답했어?”
“알겠다고 했어요. 공주랑 싸웠을 땐 화도 났지만 그래도 사이좋게 지내야 하잖아요. 원장 선생님도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어요!”
순간 미소가 마더 테레사나 부처의 환생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미소는 용서할 수 있어? 엄마한테 그렇게 나쁜 말을 했는데도?”
미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엄마도 용서해주라고 했어요. 공주는 아직 어리니까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요.”
“갱생? 그런 말뜻도 알아?”
“네! 요즘 나 공부 많이 해요.”
미소는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느라 공부를 많이 한다고 자랑을 해댔다.
그러고 보니 이제 몇 개월만 있으면 미소도 학교에 입학할 순간이다.
회귀한 이후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되었나 보다.
“그래. 할 수만 있으면 공주랑도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지.”
“응!”
물론 커가면서 진공주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켜봐 주자 싶었다.
미소의 뜻을 이뤄주는 것도 매니저인 내 역할이니까.
“그러면 우리 미소 학교 입학 선물도 미리 보러 갈까?”
“진짜요?”
“응. 삼촌이 다~ 사줄게.”
“신난다!”
미소가 방방 뛰는 사이 정상봉이 생수와 미소가 좋아하는 과즙 음료를 가지고 왔다.
그때였다.
김성운 PD가 성공적인 촬영을 축하하며 인형을 하나 가지고 왔다.
미소가 좋아하는 파워터프걸 캐릭터 인형이다.
“우리 미소 덕분에 촬영이 편했어. 고마워?”
미소가 행복한 모습으로 웃는다.
“우와! 파워터프 블로우다! 집에 나 버블티랑 버터씨 있는데. 이제 블리츠랑 버니지만 있으면 다 모여요! 그럼 사이좋게 함께 지낼 텐데!”
미소의 순수한 답변에 김성운 PD가 당황해 외쳤다.
“그 그래? 그럼 블리츠랑 버니? 뭐?”
“버니지!”
“응. 그래. 그것도 사줄까?”
순간 미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짜요? 감사합니다! PD 아저씨!”
미소는 가장 좋아하는 파워터프걸의 캐릭터 인형을 안고 날아갈 듯 방방 뛰었다.
설마 이런 선물은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말이다.
졸지에 인형 두 개를 더 사주게 되었지만 김성운 PD의 표정은 환하기만 했다.
미소가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세상을 다 가진듯한 미소로 보답해 주고 있었으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성운 PD가 드라마의 성공을 자신했다.
“미소의 열연이 초반 시청률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 팀장님.”
“PD님이 지도를 잘해주신 덕분이죠. 그나저나 편집하느라 고생 많으시겠네요.”
“하하하. 워낙 소스가 좋아서 편집도 문제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추켜 올리며 분위기가 한껏 훈훈해졌다.
그리고 난 기다렸다는 듯 배우 1실의 방상영 실장에게 부탁받은 대로 양치성과 박예은을 언급했다.
“PD님. 혹시 쓸 만한 배우 몇 명 추천해 드려도 될까요? 실력 하나는 빠지지 않는 배우들입니다.”
김성운 PD가 고개를 갸웃한다.
“왜요? 정유진 씨처럼 끝내주는 배우가 또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회사에서 공을 들여 키우는 친구들인데 요즘 좀 힘들어하길래요.”
“하하하. 그럼 이건 내가 술 한 잔 얻어먹어야 할 건이네요.”
청탁이라는 걸 알고도 호의적인 반응이다.
난 급히 준비한 프로필을 내밀었다.
두 사람 모두 향후 명품 조연으로 커나갈 싹수 있는 배우들이므로 소개에 거리낌이 없었다.
프로필 사진을 유심히 살피던 김성운 PD도 일단은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두 분 모두 개성 있는 외모들이라 괜찮네요. 정 팀장님 추천이라면 연기력은 안 봐도 뻔할 거고.”
“물론이죠. 연기는 자신 있습니다. 제 목을 걸라고 해도 걸 수 있습니다.”
“하하. 뭐 이런 일로 목을 거십니까? 하여간 3화와 4화에 나올 악역과 피해자를 맡으면 딱 될 거 같은데 이 작가님이 걱정이네요. 그분이 반대하시면······. ”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작가님한테는 제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김성운 PD가 피식 웃는다.
“그러고 보니 이 작가님이 정 팀장에겐 이상할 정도로 너그러우시던데 앞으로 이 작가님 설득할 일이 있으면 정 팀장이 좀 나서 주시면 좋겠네요. 서로 돕고 삽시다.”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설마 어려운 부탁은 내게 떠넘기려고?
“하하하. 그 그건 좀······”
“에이. 서로 돕고 살자니까요? 하하하.”
하지만 김성운 PD라면 충분히 그걸 감당할 가치가 있었다.
앞으로도 그의 앞길에는 성공만이 가득할 테니까 말이다.
* * *
아역 촬영이 끝난 뒤 유진이와 미소를 데리고 이지연 작가의 집으로 향했다.
미소의 데뷔를 축하하기 위해 이지연 작가가 우리를 불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김솔잎 작가와 김수희 선생님도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소가 현장에서 입었던 한복을 그대로 입고 집으로 들어가자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특히나 이지연 작가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미소를 반겼다.
“김 PD에게 미리 연락받았어. 오늘 우리 미소가 그렇게 연기를 잘했다며?”
미소가 온몸을 배배 꼬았다.
“헤헤. 그냥 하던 대로 한 것뿐인데······”
이지연 작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참 무서운 말을 태연하게도 한다. 하여간 배우는 타고나는 거라더니 하여간 저 집안에 뭐가 있긴 있나 봐.”
이지연 작가의 말에 김솔잎 작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잠시 후.
‘화룡’에서 배달시킨 음식들이 도착했다.
‘화룡’은 고급 중식점이라서 배달을 하지 않는 것 아니냐 물었더니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젓는다.
“한동안 심부름센터를 이용해 시켰더니 이젠 그냥 자기들이 직접 배달해 주더라고. 내가 자주 이용해 줬더니 고마워서 그런다나?”
쉽게 말해 단골이라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러자 김솔잎 작가가 잔소리를 시작한다.
“작가님. 요즘 맨날 중식만 드시죠? 식습관 안 바꾸시면 병원 간다니까요? 또 체중 관리도 하셔야죠!”
“셔럽~! 얘는 눈만 마주치면 잔소리야! 나 아직 날씬해!”
이지연 작가는 듣기 싫다며 귀를 막고 화룡에서 온 음식 포장을 벗기기 시작했다.
한창 음식을 먹던 도중 난 이지연 작가에게 양치성과 박예은을 작품에 끼워 넣을 수 없냐고 조심스레 말했다.
유린기에 레몬즙을 뿌리던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갸웃한다.
“회사에서 시켰어?”
난 이지연 작가의 말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솔직담백하게 털어놓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예. 특별히 부탁하길래 거절하기 힘들었습니다.”
이지연 작가가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작가님이 얼마큼 사람을 뽑는 데 조심하시는지 아는데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불편하시면 들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순간 이지연 작가가 씨익 웃으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왜 유노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여? 탓하려는 거 아냐. 기특해서 그래.”
기특하다고?
내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지연 작가가 씨익 웃으며 그 이유를 말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