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1화
201. 새롭게 시작하다
문이 열린 순간 우성찬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우성찬이 마주한 건 이시윤이 아니라 식탁 의자를 들고 있던 나였다.
턱.
달려오던 우성찬은 식탁 다리에 막혀 움직임을 멈췄다.
“커억! 너 넌······?”
의자 다리에 몸이 끼어 움직임이 봉쇄된 우성찬이 내 얼굴을 보고는 당황했다.
그 순간 난 의자를 힘껏 휘둘렀다.
퍼억!
의자 다리에 명치와 목을 맞은 우성찬이 들고 있던 칼을 떨어트렸다.
쨍그랑.
난 그 틈을 타 의자로 우성찬을 집 밖으로 밀어버렸다.
“으으윽.”
의자에 밀린 우성찬이 현관문 밖으로 밀려나며 엉덩방아를 찍었다.
난 그 즉시 의자를 놓고 달려가 우성찬 위에 올라탔다.
동시에 우성찬의 팔을 꺾고서 집 안에 있던 김찬성 변호사에게 외쳤다.
“김 변호사님! 어서 경찰에 전화하세요.”
“예! 예!”
폰으로 상황을 녹화하던 김찬성 변호사가 냉큼 112를 눌렀다.
식칼을 휘두르며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 녹화했으니 게임 끝이었다.
“씨X! 이거 놔! 으아아악!”
우성찬이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몇 대 정도 더 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당방위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었기에 억지로 화를 눌렀다.
“으아악! 너 우리 아빠가 알면······”
“칼까지 들고 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아빠 찾는 거냐? 걱정하지 마. 너희 아버지도 곧 너 따라갈 테니까”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잠시 후 최소혜 기자가 우성찬의 부모가 운영하는 잠실 한정식 ‘우선재’의 저질 식재료 사용 기사를 올릴 예정이다.
“두고 보면 알 거야.”
그 순간 겁을 먹고 숨어 있던 이시윤이 천천히 문밖으로 나왔다.
목이 늘어진 파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던 이시윤이 내 밑에 깔린 우성찬에게 외쳤다.
“XXXX야!”
욕 자체를 못 할 것 같던 이시윤의 입에서 오랫동안 묵혀뒀었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오늘 난 우성찬을 쓰러뜨리는 데 도움을 준 대가로 이시윤에게 장학 재단을 소개해 주려 찾아왔었다.
이시윤은 우성찬에게 괴롭힘을 당한 트라우마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홀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를 무난히 입학할 정도의 성적인 이시윤은 자기 같은 피해자들은 선생님들의 무관심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사범대학을 꿈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시윤은 전혀 다른 진로를 선택하고 있었다.
“내가 꼭 검사가 되어서 너 같은 쓰레기들을 다 잡아넣어 버릴 거야 우성찬.”
이시윤이 각오에 내 밑에 깔린 우성찬이 낄낄대며 웃는다.
“검사? 지X. 대학 들어갈 돈도 없는 새X가! 로스쿨 등록금도 없는 루저 새끼가 입만 살아 가지고서는!”
악에 받친 우성찬의 말에 내가 대신 대답했다.
“시윤이 장학금 받았는데?”
“뭐?”
김찬성 변호사가 소개해 준 장학 재단 덕에 이시윤과 함께 우성찬의 다른 피해자들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성찬 너 이제 어떻게 하냐? 시윤이 성적 보니까 검사 되는 건 별로 안 어려워 보이던데?”
그제야 당황한 우성찬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성찬이 이시윤을 처음부터 싫어했던 건 아마도 없이 사는 주제에 머리가 좋은 게 재수 없다는 이유였다던가?
이시윤을 괴롭혔던 우성찬은 그 누구보다 이시윤의 공부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의지를 다진 이시윤이 날 쳐다보며 말했다.
“윤호 형.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이 빚. 절대로 안 잊을게요.”
미래의 검사가 내게 큰 빚을 졌다며 감사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것보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그럴게요. 윤호 형.”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우성찬은 칼을 들고 들어온 탓에 살인 미수로 긴급 체포당했다.
그렇게 긴 밤이 끝나고 있었다.
* * *
우성찬이 칼을 들고 피해자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전하자 배우 3실은 초토화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나도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일단 칼을 들고 피해자를 찾아갔다는 사실이 워낙에 막장이라 회사에도 큰 피해가 올 수 있으니까.
김찬성 변호사는 날 대신해 모든 일을 처리해줬고 우성찬은 원래 없던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하루는 <먹방의 대가>에 주연으로 내정되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해놓은 뒤 난 휴가를 받았다.
<신의 이름으로>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룸의 중고 물품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간단한 옷가지와 이불만 챙겨 유진이의 집으로 향했다.
오후 5시가 되어서 도착한 유진이 집 앞에는 ADD 캡스 직원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정 팀장님!”
“고생 많으십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주택에 딸린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그런데 차를 댄 뒤에야 차고의 출입구가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동 셔터였던 차고 출입구는 전자동 셔터로 바뀌었고 2m 50cm였던 출입구는 3m 50cm까지 높아져 있었다.
그 덕에 앞으로 유진이가 탈 벤츠 스프린터 2호 차도 집 안에 댈 수 있게 되었다.
‘아줌마 부자 아냐?’
외관이 허름한 주택이라 그동안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대지면적 100평짜리의 3층 단독 주택이라면 값이 꽤 나갈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건 전혀 다른 문제.
정인지 주인아줌마가 유진이와 날 가족처럼 생각해준다는 생각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하루야. 내리자.”
“예. 형.”
차에서 내리자 유진이와 미소 그리고 주인아주머니가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미소야?”
장갑을 낀 미소가 신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우리가 이사 도와줄게요!”
“아냐. 무거운 건 다 버리고 와서 별로 할 거 없어. 하루랑 같이하면 돼.”
유진이가 고개를 젓더니 두 팔을 걷어 올렸다.
“세입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마세요.”
정인지 주인아줌마 역시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 팀장. 우리가 도우면 금방 끝나잖아. 이리 줘. 빨리 옮기고 짜장면이나 먹어.”
“그럴 수는 없죠. 탕수육에 깐쇼새우 그리고 고추 잡채까지 시키겠습니다!”
“풋. 알았어.”
“그리고 감사합니다.”
정인지 주인아줌마가 피식 웃는다.
“자자. 어서 올라가.”
그렇게 우린 한 사람당 한 소쿠리를 들고 3층으로 짐을 옮겼다.
3층 옥탑방으로 올라가자 깔끔하게 정리된 마당이 보였다.
옥탑방의 벽면은 완벽히 수리된 채였고 지붕도 새로 올려놓았고.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아냐. 지붕이 없으면 여름에 더워 겨울엔 춥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월세 받는데?”
“에이. 시세 절반밖에 안 받으시면서.”
“자자. 어서 들어가지. 그리고 앞에 놓을 평상도 주문해 놓았어. 있다가 올 거야.”
감사 인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옥탑방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인테리어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신축 건물보다 깨끗한 쓰리룸에는 장판부터 벽지까지 화사한 색이었다.
설마 꽃 모양 벽지가 붙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이 벽지는······.”
“오빠. 벽지는 미소가 골랐어요.”
“응! 내가 골랐어요.”
미소의 말을 듣는 순간 벽지를 바꿔야겠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이 이쁜데? 내가 딱 원하던 색상이······야.”
유진이와 미소가 꺄르륵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웃는 의미는 달랐지만 말이다.
* * *
짐 정리를 다 해놓은 뒤 중국집 ‘황금룡’의 요리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삐이이.
“어? 왔나?”
현관과 연결되는 인터폰을 3층에도 설치했기에 현관문 앞에 온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데 중국집 배달원이 아닌 정 팀의 매니저들이다.
-윤호야! 여기 말 좀 해줘! 네 허락 없으면 안 들여 보내준대!
같은 회사 직원이라도 함부로 집에 들이지 말라고 말해 둔 탓에 경호원들이 곁에서 쏘아보고 있었다.
인터폰으로 괜찮다고 말을 하자 그제야 정 팀의 매니저들은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영진이 두루마리 휴지 세트를 들고 올라왔다.
“집 좋은데?”
업무 외 시간이라 편하게 말하는 이영진이다.
“집들이 따로 할 건데 왜 전화도 없이 찾아오고 그래?”
“우리가 그럴 시간이 있겠냐? 집들이 잡아도 취소될 확률 백퍼잖아. 그리고 우리도 밥 먹고 바로 또 가야 해.”
“이왕 왔으니까 앉아.”
현장에 있는 이태풍을 케어하는 전담 매니저 이대호만 빼놓고 정 팀의 모두가 다 찾아왔다.
그런데 그 순간 도란희가 외쳤다.
“팀장님. 전 짜장면은 필요 없고 탕수육이랑 양장피면 돼요.”
란희야 란희야 우리 도란희야.
양심은 어디 팔아먹었니?
“탕수육이랑 요리들 시켜놨어. 올 때 양장피만 더 시킬게.”
정인지 주인아줌마가 가지고 온 돗자리를 3층 마당에 펴고는 다 같이 모여 앉아 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음식들이 두 번에 나누어 도착했다.
탕수육과 깐쇼새우 그리고 고추 잡채와 양장피 그리고 짬뽕과 짜장면이 돗자리를 한가득 채웠다.
그런데 그때였다.
“탕슉~ 탕슉~ 탕슉은 부~먹!”
도란희가 랩을 하며 탕수육 소스 그릇의 랩을 반쯤 벗겼다.
그리고 그대로 탕수육에 부으려는 순간 이영진이 도란희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동작 그만. 누구 맘대로 소스를 부어? 부먹? 너 제정신이야?”
도란희가 싸늘한 표정으로 이영진을 쳐다본다.
“설마 찍먹? 와~ 영진 오빠 맛알못이었어?”
이영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참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이래서 살인이 나는 갑서?”
“으따. 그 참~ 말 함부로 하시네잉~.”
“뭐라카노? 이기 확~ 마!”
“그 손모가지 안 내리면 그냥 잘라 버리는 수가 있어야?”
파지지직.
두 사람은 온갖 방언을 내뱉으며 씩씩거렸다.
탕수육은 하나였고 반쯤 랩이 벗겨진 소스는 김을 모락모락 내며 부먹찍먹 대전의 결론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부먹파와 찍먹파의 편이 갈리기 시작했다.
정상봉 도란희 은지유 대리와 이미리 대리는 부먹파.
이영진과 양소리 대리 차상진은 찍먹파였다.
도란희가 내 곁에 앉은 하루를 빤히 쳐다본다.
“하루야. 넌 부먹? 찍먹?”
“전 찍먹이요.”
하루의 말에 이영진이 주먹을 불끈 쥔다.
“역시 하루가 상식이 있네. 4대 4.”
정인지 주인아줌마와 유진이까지 부먹과 찍먹으로 나뉘자 결국 5대 5가 되어버렸다.
미소는 어려서(?) 어떤 파에도 넣지 말자는 무언의 합의를 한 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를 쳐다보는 부먹파와 찍먹파의 시선을 받은 순간 팀장으로서 단호히 말했다.
“그냥 하나 더 시켜!”
* * *
집들이가 끝난 후 직원들을 배웅했다.
스케줄이 취소된 탓에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남아 있던 도란희와 이영진이 아직도 투덜거렸다.
“와 진짜. 란희 너 같은 애랑 누가 사귀나 몰라. 누가 부먹이랑 겸상을 해?”
“어머? 이 오빠. 말하는 것 좀 봐? 나 좋아했던 남자들을 줄 세우면 여의도 공원을 한 바퀴 삥 두르고 100명 정도 남는다니까요? 그리고 내가 그 사람들을 다 부먹파로 개종시킨 여자예요!”
“아 눼에~ 눼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들만 만나셨구나.”
도란희의 말에 이영진이 얄밉게 얼굴을 찌푸리며 깐죽거렸다.
‘저러다 맞지.’
아니나 다를까 도란희가 이영진을 상대로 헤드락을 걸었다.
“이이익! 주거쓰!”
“아악. 놔! 놔! 이 미친······”
‘묘하게 어울리는데?’
요즘 들어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게 보기가 좋아 보였다.
“시끄럽고. 다들 어서 사라져! 나도 빨리 자야 내일 스케줄 가지.”
이영진과 도란희가 조금만 더 놀면 안 되냐고 했다가 정상봉에게 이끌려 사라졌다.
매니저들을 다 배웅하고 나자 갑자기 적막감이 맴돌았다.
“휴우. 이제 내일이네.”
오랫동안 준비했던 <신의 이름으로>의 크랭크인.
유진이가 ‘청명’과 ‘만신 월아’까지 1인 2역을 펼칠 예정이었기에 조금은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번을 계기로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정유진이란 이름을 새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들고 있었다.
“날아 올라보자 정유진.”
그렇게 혼잣말을 한 나는 잠을 청하러 3층으로 가려 했었다.
그런데 그때 미소를 아줌마에게 맡긴 유진이가 마당으로 나왔다.
“왜 나왔어? 내일 크랭크인인데 빨리 자야지.”
유진이가 머뭇거리며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오빠. 저랑 잠깐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응? 무슨 이야기?”
그 순간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유진이가 청천벽력같은 말을 내뱉어 버렸다.
“오빠.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