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화
20. 오늘은 체리블라썸 1
띠링!
[김솔잎 작가 : <파란 하늘> 대본 초고예요. 그리고 운 좋게 펑크 난 시간대에 편성이 잡혔어요. 대본 읽어 보고 작가 추천할 배역 골라서 알려주세요. (첨부파일 : <파란 하늘> 대본.HWP)]
아침부터 좋은 소식이 연달아 들려오고 있다.
유진이의 광고에 <파란 하늘> 편성 확정에 작가 추천할 배역까지 고르라니.
오늘 체리블라썸에게도 제발 이런 복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윤호야! 뭐 해? 서둘러.”
먼저 내린 한명호 팀장이 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일단은 체리블라썸의 문제부터 해결하자.
“예. 갑니다.”
난 급한 대로 김솔잎 작가에게 이렇게 답했다.
[정윤호 매니저 : 예. 작가님. 유진이와 상의하고 이삼일 내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김솔잎 작가 : 알았어요. 근데 정 매니저님이 작가~ 작가 하니까 진짜로 빨리 작가가 되어버린 거 같아요. 여하튼 최대한 힘 써 볼 테니까 최대한 빨리 답 주세요. 제작사도 좋은 배역에는 밀고 있는 후보들이 있거든요.]
알겠다고 답을 끝낸 나는 <파란 하늘> 대본을 유진이와 구성철 실장에게 보낸 뒤 한명호 팀장의 뒤를 따라 체리블라썸의 숙소로 향했다.
* * *
띡띡띡.
한명호 팀장이 몸으로 가린 채 숙소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매니저가 되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지만 난 이미 저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1004.
체리블라썸의 막내 김세리의 센스다.
원래는 유은아가 9038인가 하는 외우기 힘든 번호로 해 놓았지만 김세리가 다시 바꿔 버렸다.
구리다고.
도대체 입구 비밀번호가 구린 게 무슨 상관인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띠리릭.
입구 문이 열리자 한명호 팀장이 나를 손짓해 불렀다.
“들어와라. 신발 안 밟게 조심하고. 신발에 먼지 묻으면 우리 애들 완전히 예민해지거든. 징크스야. 징크스.”
알죠.
유독 은아가 많이 심하게 타던 그 징크스.
유은아.
멤버 중 댄스와 미모 서브 보컬을 맡은 유은아는 가장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다.
그래서 뭔가 마음에 안 들면 말을 아예 안 하는 버릇이 있다.
같은 팀원들과 대화를 안 한 기록이 무려 한 달이었던가.
결국에는 다 극복하지만 하여간 지금 이 시기에는 그렇다.
나중에 물어보니 질풍노도의 시기여서 그랬다지.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푸른색 파자마를 입은 김세리가 눈을 감고 나왔다.
걸그룹 체리블라썸의 메인 보컬이자 귀요미 역할을 맡은 녀석이.
키는 160cm인데 다리가 길어 애기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웬일이냐? 네가 젤 먼저 일어나서 나오고?”
“저 아직 자는 중이에요~.”
한명호 팀장의 물음에 세리가 눈을 감고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어젯밤 머리를 감고 바로 잠들었는지 머리 한쪽이 살짝 눌러져 있었다.
그런데 입고 있는 푸른 계열의 파자마에는 파워터프컬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너 15살 맞지?
“세리야 샵에 가야 해. 눈떠.”
몽유병에 걸린 듯 걸어오던 세리는 한명호 팀장의 말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어? 이 오빠는 누구예요?”
고맙다.
오빠라고 해 줘서.
한명호 팀장은 잠긴 목으로 내 소개를 했다.
“오늘 도와줄 임시 매니저. 배우 2실의 정유진을 담당하는 친구란다.”
“아 드라마에 나온 그 이쁜 언니? 헤에~. 좋겠다.”
뭐가 좋은진 모르겠지만 어쨌건 너도 예쁜 편이야.
아니 좀 귀여운 편인가?
세리는 다시 잠이 몰려오는 듯 소파로 터벅터벅 가더니 픽 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머리를 대자마자 다시 잠에 빠진다.
코올~ 하고.
이렇게 무방비한 걸 보면 그냥 애다 애.
“후우. 그래 한 번에 깨길 바란 내가 잘못이지. 얘들아. 일어나!”
거실에서 한명호 팀장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반대편 방문이 열렸다.
유은아다.
은아는 방문으로 고개를 살짝 내민 채 부끄러워하며 나오질 못했다.
낯선 사람인 내가 있어서겠지.
173cm의 장신에 하늘하늘한 체형 새하얀 레이스가 달린 잠옷을 입은 청순한 모습인데 차후엔 몸을 아끼지 않는 과감한 연기로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여배우가 된다.
현재는 그냥 극소심쟁이 유은아지만.
“아 안녕하세······요.”
“어. 은아야. 괜찮아. 이 사람도 우리 회사 직원이야. 이름은 정윤호라고 하고.”
극도의 낯가림을 하는 은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 알아요. 9시 뉴스에 나오신 매니저분이시잖아요······”
은아가 아는 기색을 하자 한명호 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바로 그 사람이야. 그러니까 미리 인사나 해 둬. 하여간 오늘 이주영 매니저 대신 도와줄 사람이니까.”
“네······”
두 사람과 인사를 마치자 이번엔 체리블라썸의 리더인 우연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근데 팀장님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으신데요?”
정장을 입고 있는 게 이상해 보였던지 첫째 우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임시 매니저. 정윤호. 정장은 그러려니 해. 이건 자기 전투복이라더라.”
“그러시구나. 잘 어울리시네요.”
한명호 팀장의 소개에 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윤호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아 그리고 저한테 말 편히 하세요.”
“어 알았어. 연희야.”
“네. 오빠.”
맏언니 우연희는 전날 잠을 못 잔 듯 얼굴이 살짝 부어 있었다.
은아와 함께 팀 내 장신 라인이다.
은아가 가녀린 몸매라면 우연희는 건강 섹시미가 묻어나오는 남미 스타일의 미녀다.
리드 보컬을 맡고 있었고.
그런데 얘도 김세리와 같은 파워터프걸 파자마다.
색깔은 붉은색.
나도 모르게 그 파자마를 쳐다봤더니 당황해 얼굴이 붉어진 우연희가 말이 많아졌다.
“이 이건. 그러니까 세리가 색깔 별로 주문한 거라 아까워서 입은 거예요! 야. 김세리. 일어나. 이게 새 매니저님이 와 계신데 어디서 잠을 자?”
“음냐 음냐. 싫어. 더 잘 거야. 엄마~.”
우연희가 세리를 흔들었지만 세리는 손만 휘휘 젖는다.
엄마와 딸.
그래 딱 그런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우연희의 별명이 ‘엄마’였지?
마지막으로 보이시한 숏컷을 한 양은비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왔다.
이번엔 노란색 파워터프걸이다.
메인 댄서이자 랩을 맡은 양은비는 162cm의 키에 팀 내 유일의 글래머다.
베이글의 표준형이랄까.
앳된 얼굴과 반대로 파자마가 터질 정도로 볼륨이 넘친다.
“어? 한 팀장님. 이 오빠는 누구예요?”
동그랗게 뜬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양은비의 호칭에 한명호 팀장이 발끈했다.
“은비야. 난 아저씨고 얜 오빠냐?”
“맞잖아요. 한 팀장님은 이제 결혼도 했고 배도 좀 나왔고 나이도 좀 있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논리적으로 말하는데 한명호 팀장이 차마 대꾸를 못 했다.
베이글 논리왕 양은비는 그렇게 한명호 팀장을 격침시켰다.
일단 애들이 다 모였기에 나도 고개를 숙여 스스로를 소개했다.
어차피 정실모 두 명을 도와주려면 나머지 애들도 다 키워 줘야 하니까.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배우 2실에 소속되어 있는데 오늘 임시로 여러분 매니저를 맡게 된 정윤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손하게 인사하자 그제야 애들이 꾸벅하고 인사한다.
“넵. 저희도요. 잘 부탁드려요.”
맏언니인 우연희의 인사에 나머지도 따라 인사하기 시작했다.
“넵~ 오빠.”
세리 넌 눈이나 뜨고 대답하지.
“오늘 하루 잘 해 봐요!”
양은비가 씩씩하게 인사했고.
“잘 부탁드립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의 은아까지 모두의 인사를 마치고 난 다시 현관으로 나서며 신발을 신었다.
“넌 어딜 가냐?”
“밑에서 차 대기시켜 놓을게요.”
“그럴래?”
은아가 아직 화장실을 못 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피해 줘야 할 것 같았다.
한 발자국 앞으로 딛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두 발자국 뒤로 돌아가니까.
“그래 애들 챙겨서 내려갈 테니까 밑에 있어.”
인사를 꾸벅하고 돌아서며 반드시 이 그룹을 지키겠노라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은아와 세리가 슬퍼하는 건 두 번 다시 보기 싫었으니까.
* * *
우르르르.
마치 양몰이를 하듯 한명호 팀장이 아이들을 이끌고 내려왔다.
각자 짐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길래 얼른 차에서 뛰어 내려가서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윤호 오빠. 어어어?”
김세리가 꾸벅이며 인사하다 휘청거림을 못 이기고 쓰러질 뻔했다.
그걸 본 난 급히 손을 내뻗어 김세리를 붙잡았다.
덜컥.
“어 안 넘어졌다!”
김세리가 내 팔을 붙잡고 환히 웃는다.
“와~! 유노 오빠. 엄청 빠르다!”
일정 시작도 전에 피부터 볼 뻔했다.
역시 세리는 여전하구나.
길치에 방향치 그리고 몸치.
이러고도 걸그룹을 하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다.
그래서 나중에 솔로 가수로 데뷔해서 춤은 애기 춤 정도로 그치긴 했다.
그래도 얘가 근성 하나는 끝내줘서 지금까지는 춤을 ‘배워서’ 익힌 상황이다.
수없는 반복으로 말이다.
“세리야. 너 진짜 조심 좀 해. 그러다 무릎 까진댔지?”
황급히 달려 나온 우연희가 세리를 데리고 가며 나무랐다.
하지만 세리는 야단을 맞으면서도 배시시 웃기만 했다.
“엄마~ 나 아야 할 뻔했어.”
우연희가 세리에게 가차 없는 딱밤을 먹였다.
딱!
“아얏! 왜 때려?”
세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우연희가 쌍심지를 켰다.
“너 예전에도 무릎 까져서 치마 못 입은 거 생각 안 나? 네 무릎에 상처 난 거 생각하면 아직도 속상해 죽겠는데 계속 이럴 거야?”
진짜 엄마처럼 마음 아파하는 모습에 세리가 미안한 표정으로 우연희의 품에 포옥 안겼다.
“아잉~. 화내지 마. 언니. 잘못했어요.”
고목 나무에 매미 같다.
“아이고. 진짜 내가 이걸. 확.”
우연희가 화를 낼수록 세리가 얼굴을 가슴팍에 비볐다.
결국 화가 풀려 버린 우연희는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내게 말했다.
“고마워요. 윤호 오빠. 우리 세리가 이렇게 좀 덜렁거려요.”
“안 다쳤으면 됐어.”
우연희가 인사를 꾸벅하고 세리를 데리고 차에 올라탔다.
그 뒤를 이어 양은비가 주춤대는 은아를 데리고 뛰어나왔다.
“야. 빨리 가자. 이러다 늦겠어.”
“그치만······ 언니.”
“뭔 그치만이야. 얼른 타.”
“으응.”
고개를 푹 숙인 은아는 키가 한 뼘 작은 양은비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움직였다.
은아는 차마 내 눈도 못 마주치고 양은비의 팔만 껴안고 휘리릭 지나갔다.
저 습관 고치려면 꽤 오래 걸리겠는데.
그래도 저 낯가림이 무대 위에선 발휘되지 않으니 천만다행이지.
“자자. 윤호야. 타자.”
둘둘이 그렇게 짝을 맞춰 차에 타는데 한명호 팀장이 귀띔을 해왔다.
“쟤들 서로 간에 사이가 좋긴 한데 어지간하면 저렇게 둘둘 같이 다니게 해. 그게 찍덕들에게 보기 좋거든.”
하긴 우연희와 세리는 엄마와 막내딸 그리고 양은비와 은아는 기 센 언니와 부끄럼쟁이 여동생처럼 보인다.
“자자. 오늘도 좋은 일이 생기길 빌어 보자. 윤호야. 어서 가자.”
“예.”
차에 올라타서 눈을 감는 한명호와 아이들을 보며 다짐했다.
아무도 모르는 오늘 밤의 미래.
11시에 찾아올 앨범 삭제 통보.
그걸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고.
그리고 반드시 좋은 일로 가득한 새 스케줄을 만들어 줄 거라고.
* * *
무대에 서기 위해 헤어샵을 먼저 들렀다.
체리블라썸을 헤어샵에 들여보내고선 김밥백화점에서 김밥을 사서 돌아왔다.
“얘들아. 여기 밥.”
드라이어로 스타일링을 하는 애들에게 김밥을 안겼다.
김밥 두 줄도 부족할 나이지만 몸매 관리 때문에 늦은 아침으로 각각 한 줄이 끝이다.
그런데 참 성격대로 먹는다.
우연희는 다소곳하게 하나씩 착실히 먹고 양은비는 2개씩 한꺼번에 넣은 다음 우걱우걱 씹는다.
세리는 확실하게 하나씩 먹는데 몇 번 안 씹고 삼키는 듯 먹는 속도가 제일 빨랐다.
은아는 조물조물대며 하나를 먹는데 한참을 씹어 넘겼고.
제일 먼저 먹은 건 세리다.
김밥을 다 먹은 뒤 손가락을 빨아대고 있었다.
한창 클 나이에 김밥 한 줄이니 부족하겠지.
갑자기 가슴이 짠해진다.
이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당장이라도 연예인 관두라고 할 거 같단 생각도 들고.
하지만 이내 머리를 털었다.
오늘 체리블라썸을 이슈의 중심으로 만들려면 약한 마음을 먹을 틈이 없었으니까.
올라가자 얘들아.
고생한 만큼 성공해야지.
애들 밥 먹는 걸 끝까지 지켜보던 한명호 팀장은 이젠 우리도 밥을 먹자 말했다.
하지만 난 나가려는 한명호 팀장을 붙잡았다.
“팀장님. 오늘 돈 좀 더 쓰시죠?”
한명호 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