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화
21. 오늘은 체리블라썸 2
김밥백화점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한명호 팀장이 물었다.
“진짜 용꿈이었다고?”
“예. 진짜라니까요?”
조금 전.
샵에 있는 돈을 더 써서라도 체리블라썸의 헤어스타일링에 힘 좀 주자 말했다.
한명호 팀장 몸통만 한 용이 하늘 위로 승천하는 꿈을 꿨다면서.
그러자 한명호 팀장은 못 이기는 척 아이들의 헤어스타일링에 추가 비용을 지불했다.
연예계에선 가끔 이런 미신 같은 것에 의존하는 때가 있었다.
그렇게라도 뭔가에 기대야 할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은 일어나니까.
나는 양은 물컵의 물을 한 번에 들이켜며 타는 목을 달랬다.
아 양심에 찔린다.
“하여간 그 꿈이 들어맞았으면 좋겠다. 요즘 회사에서 압박이 장난 아니거든.”
“무슨 압박이요?”
“······이런 말을 너한테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회사에 여성 아이돌 팀이 2개나 있을 필요가 있냐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어. 그걸 우리 실장님이 힘겹게 막고 계시거든.”
가수 1실에는 쁘띠모와 1위 경쟁을 하는 최고의 걸그룹인 골든로드가 있다.
반면 2실의 체리블라썸은 2군의 끝 언저리.
두 팀이 벌어들이는 돈의 차이를 생각하면 당장 체리블라썸을 해체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체리블라썸을 직접 본 내 결론은 다르다.
곡 하나만 제대로 잡으면 확실히 뜨고도 남을 인재들이니까.
“샵에 들어가는 비용도 솔직히 이달에 책정된 예산은 이미 한참 오버했는데······ 정 안되면 내 돈으로 메꾸려고 받아들인 거야. 우리 윤호 꿈 한 번 사 보려고.”
머리를 긁적이는 한명호 팀장을 보니 돈을 쓰기 전에 왜 그리 고민을 했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잘되어야 하는데 세상은 반대다.
더 독하고.
더 못되고.
더 양심 없는 인간들이 잘되는 곳이 연예계 아니 인간 세상이니까.
“그러면 제 꿈 사셔야죠. 자~ 꿈 사세요~.”
가짜 용꿈이면 어떠랴.
희망을 파는 건데.
두 손을 내밀자 한명호 팀장은 그걸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곤 양손을 품에 끌어안았다.
“오냐. 고맙다. 그리고 든든하게 먹어둬라. 온종일 밥 못 먹을지도 모르니까.”
한명호 팀장이 메뉴판을 보며 음식을 시키기 시작했다.
“이모 여기 순대국밥 하나랑 돈가스 하나랑 김밥 두 줄에 라면 2개······”
전생에 푸드 파이터였나?
아니 도대체 음식을 몇 개를 시키는 겁니까?
꿈값이라는데 하마터면 밥 먹다가 배 터질 뻔했다.
* * *
김밥백화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오네요.”
“아무래도 폭설이 오려나 보다. 곧 길이 막힐 것 같으니 서두르자.”
역시나 12월 24일에 있었던 일들이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명호 팀장과 샵으로 돌아가자 포인트를 제대로 준 스타일링이 끝나 있었다.
검은 생머리의 우연희는 붉은색 피스로 악센트를 줘서 섹시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양은비에겐 노란색 피스를 달았는데 부드러운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었다.
갈색의 긴 생머리를 가진 은아에겐 은색 피스와 진주를 달고 머리카락을 꼬아 여신 느낌을 살렸고 세리는 푸른색 큐빅이 박힌 실핀 2개를 옆으로 고정해서 귀여운 느낌을 살려 놓았다.
거울을 보는 아이들도 다들 만족스러운지 활짝 웃고 있었다.
“이쁘다.”
“언니 이거 봐라~? 귀엽지.”
“그래 귀여워. 근데 세리야. 너 이빨 사이에 김이 낀 것 같은데······”
우연희가 조심스레 말하자 세리가 화들짝 놀랐다.
“꺄아악! 그걸 왜 이제 말해!”
“이제 봤으니까?”
양은비가 대신 대답하며 피식하고 웃었다.
“아 진짜! 은비 언니 진짜 못됐어!”
“말해 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볼을 부루퉁하게 불리던 세리는 거울을 보더니 다시금 배시시 웃는다.
“······근데 다시 봐도 이쁘다. 힛.”
나쁜 기억은 빨리 잊자는 참 편한 인생 철학을 가진 세리다운 반응이다.
체리블라썸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한명호 팀장도 만족스러운 눈치다.
“샵에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셨네.”
그사이 난 아이들의 꾸미지 않은 생생한 모습을 폰 카메라에 담았다.
이런 사진 하나하나가 홍보용으로 쓰이기 딱 좋으니까 말이다.
* * *
서둘러 출발한 보람이 있었는지. 도로가 빙판이 되기 전에 여의도에 있는 KBC 신관 홀에 도착했다.
서둘러 아이돌 대전의 대기실로 들어가려는데 한명호 팀장이 내게 지시를 내렸다.
“난 스태프들 만나서 커피와 도넛이라도 돌리고 올 테니까 넌 얘들 데리고 선배 가수들 대기실에 가서 인사나 좀 시켜라. 대기실 위치는 알지?”
“예. 저번에 몇 번 돌아봤습니다.”
“도는 순서는 알고?”
“에이 그 정도야 알죠.”
“그러면 아예 무대 전 일정은 니가 처리할래? 나는 PD를 만나서 딜을 좀 해 보려고. 내가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성과를 좀 내야지. 귀한 꿈도 샀는데.”
아 또 양심에 찔리는 소리를 하시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그래 그럼 오늘 힘 한번 내 봐야지! 아자!”
내가 나서서 부추긴 덕인지 한명호 팀장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래는 아직 그대로지만 주변 상황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대기실에 도착한 체리블라썸은 간단한 짐 정리를 마쳤다.
“매니저 오빠. 지금 바로 가실 건가요?”
먼저 질문을 한 건 우연희다.
헤어스타일에 힘을 팍 줘서 그런지 전에 없이 자신감이 팍팍 샘솟는다나.
그 덕인지 우연희의 얼굴이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여간 이 정도라면 무대에서 찍덕들에게 찐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잠깐만. 나 일정 좀 확인하고.”
난 폰을 꺼낸 뒤 V10에 적힌 오늘의 일정을 재차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09:30 쁘띠모 백스테이지 합동 무대 결원 발생.
-PM 11:00 체리블라썸 3집 앨범 제작비 삭감 통보
오늘 KBC 방송국에선 연말 특집 생방송 아이돌 대전이 펼쳐진다.
8시부터 방송되는 1부에는 2군 아이돌들이 출연한다.
시청률이 잘 나오는 9시부터는 2부 무대가 시작되면서 1군 아이돌이 순차적으로 출연하게 되고.
그리고 9시 30분.
올해 부동의 1위 걸그룹 쁘띠모가 후배 걸그룹 넷과 빅 히트곡 ‘블링블링’을 부르는 합동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합동 공연이 예정된 팀 중 하나가 아까부터 내리는 눈 때문에 발이 묶여 펑크를 낸다.
그 빈자리에 우리 체리블라썸이 들어갈 계획이다.
아 회귀 전 땜빵으로 투입된 팀은 플로렌이라는 걸그룹인데 걔들은 뜨자마자 일주일 만에 폭망한다.
실검에 오르자마자 리더인 최지연의 학창 시절 폭행 사건이 터지면서.
하지만 문제는 아이돌 대전을 총괄하는 최은혁 PD에게 체리블라썸을 어필할 방법이다.
‘어떻게 어필하지?’
그런데 그때였다.
우리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봤더니 데뷔 6개월 된 4인조 걸그룹 ‘핑크다이아’다.
“안녕하세요! 핑크다이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체리블라썸 선.배.님들!”
섹시 노선을 타고 있다 보니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의상을 하고 있다.
이 추운 겨울에 걸친 것보다 맨살이 더 보인다.
그리고 맨 앞에 있는 리더는 회귀 전에도 안 좋게 엮였던 구민지였다.
물론 지금은 기자가 아니라 아이돌이지만.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후배라서 겸손해야 할 법도 한데 내 앞에 있는 23살의 구민지는 거만한 표정으로 우리 체리블라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으니까.
뭐지?
저 눈빛?
아무리 우리 멤버들이 구민지 보다 어리다고 하지만 어떻게 선배를 저렇게 대놓고 깔보는 눈빛으로 보지?
지난주 체리블라썸의 순위가 48위 핑크다이아가 15위인 것 때문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인이나 다를 바 없는 주제에 저런 태도라니.
“네. 저희도 잘 부탁드려요.”
핑크다이아가 어떤 눈빛으로 쳐다보든 체리블라썸은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어색한 눈빛이 오간 뒤 핑크다이아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몸을 홱 하고 돌렸다.
“그럼 저흰 바빠서 이만.”
구민지는 그 와중에도 우연희를 보곤 피식 웃으며 나가버렸다.
심지어 TK 엔터의 매니저는 대기실 안으로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걸 보는 건 또 오래간만이네.
달칵.
문이 닫히자 세리가 씩씩대기 시작했다.
“우이씨. 핑크다이아는 또 저러네. 연희 언니. 한마디 하지 왜 매번 참아?”
정작 자기도 아무 소리 못 했으면서.
흔히 말하는 허풍선이 여기 있다.
“민지 언니가 저런 거 한두 번이니?”
우연희가 곤란한 듯 웃었다.
회귀 전.
얘들을 데리고 왔을 땐 난 보지 못했던 장면이다.
그땐 한명호 팀장이 아닌 박은철 팀장과 함께 온 탓에 난 온갖 심부름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작은 정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까.
“오빠. 우리도 인사 가야죠.”
세리를 달래던 우연희가 씁쓸한 표정으로 날 재촉했다.
하지만 난 우연희를 불러 세웠다.
“뭐야? 핑크다이아랑 안 좋게 엮인 일이라도 있는 거 같은데? 무슨 일이야 이거?”
아무리 인기가 갑인 판이라고 해도 이렇게 선배를 무시하는 건 흔하지 않으니까.
“언니! 말해! 응?”
세리가 재촉하자 우연희가 한숨을 내쉬곤 사연을 털어놓았다.
* * *
“······그랬었냐?”
구민지는 우리 회사의 에이스인 골든로드의 리더 장은영과 함께 우리 회사에서 연습생 시절을 함께한 동기란다.
그러다 데뷔 기회를 잡기 위해 TK 엔터로 이적했고.
즉 데뷔는 우리 체리블라썸이 앞서지만 연습생으로 들어온 건 저쪽이 먼저라는 소리다.
“그러면 굴렁쇠 연습생으로는 구민지가 선배라 이거지?”
가수 쪽 히스토리는 잘 몰랐기에 구민지가 한때 굴렁쇠 엔터 소속이었다는 건 오늘 처음 안 일이다.
물어보니 우리 회사에선 6개월 정도밖에 안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있으나 마나 한 시간이다.
어쨌건 연습생 선배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렇게 뻣뻣하다나.
‘어이가 없네. 이거.’
난 애써 화를 억누르고 물었다.
“너 아이돌은 데뷔 순으로 선 후배 가르는 거 몰라?”
우연희가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아는데 왜 그러고 있어? 한마디 해 주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
애가 착해도 너무 착해서 그런가?
이래서야 이 험난한 연예계에서 어떻게 이겨 내려고.
“그게······ 저희가······ 인기가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거기다 상대는 TK 엔터니까요. 분해도 참아야죠.”
마치 우리 집은 가난하니까 부잣집 애가 때려도 견뎌야 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잠깐. 그걸 왜 참아? 그리고 아무리 TK 엔터가 크다고 해도 우리 굴렁쇠 엔터를 만만하게 볼 정도는 아닌데?”
매니저가 신경 쓸 법한 일을 고작 21살의 여자아이가 신경 쓴다?
내 경험상 이런 건.
누군가에게 들어서 그런 거다.
하지만 한명호 팀장이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는데?
“오빠. 늦었어요. 저희 리허설 하려면 시간이······”
난 대기실 문을 막았다.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지금 느끼는 불안한 기분을 반드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왕 양은비가 한마디도 안 하고 있고 어린 세리까지 눈치를 볼 정도라면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거니까.
고민하는 우연희의 양손을 양은비와 세리가 곁에서 잡았다.
“언니 말해.”
“말하자. 응?”
“언니······”
결국 팀원들과 눈빛을 교환하던 우연희가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실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