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2화
202. <신의 이름으로> 크랭크인 1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갑작스러운 유진이의 질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회귀한 이후 난 유진이를 위해 살았다.
하지만 그건 매니저였기 때문이지 다른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도 드러낼 생각도 없고 드러내서도 안 된다.
난 그녀의 매니저였으니까.
혼란스러움을 억누른 채 유진이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진아. 난······”
그런데 그때였다.
유진이가 뒤늦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두 손을 휘휘 내젓기 시작했다.
“미 미쳤나 봐! 내 내가 무슨 소리를······. 그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요! 배우로서 절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어 어 그러니까 배우 정유진은 어때요? 내일 잘할 수 있을까요? 내일 ‘만신 월아’를 처음 선보이는 날이잖아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유진이가 랩을 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아 그 말이었어?’
배우로서의 자기에 관한 평가를 해달라는 거였다니.
갑자기 긴장이 탁하고 풀린다.
“배우로서 널 어떻게 생각하냐고?”
“네! 그거요!”
유진이가 바로 그거라며 손뼉을 친다.
특히 이번은 아예 다른 두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다 보니 부담이 심하다면서.
난 불안해하는 유진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단언컨대 동 나이대의 어떤 배우보다 유진이 네가 나아.”
“진짜요?”
“장담해. 그리고 지금처럼 불안하면 언제든지 물어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답해줄게.”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자 유진이가 긴 한숨을 내쉰다.
“휴우~ 그 말 들으니까 좀 안심이다.”
유진이의 얼굴에 웃음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럼 저 자러 갈게요.”
“그래.”
그런데 2층으로 올라가는 걸음걸이가 조금 이상하다.
살짝 휘청이는 게 흡사 술 취한 사람처럼.
“잠깐만 유진아.”
“예?”
계단을 올라가던 유진이가 난간을 잡고 돌아본다.
“너 설마······ 아까 고량주 먹었어?”
“흡!”
유진이가 자기 입을 막는다.
어쩐지 얼굴이 발갛더라니.
“아 아니에요. 딱 한 모금! 딱 한 모금만 마셨어요!”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유진이에게 주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한 모금?”
순간 유진이가 부리나케 도망가며 외쳤다.
“죄송해요! 두 모금 마셨어요오오~.”
말을 마친 유진이가 휘청거리며 계단을 뛰어오른다.
그 모습을 보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천천히 올라가. 그러다 넘어질라!”
“네! 오빠! 잘 자요!”
이 와중에도 유진이를 걱정하는 걸 보니 난 천생 매니저인가 보다.
유진이를 2층으로 돌려 보내놓고 마당에 서서 집을 올려다봤다.
회사의 도움을 받았지만 늘 살던 고시원과 원룸을 벗어나 방 3개가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현재 내 통장에는 너무 바빠서 자연스레 모인 월급과 상여금을 합해 거의 1억에 가까운 돈이 있다.
“많이 컸네. 정윤호.”
회귀한 후 2회차 인생이라지만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 중이다.
앞으로 굴렁쇠의 상장까지 남은 기간은 2년에서 2년 반 정도.
이제부터는 급성장하는 회사의 주식들에 조금씩 투자할 생각이다.
그래야 더욱 불어난 돈으로 굴렁쇠 엔터의 지분 전쟁에 끼어들 수 있을 테니까.
“이대로만 가자.”
마음을 다지며 길게 심호흡을 하자 서울 밤하늘의 텁텁한 공기가 느껴졌다.
미세먼지가 없다는 날인데도 까끌까끌한 모래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탓에 살아 있다는 것 또한 느낄 수가 있었다.
난 들뜬 심정을 억누른 채 따뜻한 보금자리로 향했다.
‘그나저나 에어컨은 언제 설치해 주려나······’
한여름이라 에어컨 설치 날짜가 미뤄지고 있었다.
그 탓에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땀이 나는 것 같았다.
* * *
<신의 이름으로>의 촬영지 경기도 양평 세트장.
양평 현장에 도착하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트를 올리느라 스태프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기사님들! 촬영 때는 공사 중지하셔야 해요!”
“예. 실장님.”
외주제작사인 블루드래곤 차수연 제작실장이 제작 PD로 맡아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다.
유진이와 미소를 데리고 차에서 내리자 이번엔 진지한 태도로 고사상을 차리는 김성운 PD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감독님. 돼지머리 기울어졌어요.”
“아 예. 이 정도면 될까요?”
“쓰읍. 마음에 안 드는데······ 잠시만요. 제가 직접 할게요.”
이 판에 있다 보면 의외로 미신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김성운 PD도 그중 하나였다.
김성운 PD는 진지한 표정으로 돼지머리의 각도를 한참이나 맞춰댔다.
그리고 우린 그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김성운 PD가 뒤를 돌아보고는 반색했다.
“어서들 와요. 그리고 유진 씨는 오늘 준비 잘하셨습니까?”
김성운 PD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가 1인 2역을 하게 될 ‘만신 월아’를 맡을 준비가 잘 되었냐는 뜻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 자신감을 심어준 덕인지 유진이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김성운 PD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미소와도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미소도 오늘 촬영 잘할 자신 있지?”
“네!”
“착하다. 그럼 이따가 보자.”
순간 미소가 주춤대며 고사상을 가리켰다.
“감독님! 나도 저기서 절해도 돼요?”
“그러~엄. 우리 미소도 우리 출연진이니까.”
“우와! 진짜요?”
“당연하지. 그러면 이따가 보자?”
“네!”
김성운 PD는 바쁘다면서 다시 고사상으로 향했다.
이번엔 명태가 놓인 게 비틀어졌다면서.
* * *
고사 준비가 길어지자 기다리던 미소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미소가 깰까 싶어 유진이와 함께 차 밖으로 나와 오늘 촬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참 이야기를 하는 도중 주영인이 우릴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유진이는 주영인을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 뭐야. 친구 먹기로 하고 왜 자꾸 고개는 숙여? 존댓말은 또 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진이가 목소리를 낮춰 대꾸했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선배는 선배잖아. 보는 사람도 많은 곳에서는 조심해야지.”
유진이의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경고한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로 의도가 어떻든 간 대중들은 카메라에 비친 네 모습을 진실로 알 거라고.
그 탓에 유진이는 사소한 언행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영인이 제법이라며 웃는다.
“이야~ 우리 유진이도 이제 연예인이 다 됐네?”
유진이가 어깨를 으쓱하자 주영인이 날 쳐다본다.
“이거 오빠가 알려줬죠?”
“뭘요?”
“쟤 몸 사리는 거요. 연기야 타고나는 거지만 처세는 아니잖아. 안 그래요?”
난 시치미를 뚝 뗐다.
“글쎄요. 워낙에 똑똑한 친구라 제가 가르치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그 딱딱한 말투 좀 어떻게 안 돼요? 오빠는 연예인도 아니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잖아요.”
주영인은 매번 거리를 두는 내 말투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그녀와 거리를 좁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전 서로 존칭하는 게 편합니다.”
주영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아. 하여간 진짜 알았어요. 그런데 오늘 ‘만신 월아’ 역을 맡으시는 그 선배님도 현장에 나오시죠?”
“예. 이따가 제가 직접 가서 모시고 올 겁니다.”
“어서 빨리 만나 뵀으면 좋겠네요. 어떤 분이시길래 그렇게 꽁꽁 숨겨 두시는지······”
주영인은 ‘만신 월아’를 연기할 진유정 여사에 관한 관심을 여전히 끊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차수연 제작 PD의 호출 소리가 들려왔다.
“자~ 고사 시작합니다! 어서들 모이세요!”
순간 주영인이 유진이를 재촉했다.
“우리도 가자.”
“너 먼저 가. 난 미소 깨워서 데리고 갈게.”
“아 맞다. 쏘리. 그럼 이따 봐.”
주영인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먼저 사라졌다.
잠에 푹 빠진 미소를 놓아두고 갈까도 싶었지만 미소가 고사에 꼭 참석하고 싶다고 했기에 승합차로 향했다.
난 잠든 미소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미소야?”
“으······ 응.”
대답은 했지만 눈을 뜨지 못한다.
“미소야 감자탕 먹으러 갈까?”
미소의 눈이 번쩍 뜨인다.
“네! 할매감자탕!”
미소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어. 나 잠들었어요?”
“이제 정신이 들어?”
미소가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린다.
“네.”
“아까 고사하는 거 꼭 참석하고 싶다고 했잖아. 이제 시작할 거야.”
“진짜요?”
신이 난 미소가 내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유진이가 미소를 내게서 건네받았다.
“오빠. 다녀올게요.”
“삼촌 이따가 봐요!”
“어. 수고하고.”
유진이와 미소까지 도착하자 김명학 CP를 시작으로 김성운 PD는 고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이지연 작가와 김수희 선생님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고 기자들 역시 참석해 축하를 건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소는 절을 올린 뒤 거금 3천 원을 돼지 입에 물린 후 다시 절을 마쳤다.
잠시 후.
고사를 끝낸 배우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기사들은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며 주영인과 유진이의 대립 구도에 포커스를 맞췄다.
덕분에 남자 주인공인 박남철은 약간은 소외되는 분위기였다.
배우들의 인터뷰가 끝나자 김성운 PD가 마이크를 잡았다.
“인트로 촬영 후 곧장 아역 촬영 들어갑니다. 보호자 분들은 아역 준비 잘 시켜주세요.”
이야기를 마친 김성운 PD가 감독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신의 이름으로>가 크랭크인 되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촬영 현장을 보며 나 역시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유진이가 ‘만신 월아’로 변장해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유진아. 가야지.”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촬영을 기다리던 미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촌 엄마랑 어디 가요?”
“아 엄마랑 잠깐 근처에 스케줄이 있어서 갔다 올 거야. 집에 갈 때는 같이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미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빠이~!”
손을 흔드는 미소를 정상봉에게 맡긴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세트장을 벗어났다.
* * *
세트장에서 2km 정도 떨어진 주택가에 차를 세우고 양소리 대리가 특수 분장을 시작했다.
탈을 쓰고.
가발을 쓰고.
분장에 화장까지 마쳤다.
그 순간 24살의 유진이는 순식간에 노파로 변했다.
주름 가득한 피부에 새하얀 머리카락까지.
새하얀 소복을 입은 유진이의 모습은 완벽한 ‘만신 월아’였다.
“어때 보여요?”
“길 가다 스쳐 지나쳐도 못 알아보겠다. 진짜로.”
그제야 유진이가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사이 메이크업을 끝낸 양소리 대리가 한 가지를 경고했다.
“팀장님. 중간중간 페이스 미스트 좀 뿌려주세요. 그래야 땀이 나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예. 양 대리님.”
분장을 끝낸 유진이에게 말했다.
“준비 끝났으면 갈까?”
“잠시만요. 오빠. 마지막 준비 하나 남았어요.”
“무슨 준비가 남았는데?”
“저 진유정 여사님 캐릭터도 만들었어요. 보여 드릴게요.”
“그래?”
“예. 생각해보니까 ‘만신 월아’를 연기하는 진유정 여사도 필요하겠더라고요.”
“알았어. 한번 보자.”
그 순간 유진이가 긴 호흡을 시작했다.
찰나의 침묵이 지난 뒤 유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만신 월아를 맡은 진유정이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정 팀장?”
마치 이지연 작가가 20년 정도 나이가 더 들면 이럴까.
날카로운 하이톤에 당당한 말투였다.
진유정 여사로 변한 유진이가 날 보며 싱긋이 웃는다.
급하게 만든 캐릭터라 평범할 거란 내 예상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유 유진아. 어······ 어떻게······”
순간 진유정 여사로 변신한 유진이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워낙에 정교한 마스크라 주름이 따라 움직인다.
“저기~ 우리 정 팀장도 앞으로는 입조심을 하는 게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 안 해?”
유진이의 ‘진유정 여사’ 연기에 혀가 내둘러졌다.
‘만신 월아’를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1인 2역을 하는 셈이었는데 ‘진유정 여사’란 현장용 캐릭터까지 만들면 1인 3역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난 들뜬 심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 이지연 작가님한테 허락은 받은 겁니까?”
난 ‘진유정 여사’를 연기 중인 유진이에게 맞춰주기 위해 존대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소복을 입은 유진이가 두 팔을 펼친다.
“당연하지~. 어때? 괜찮아 보여?”
“잘 어울리네요. 여사님.”
내 평가에 만족한 유진이가 빙긋이 웃는다.
그런데 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
‘목소리와 연기뿐만이 아니라 외모에도 만신 월아랑 차별점이 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한다?’
순간 머리를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만요. 여사님.”
난 ‘진유정 여사’ 캐릭터를 좀 더 확실히 살리기 위해 양소리 대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