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210. 셋업
굴렁쇠 엔터에 속한 배우들은 어지간해서는 자신을 담당하는 ‘실’을 옮기진 않는다.
매니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 해당 실내에서 다른 매니저로 교체해 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관리하는 실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돈이 되는 배우들에게는 웬만하면 회사가 양보해준다.
그런데 S급인 성호준이라면?
원하는 대로 담당하는 실을 변경해달라고 요청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성호준에게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겠지만.
하지만 그거야말로 내가 자신 있는 일이었다.
난 다이어리를 통해 성호준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모조리 알고 있으니까.
이기철 이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김동수를 거들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우리 김 실장이 오래간만에 홈런을 쳤군. 성호준 씨 같은 거물이 우리 회사로 와준다면야 두 손 들어 환영이지. 그보다 환영연이라도 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강지영 본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배우 3실 차원에서 추진해보도록 하세요.”
이기철 이사가 씨익 웃는다.
“하하하. 오래간만에 본부장과 생각이 일치하는군. 아주 좋아. 암.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
김동수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저희 배우 3실에서 조촐하게나마 배우 맞이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분도 확정되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김동수는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날 거만하게 쳐다본다.
“자자. 정 팀장. 그러면 원래 하루 이야기로 돌아가서 얼마만큼 푸시해 줄 건지 이야기해 봐야지. 브리핑이나 계속 좀 해봐.”
난 성호준을 데려오겠다는 속내를 감춘 채 브리핑을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예. 실장님.”
하루를 어떻게 푸시할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김동수를 비롯한 배우 3실은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앞으로 닥쳐올 일도 모른 채 말이다.
* * *
강지영 본부장의 방.
구성철 실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부장. 성호준급으로 두 명 더 온다면 아마도 최성락이나 박희태 정도 아니겠어? 그 친구들도 이제 계약 종료될 시기잖아.”
곧 재계약 시기가 돌아오는 탑 스타 리스트 정도는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회사면 기본적으로 만들어 둔다.
영입 후보 명단을 꼼꼼히 살펴보던 강지영 본부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겠네요. 그 정도가 아니고는 김 실장이 그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럼 우리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영입을 좀 더 늘려야 하는 거 아닐까?”
강지영 본부장이 한숨을 내쉰다.
“선배. 2실은 박은성 씨 장준혁 씨 데리고 오느라 책정된 예산을 거의 다 썼잖아요.”
“그 그래. 나도 알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다음 해 예산을 미리 좀 당겨쓰는 건······.”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무리하지 말고 차분히 하세요. 그러다 실수라도 하면 이기철 이사한테 빌미만 줄 수 있으니까.”
구성철 실장에 소파에 몸을 기댔다.
“휴우. 이거 이제 우리 2실이 좀 치고 나가나 싶었는데 태클이 팍하고 들어오네.”
하지만 심각한 두 사람의 표정에도 난 싱글싱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정 팀장은 왜 그렇게 웃고만 있어요?”
“아. 김 실장님이 급해졌다 싶어서요.”
“김 실장이 급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그동안 배우 2실에 관한 일이라면 코웃음만 치며 비웃던 게 김동수 실장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저희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자랑을 하지 않았습니까?”
회귀 전 구성철 실장은 팀장급 이상 회의에 참석했을 때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돌아왔었다.
까마득한 후배인 김동수에게 매번 실적으로 까였으니까.
그래서 팀장급 이상의 회의가 있었던 날은 배우 2실의 매니저들은 구성철 실장에게 말도 걸지 않았었다.
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피식 웃는다.
“하긴 이제 배우 2실도 3실을 위협할 정도가 되긴 했죠. 장준혁 씨가 활동을 재개하면 크게 밀리지도 않을 거고요.”
구성철 실장이 어이가 없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 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구나. 허허.”
구성철 실장이 웃자 분위기가 밝아졌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루 연기 준비도 시켜야 하고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네요.”
그 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내게 물었다.
“잠깐만요. 그전에 강하나 씨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나요?”
“곡 준비는 다 끝났고 뮤직비디오만 찍으면 됩니다. 너튜브 채널은 편집자를 구하는 중이고요.”
“그쪽도 착착 진행 중이네요. 그런데 요즘 예산이 부족해요? 뮤직비디오에 3천만 원밖에 안 쓴다고 들었는데?”
“아니요 충분합니다. 일부러 저예산으로 찍는 겁니다.”
회귀 전에도 강하나가 찍은 저예산 영상이 오히려 이슈가 되었었다.
그래서 난 최대한 그 느낌을 살리는 방식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으라고 지시를 한 상태였다.
“알았어요. 정 팀장이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빠진 데가 없나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예. 본부장님.”
강하나에 관한 보고까지 마치고서야 본부장실을 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난 두 사람에게도 성호준에 관해서는 일절 털어놓지 않았다.
그 일은 은밀히 이뤄져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 * *
성호준의 현재 매니저는 성영준이라는 그의 친동생이다.
운동선수 출신의 성영준은 올해 25살인데 몇 다리만 거치면 만날 수 있는 인물이다.
난 그 성영준을 통해 성호준과의 접점을 만들 생각이었다.
성호준을 배우 2실로 끌어오기 위해서.
‘기분이 묘하네. 호준 형을 다시 만나다니······.’
성호준이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감독과 작품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는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거기다 그가 어떤 작품으로 흥하고 또 어떤 작품으로 실패하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바로 그와 관련된 기록이 내 다이어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8월 15일]
-PM 03:00 배우 3실 이덕형 이한수 감독의 <천벌> 주연 오디션. (보고 사항 : 성호준이 주연 오디션에 나왔음. 이덕형이 낙점되기는 어려울 듯)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11월 22일]
-PM 12:00 성호준 주연의 <천벌>. 박스오피스 70만 명. 스크린 아웃.
당시에 이덕형이란 배우 3실의 배우를 <천벌> 오디션에 데리고 갔을 때 탑 스타 성호준이 현장에 나타났었다.
그 순간 이덕형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은 오디션을 반쯤 포기해 버렸다.
성호준에 비하면 연기력이나 인지도가 비교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천벌>은 수 없는 제작상의 난항을 겪다 <경계 너머로>와 맞붙으면서 제작비 150억 대작치고는 초라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일단 천벌을 피하게 해주고 관심을 끌어야겠네.’
그때였다.
“팀장님. 뭘 보고 그리 웃으세요?”
외근을 나갔다가 온 이영진의 질문에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루가 주연 따낸 게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막 나오네?”
“하긴. 데뷔와 동시에 주연! 거기다 한 화당 출연료 250만 원. 캬하~ 끝내주십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부가 찐해? 뭐 잘못한 거 있어?”
이영진이 딴청을 피운다.
분명히 일 하나를 빼먹어서 보이는 눈빛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아 그리고 오늘 회의에서 성호준이 우리 회사로 올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어.”
이영진을 대리로 키우기로 한 순간부터 팀장급 회의에서 얻은 정보는 공유하곤 했었다.
순간 이영진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호준이 형이 우리 회사로 온다고요? 와 나한테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전화해 봐야겠다.”
“뭐야? 호준이 형? 너 성호준 씨랑 친해?”
이영진이 성호준이랑 친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영진과 동기였지만 회귀 전에는 워낙 바빴기에 서로 이런 대화를 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영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예. 아 정확히는 호준이 형 동생 영준이랑 친하죠.”
“그래? 어떻게 친해졌는데? 뭐 학교 선후배라도 돼?”
“아뇨. 영준이랑은 매니저들 볼링 동아리 모임에서 친해져서 가끔 그 집에 놀러 가곤 해요.”
이영진은 그런데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며 투덜거렸다.
의외의 수확이다.
잘하면 성호준을 내 팀으로 끌어오는 걸 더 앞당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영준 그 친구. 나한테도 소개 좀 해줄 수 있을까?”
이영진이 날 힐끗 쳐다본다.
“설마······?”
“뭐가?”
“호준 형을 우리 배우 2실로 끌어오려는 거 아니죠?”
“쉬! 조용히 해.”
놀란 이영진의 눈이 큼지막해진다.
“팀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알아. 하지만 강제로 데리고 오고 그러려는 거 아냐. 평상시에 미리미리 관계를 트려는 거야.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올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
“와 대박이다. 그런데 팀장님. 그러면 배우 3실이 죽자고 덤벼들 거 같은데요?”
“어차피 장준혁 씨를 가로채려고 할 때부터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먼저 걸었어.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애들을 노리고 있을걸?”
잠시 멈칫거리던 이영진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배우 3실이라면 그럴 만도 하죠. 우리 2실 배우들이 팀장님한테 푹 빠져 있어서 못 빼가는 거지.”
“하여간 성호준 씨한테 내 소문 슬쩍 흘려봐. 그쪽에서 나한테 찾아오게.”
“알겠어요. 영준이랑 자주 만나서 셋업 한번 해볼게요.”
“오케이. 대신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거다?”
“당연하죠.”
그런데 이영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의외로 업계 소식을 많이 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너 제법 발이 넓은가 보네? 매니저들 볼링 모임이라는 곳에 대체 매니저들이 몇 명이나 모이는데?”
“글쎄요. 때에 따라 다른데 많게는 30명까지도 모여요. 볼링을 핑계로 술 마시는 모임이긴 하지만요. 아 저 당구랑 사이클 모임도 나가요.”
“뭐?”
“왜 놀라세요? 그동안 계속 나갔는데?”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매니저 업무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모임까지 나갈 시간이 있다니.
“그러면 너 혹시 최성락이랑 박희태에 관한 정보도 알 수 있어?”
“가능할걸요?”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는 이영진을 본 순간 녀석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강남 보험왕 유진실 여사.
이영진의 성격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협상력 또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대신 이거는 장어 덮밥으로 안 되는 거 아시죠?”
“응?”
“설마 공짜로 부려먹으실 생각 아니겠죠? 과외 근무인데?”
“어쩌라고?”
“뭔가 제시를 하셔야죠. 그래야 저도 흥이 나서 움직이죠.”
이영진이 맛있는 걸 사달라는 듯 입맛을 다신다.
“······돼지갈비?”
“와 진짜 너무하다. 나 안 해!”
이영진이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쓴다.
못된 다섯 살이 마트에서 누워서 떼를 쓰는 것처럼 의자에 몸을 기대고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어대면서.
누가 잘못했는지를 떠나 꿀밤을 먹이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다.
하지만 겨우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고 외쳤다.
“한우?”
순간 이영진이 자세를 바로 하고 날 쳐다본다.
“콜!”
이러다가 대한민국 한우 사육 농가는 내가 다 먹여 살릴 것 같다.
도란희랑 붙어 다니더니 한우를 외치는 게 습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매니저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이득이다.
“넌 앞으로 도란희랑 같이 붙어 댕기지 마!”
하지만 이영진은 씨익 웃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 *
3층 옥탑방 앞에 펼쳐진 평상에서 해물파전을 구워놓은 채 정인지 주인아줌마와 유진이 그리고 미소와 함께 하루의 <먹방의 대가>에 주연 확정을 축하했다.
“축하해! 하루야!”
“우리 하루 이제 주연배우네?”
“하루 오빠. 축하해!”
이사를 온 이후 주로 모이는 곳은 TV가 필요할 때면 1층 거실이고 나머지는 무조건 3층이다.
하루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나 무조건 본방 시청할게.”
환호를 보낸 우린 해물파전과 콜라 사이다를 나눠 먹으며 축하 파티를 이어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해물파전을 먹던 미소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삼촌! 나는 먹방 프로 언제 잡아줘요?”
지난번 미소가 그림 그리기 프로를 잡아달라고 했을 때 먹방 프로에 나가자고 관심을 돌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잡아놓았던 약속은 당시 PD가 자기 딸을 내보내겠다고 말해서 무산되어 버렸다.
그나마 이지연 작가가 아역 ‘청명’ 역을 잡아준 덕에 미소는 더는 먹방 프로에 관해 묻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역 배우들의 촬영 마지막 날이 되자 그 기억을 떠올린 미소였다.
역시 우리 미소.
기억력이 좋다.
“삼촌. 나 먹방 나가려고 숟가락이랑 젓가락도 사놨어요!”
먹방을 위해 숟가락과 젓가락을?
미소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쳐다본 순간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이 번뜩이며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