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5화
205. 경쟁?
MBS의 <신의 이름으로>와 같은 날에 방영을 시작하는 SBC의 <돈의 축제>는 막장 코드를 넣기로 유명한 S급 작가인 홍장미 작가를 잡고도 끝날 때까지 10%의 시청률을 넘지 못한 비운의 작품이다.
제작을 맡은 한세화 프로덕션이 재정난에 시달려 제대로 된 주연배우를 캐스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도 배우들이 대본을 잘만 살렸으면 시청률 20%는 너끈히 달성했을 거라는 평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기록은 내 다이어리에 남아 있었다.
오늘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7월 29일]
-P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돈의 축제> 1화 시청률 2.3%)
“PD님. 화연의 투자금액은 얼마 정도 된답니까?”
“200억 정도랍니다. 그래서 지금 주연부터 싹 갈아치운다네요.”
이지연 작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화연이면 장웨이 회장이 있다는 곳이잖아 지난번 MBS에 찾아와서 우리한테 투자한다더니 이참에 본격적으로 한국 진출을 한대?”
“아직은 아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타진해 보는 거 아닐까요?”
본래 장웨이 회장이 한국에 직접 진출하는 건 1년이 더 지나야 한다.
그런데 조금 일찍 한국 쪽 시장을 두드려 보고 있었다.
‘아니면 설마 시비를 거는 건가?’
하지만 이지연 작가는 걱정 없다는 표정으로 현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흥. 한세화에 홍장미라. 똥파리들이 달라붙었네.”
홍장미 작가는 S급 작가라지만 이지연 작가와 비교하면 한 끗발이 부족하단 평을 듣곤 했다.
그래서 늘 이지연 작가를 시기하고 질투하곤 했다.
그리고 한세화 프로덕션의 한세화 대표 역시 이지연 작가에게 늘 작품을 달라고 졸라대는 사람 중 하나였고.
그 둘을 하나로 묶어 깔끔하게 표현하는 이지연 작가다.
김성운 PD가 씨익 웃는다.
“200억이 아니라 500억을 부어도 전 걱정 안 합니다. 솔직히 홍장미 작가가 우리 이지연 작가님에 비교할 급이나 됩니까? 자화자찬하는 격이라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연출진의 수준도 저희가 한 수위고요.”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다 유진이도 있잖아.”
“예. 유진 씨뿐 아니라 진유정 여사님도 계시죠.”
서로 쳐다보며 웃는 사이 이지연 작가가 아차 하고 미소를 쳐다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 우리 비밀 무기가 있다는 걸 깜빡했네?”
미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요? 제가 비밀 무기예요?”
“그럼! 우리 미소가 초반 승부에서 이겨야 해. 할 수 있지?”
미소가 벌떡 일어서 두 손을 꼭 모으고 파이팅을 외쳤다.
“나 잘할 수 있어요!”
언제나 자신만만한 미소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팀장이 되고 처음으로 내 배우를 밀어 넣는 드라마였다.
절대로 그 시청률 싸움에서 질 생각 따윈 없었다.
그리고 장웨이 회장이 어떤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한국에서 성공하게 둘 생각도 없었다.
회귀 전 그가 한국 연예계에 미친 악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까.
* * *
한세화 프로덕션의 대표실.
한세화는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이태리제 주황색 가죽 소파에 누워 볼을 비벼대며 비명을 질러댔다.
“진짜 부드럽네. 대체 이태리 놈들은 가죽에다 뭔 짓을 하는 거지?”
다리를 꼰 채 미간을 찌푸린 40대 초반의 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친 X. 장웨이에게서 투자금이 들어오자마자 소파부터 질러?”
홍장미 작가의 카랑카랑한 지적에 한세화가 누운 채로 대꾸했다.
“장미 언니는 늘 그렇게 매사 부정적으로 보더라? 그래서 막장 작가인가?”
홍장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세화 넌 어쩜 말을 해도 꼬옥 그렇게 재수 없게 하니? 머리털 다 뽑아버리고 싶게?”
한세화가 장난스레 몸을 웅크렸다.
“어우. 우리 작가 언니. 말하는 것 좀 봐. 누가 막장 드라마 작가 아니랄까 봐.”
“됐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드라마가 코 앞인데 배우를 다 바꿔? 무슨 라이브로 드라마 촬영할 거야?”
“돈 있는데 못할 건 뭐야? 이제 우리 제작사 튼튼해.”
“미친 X아. 튼튼해지지 않으면 못 살아남을 애들로만 남겼으면서 자랑이다. 하루 근무 16시간 시키는 게 사람이 할 짓이야?”
“지들이 좋다고 남아서 일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나도 나지만 참 너도 너다.”
한세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간 장미 언니는 그딴 거 신경 끄시고 배우 걱정도 놓으셔. 내 능력 몰라? 이번에 들어온 돈으로 웃돈 얹어주고 스케줄 다 빼놨어. 바로 투입 가능하니까 드라마는 원래 계획대로 3일 뒤에 크랭크인 가능해.”
홍장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다.
“누구? 누가 오는데?”
“궁금해?”
“당연하지.”
한세화가 몸을 바로 일으켰다.
“소이영 최태경 박상흔 이성재까지. 주연은 S급 조연은 A급으로 쫙 다 준비했지.”
그 순간 홍장미 작가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잠깐 여주에 소이영?”
“응.”
한세화가 어깨를 으쓱한다.
소이영은 최근에 급성장하는 TNT 엔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여배우.
재작년까지만 해도 충무로의 신예 소리를 듣는 배우였지만 작년 연속으로 2연타석 홈런을 치면서 단숨에 S급 스타로 떠올랐다.
덕분에 콧대가 하늘을 찌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걘 드라마 안 하고 영화만 할 거라고 큰소리치고 다니던데. 무슨 수로 빼 왔어?”
“언니도 참.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어? 소이영이 건물 하나 올리느라 돈을 좀 과하게 썼다는 말이 돌더라고. 그 소식 듣고서 과감하게 질렀지.”
홍장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맛을 다셨다.
“하여튼 요 기집애 능력도 좋아. 내가 이래서 한세화랑 인연을 못 끊어요.”
홍장미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적어도 배우들은 안 밀리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만 믿으라고 했잖아. 아 그리고 남자 주연은 최태경이 아니라 장준혁으로 바뀔 수도 있어. 장준혁 요즘 재활 끝나서 활동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고.”
“그것도 괜찮네. 최태경보다는 장준혁이 한 끗발 위지. 이슈 몰이도 될 거고.”
고개를 끄덕인 홍장미 작가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그렇고 내 고료는? 난 안 올려줘?”
“와 편당 1억 받으면서 더 올려달라고?”
“야. 장 회장한테 200억 투자 받았다며? 한 편당 2천씩 더 올려줘.”
한세화 대표가 빤히 노려본다.
“진짜 이 언니 너무한다. 이번에 장웨이 회장 아니었으면 언니 때문에 파산했을 거야.”
“그건 모르겠고. 어쩔 거야? 줄 거야 말 거야?”
그 순간 한세화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
“뭐?”
홍장미가 인상을 찌푸린 순간 한세화가 눈을 번뜩였다.
“대신 이지연 작가한테 시청률 이길 때마다 한 화당 1억씩 꽂아 줄게.”
“1억을 더 준다고?”
“응.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 테지만 극본은 언니 몫이잖아. 이참에 이지연 한번 밟아 봐야지. 안 그래?”
순간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호호호. 얘가 승부욕 자극할 줄 아네. 좋아. 이번 대본 잘 빠진 거 알지? 이번에는 이지연 그년에게 안 밀려.”
“말로만?”
“야!”
홍장미 작가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한세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그러니까 일단 이겨. 우리 결과로 이야기하자고. 돈 빵빵하게 줬는데 지면 나도 쪽팔리잖아.”
한세화의 깐죽거림에 홍장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케이. 그러면 1화부터 바로 꽂아. 알겠지?”
<돈의 축제>는 명문 재벌가가 그룹의 위기를 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명동 사채왕의 딸과 결혼을 시키며 생기는 일이다.
그 탓에 1화부터 곧바로 막장 코드가 등장한다.
그러니 슬로우 스타트를 하는 이지연 작가의 1화만큼은 확실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걱정이던 배우 문제도 해결되었으니까.
한세화 대표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외쳤다.
“콜! 1화부터 이길 때마다 무조건 1억씩 추가로 쏜다!”
“좋아. 난 대본 수정하러 갈 테니까 식사는 매 끼니 봉 초밥에 봉황 세트로 보내 줘.”
“오케이~!”
홍장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세화 대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국장님. 오늘 밤에 시간 되세요~ 회 좋아하시잖아요. 네. 대운하요. 오늘 제주도에서 싱싱한 다금바리가 올라왔대요.”
SBC 방송국의 드라마국 국장 ‘이기도’.
최근 차기 국장 후보인 정삼룡 CP에게 밀리고 있다지만 그래도 국장은 국장.
한세화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이기도 국장을 로비로 구워삶으면 드라마에 투입될 홍보비를 잔뜩 뜯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 *
[MBS <신의 이름으로> 크랭크인! 놀라운 현장 분위기!]
[MBS <신의 이름으로>. 7월 29일 첫 방송!]
굴렁쇠 엔터의 대회의실.
대형 LCD 화면으로 연신 <신의 이름으로>의 기사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정유진 씨의 홍보 비용을 더 늘렸으면 합니다. 기자들도 드라마국에서도 작정하고 밀어주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적기입니다!”
드라마의 시청률을 잡기 위해서는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돈을 뿌리든 인맥을 동원하든.
모든 수를 다 써 드라마 방영 시기까지 최대한 노출도를 늘려야 한다.
그 순간 누구보다 먼저 강지영 본부장이 동의를 표시했다.
“우리 정 팀장이 자금을 투입할 시기는 제대로 잡은 것 같은데. 비용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좀 더 들어봤으면 좋겠네요.”
역시나 이기철 이사가 태클을 건다.
“본부장. 거 이제 시작인데 너무 돈부터 쓰려고 하는 거 아냐?”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어요. 당연히 돈 써야죠.”
“아니 꼭 우리만 쓰라는 법이 있나? MBS도 돈 좀 쓰라고 하지······”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오늘 MBS 사장님과 만날 예정이니까.”
이기철 이사가 투덜대는 말을 단번에 막은 강지영 본부장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동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단 시기는 맞아. 나도 원론적으로는 찬성인데 유진이는 아직 주연도 아니니까 캡을 좀 씌우는 게 어때?”
캡.
자금에 한도를 두자는 뜻이다.
“올해 일사분기까지 사내에서 가장 많은 광고를 딴 배우에게 캡을 씌운다고요?”
“아니 그래도 다른 배우들 기분도 생각해야지.”
예상한 대로 김동수가 반대한다.
하지만 김동수의 논리를 박살 낼 만반의 준비를 해온 상태.
기다렸다는 듯 반격하려는 순간 내 말에 동의한 사람이 있었다.
“난 정 팀장 말에 찬성.”
순간 모두의 시선이 배우 1실의 방상영 실장에게 향했다.
굴렁쇠 엔터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배우 1실 실장인 방상영은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자금 사정이 원활한 1실의 특성상 내부적으로 웬만한 일을 다 처리할 수 있는 데다 다른 실의 협조를 요청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웬일이지?’
방상영 실장은 회귀 전에도 회사 문을 닫기 직전까지 라인을 타지 않던 사람이다.
굴렁쇠 엔터가 쪼개질 때 즈음 자기 밑에 있던 직원들을 데리고 탑 엔터로 옮겼는데 그 뒤 얼마 있지 않아 엔터 업계를 훌쩍 떠나버렸다.
그런 남자가 오늘은 처음으로 먼저 의견을 꺼냈다.
그것도 내 편을 들면서.
방상영 실장이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게 물었다.
“정 팀장.”
“예?”
“그런데 혹시 끼워 넣기는 안 되나?”
방상영 실장이 넉살 좋게 웃었다.
하지만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이지연 작가와 김성운 PD에게 부탁해서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나 다름없었다.
내가 편을 들어줄 테니 너도 그에 합당하는 걸 내놓으라는.
순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배우 1실의 방상영을 편으로 끌어들이게 되면 배우 3실의 김동수를 견제할 엄청난 카드가 생기는 셈이었으니까.
“결과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부탁드려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순간 이곳저곳에서 헛기침이 나왔다.
어지간한 실장급도 접대에 로비를 총동원해서 추진하는 게 배역 끼워 넣기였다.
그런데 고작 2년 차 팀장인 내가 끼워 넣기를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배우 3실 김동수와 주호성 팀장 강명길 팀장의 얼굴은 죽을상이 되었다.
방상영 실장이 날 보며 씨익 웃는다.
“그러면 우리 1실 양치성이랑 박예은. 두 사람을 좀 끼워달라고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이왕이면 일회성 단역 말고 한 이삼 화 정도 출연할 수 있는 역할로.”
양치성이랑 박예은은 우리 회사로 온 후 별다른 활동을 못 한 배우들이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역할에는 경쟁자가 먼저 치고 들어오고 또 작품을 잡았다 싶으면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등의 일을 겪은 탓이었다.
아무튼 주연은 안 되지만 조연은 충분히 가능한 배우들이다.
양치성은 끊임없는 노력파로 결국 A급 성격파 배우의 반열에 오르고 박예은도 특유의 개성 있는 목소리가 대중의 호감을 사면서 시트콤의 단골 감초 역으로 잘 나가게 되니까.
“대본은 보셨습니까?”
“봤지. 치성이와 예은이도 대본 보고는 꼭 출연하고 싶다며 며칠째 나를 달달 볶더라고.”
“악역이라도 괜찮습니까?”
“찬밥 더운밥 가릴 애들이 아니지. 2년 동안 적절한 데를 못 꽂아줬는데 이참에 이지연 작가 작품에 꽂아 주고 생색 한번 내보자.”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당장 알아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상영 실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방상영 실장은 본격적으로 내 편을 들며 김동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