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2. 리턴
D-30.
죽다 살았다.
위 천공으로 과다 출혈이 생긴 탓에 쇼크로 심장이 멈췄다나?
하지만 간신히 살아나 보니 어이없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암 말기.
한 달짜리 시한부 인생이란다.
“하 하하하. 농담이시죠? 선생님?”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더는 손을 쓸 수가······”
의사는 백만 분의 일의 확률로 신경성 위염이 급속도로 암으로 진행되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럴 리가 없다며 다시 검사해 달라고 고함쳤지만 의사들은 아프지 않게 해주겠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몸도.
정신도.
내 목숨이 겨우 한 달 남았다니.
남은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고 죽으라는 신의 배려인가?
하지만 그 배려가 독이었다.
D-29.
팀장 이하급 직원들이 병원에 들른 게 끝이었다.
그리고 난 과일 바구니를 정리하던 아내에게 구민지 기자에게 들었던 일을 물었다.
하지만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가 버렸다.
그 대답을 듣는 덴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D-25.
이혼 서류가 도착했다.
구민지의 말이 맞았다.
주영인은 동수 형 아니 김동수 그 인간과 내연 관계였었다.
내가 등신이었구나.
아니지 배신한 사람이 잘못한 거지 왜 내 잘못이야?
그래도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혼 서류만 보낸 거.
너무 잔인하지 않냐?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 싶다.
D-14.
씁쓸했다.
내 손을 거쳐 탑스타의 자리에 올라간 놈 중 병실에 찾아온 놈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여간 인성하고는.
저런 놈들을 케어하느라 내 건강을 망쳤다는 게 실망스러울 뿐이다.
D-10.
‘정실모’가 병실에 나타났다.
정윤호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다.
첫 직장인 굴렁쇠 엔터 시절.
전 사장님과의 의리를 지키느라 동수 형과 내 손을 잡지 않은 배우와 가수들이다.
그런데 왜 동수 그 인간이 아닌 내 이름을 붙였냐고 묻자 대답이 간단했다.
동수 그 자식은 애초에 그럴 줄 알았지만 나는 굴렁쇠에 의리를 지킬 줄 알았다나?
김동수와 내가 나온 뒤로 굴렁쇠는 오래가지 못하고 자금난에 시달리다 폐업해 버렸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대표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고.
그래서 싫어했단다.
하지만 싫다는 말과는 달리 죽어가는 날 찾아와 준 건 정실모 멤버들뿐이었다.
그리고 왜 내가 굴렁쇠를 떠났는지 아니까 이해도 간다는 말도 해 줬다.
오늘부턴 정사모로 바꿀 테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격려하는 이들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나왔다니.
이들의 곁에 남아 함께 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난 병실에 온 정실모의 멤버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유은아 김세리 이태풍 강하나 박상규 최덕배.
그런데 정실모 1호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유진.
23살에 딸 미소를 불행한 사고로 잃고 인생이 바뀌어 버린 여배우.
그녀는 여전히 날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다.
하긴 미소가 죽은 후.
그녀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으니까.
내 인생 역시 말이다.
D-7.
숨이 가빠 와 호흡기를 달았다.
이제 다이어리를 쓸 힘도 없다.
슬퍼할 기력마저 사라지고 없었고.
입안으로 들어오는 인공호흡기의 이물감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뱉고 싶은데 뱉을 힘이 없다.
죽음이 눈앞에 온 것 같다.
D-3.
몸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
유진이를 꼭 보고 가고 싶은데 오늘도 병실에 오질 않았다.
하긴 그녀가 온다고 해도 내가 무슨 염치로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볼까.
D-1.
크리스마스이브.
10년 동안 가 보지 못했던 미소의 잠들어 있는 추모공원에 가 보고 싶다.
그때 내가 김동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미소가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직도 방긋 웃던 미소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죽으면 볼 수 있을까?
D-DAY.
엄청난 양의 진통제를 사용해 고통은 없다.
고요하고 평온한 감각만이 느껴졌다.
죽기 싫다고 저항하는 것도 한때.
난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혼 서류가 도착한 이후부터 내가 가진 재산을 펑펑 써 버렸다.
정실모가 진행 중인 연극과 독립영화를 후원하고 병원비하고 남은 건 병원의 환우들에게 기부해 달라고 했다.
전 아내에겐 한 푼도 주기 싫었으니까.
종교는 없지만 천국에 가고 싶었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어제저녁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법원으로 보냈다.
오늘 접수되었겠지?
난 자유다!
비록 죽어가고 있지만 말이다.
이러면 법적으로는 총각으로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내 수명이 끝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심장이 천천히 뛴다.
오감이 천천히 무뎌지며 호흡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유진이의 목소리다.
올해 33살.
황룡영화제 여우주연상 3회 연속 수상에 30%가 넘는 드라마를 5편이나 찍은 한국 최고의 여배우 정유진.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란 평가를 들으며 할리우드 진출까지 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꿈인 것처럼.
“이게 뭐야! 오빠! 왜 이러고 있는데!!”
비탄에 찬 유진이의 목소리가 온 병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건강관리를 왜 이렇게 했냐고 한참이나 욕을 하던 유진이가 히끅대며 말했다.
“미소 일은 오빠 잘못 아냐. 내가 그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오빠 원망했는데 미안해. 그리고 미소가 어제 꿈에 나왔는데 거기서 행복하대. 즐겁대. 그러니까 오빠.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그 일만 없었으면 너도 나도 조금은 더 행복했을 텐데.
난 남은 모든 힘을 다해 호흡기를 치운 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미안······해. 먼저 가서 미소······잘······돌볼 테니까······넌 천천히 오래 살다 와라. 나중에······ 보자.”
힘겹게 말을 끝낸 난 한 홉의 거친 숨을 들이마신 뒤 심장이 멎는 기계음을 들으며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부르르르.
익숙한 진동에 왼손이 간질거렸다.
왜지?
난 죽었는데 왜 손에서 폰 알람 진동이 느껴지는 거지?
아 천국행 대기 번호 진동 벨인가?
어떻게 생긴 건지 보고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데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 맞다.
눈 감고 있었구나.
“끄응.”
힘겹게 눈을 뜨니 왼손에 들린 폰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죽어서도 일을 하라는 알람인가?
그런데 잠깐만.
왜 내 손에 들린 게 갤럭티카 노트10이지?
이건 10년 전에 나온 구형 폰인데?
심지어 다이어리에 있는 날짜도 이상했다.
[에브리데이 V1]
[날짜 : 2019년 12월 12일]
[현재 시각 PM 12:25 경기도 구리 세트장]
-PM 12:30 경기도 구리 세트장. 정유진 <아침이 간다> 21회 첫 출연. (알람 설정) -PM 04:00 MBS 연예인 퀴즈퀴즈 세트. 정유진 게스트 출연.
-PM 08:00 정유진 연기 레슨 수업.
2019년?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지만 숫자는 변할 기미가 없다.
거기다 왜 하필 2019년 12월 12일인지 모르겠다.
이날은 유진이와 그녀의 유일한 가족 미소에게 그 일이 생긴 날인데 말이다.
저승에선 가장 끔찍한 날을 무한 경험한다던데.
내가 지금 그런 상태인 건가?
아니면 죽기 직전에 과거에 있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하는 주마등 같은 건가?
그때였다.
백합 향이 가득한 샴푸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윤호 오빠?”
은은한 샴푸 향만큼이나 기분 좋은 속삭임에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눈앞에는 23살 무렵의 유진이의 얼굴이 있었다.
립글로스만 칠한 유진이의 입술은 핑크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풍성한 머릿결은 마치 샴푸모델처럼 찰랑거렸다.
“으허억!”
유진이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기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그녀는 두꺼운 붉은 파카를 여미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감기 걸린 거 아니에요?”
유진이가 거리를 좁혀오며 기다란 손을 내 이마에 댄다.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뭐지 이 감각?
꿈이 아니다.
이 감각.
이 체온.
그리고 12월의 삭풍의 바람이 몰아치는 세트장까지.
영문은 몰라도 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 50m 정도 떨어진 주차장 한편에 히터 하나 없이 대기 의자도 아닌 콘크리트 블록 위에 쪼그리고 앉은 초라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상하다? 열은 하나도 없는데?”
왼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내 이마의 열을 확인해 보던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습관적으로 안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유진아. 여기 핫팩······”
그런데 핫팩이 없다.
그 탓에 우습게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회귀했다는 것을.
이런 간단한 준비물도 챙기지 못했던 1년 차 풋내기 시절로 말이다.
* * *
천호동 버거 소녀.
1년 전 유진이가 버거퀸 천호동 지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당시의 별명이다.
당시 유진이를 보러 온 사람들 덕에 천호동 지점의 매출이 전년도 대비 500%나 오르며 큰 화제가 되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여러 기획사의 실장급들이 그녀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그런데 어떤 제안에도 응하지 않던 그녀는 굴렁쇠 강감찬 대표의 스카우트에 덜컥 응해 버렸다.
인지도가 있으니 곧장 데뷔할 줄 알았지만 어쩐 일인지 강감찬 대표는 유진이에게 1년간의 레슨을 지시했다.
유진이를 왜 곧바로 데뷔시키지 않냐는 내 질문에 강감찬 대표는 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해서 몸을 잔뜩 움츠린다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얼마나 철저히 노출을 막았는지 1년이 지난 이 시점에선 천호동 버거 소녀의 인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유진이는 1년 만에 처음으로 대사가 있는 배역을 맡아 촬영장에서 대기 중이다.
“괜찮아. 자 잠을 조금 못 잤을 뿐이니까.”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내 이마에 손을 대고 있는 유진이의 새하얀 손을 잡아 내렸다.
떨리는 감정을 숨기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하며 안심했단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신난다는 말투로 점심 메뉴를 말하기 시작했다.
“오빠. 오늘 점심 밥차에 명태살로만 만든 특제 어묵탕이 나온대요. 아으~. 고춧가루를 팍팍 풀어서 국물 한 모금 마시면 속이 확 풀릴 텐데. 그쵸?”
코끝이 찡하게 울리는 추운 날씨.
유진이는 뜨거운 국물 생각이 간절한지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이 무렵 유진이가 한창 다이어트 중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깐만. 너 다이어트 중이잖아.”
유진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건······ 내일부터 하면 되잖아요.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그런 말도 있다던데······”
귀엽게 혀를 살짝 내미는 모습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유진이의 눈에는 간절한 애원의 빛이 깃들어 있었지만 들어줄 수가 없다.
“그거는 일반인들한테 통하는 이야기고. 연예인은 언제나 다이어트인 거 몰라?”
“와. 진짜 너무하다. 배우고 뭐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유진이가 고개를 살짝 떨구며 투덜거렸다.
블라우스가 헐렁해 쇄골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이다.
하지만 이런 유진이도 체중을 줄여야 했다.
165cm의 키를 가진 유진이의 현재 몸무게는 52kg이지만 방송국 카메라는 실물보다 최소 5kg은 더 나가게 보이게 하니까.
그 탓에 매니저가 되어 가장 많이 한 말은 ‘살 빼!’였다.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평생 카메라 앞에서 살아야 하는 연예인이니 어쩔 수가 없다.
“아. 오늘은 진짜 어묵탕 먹고 싶은데······ 내일부터는 다이어트 잘할 수 있는데.”
유진이의 투덜거림에 이렇게 답했다.
“먹어. 단 국물 빼고. 양념장 빼고.”
유진이가 날 쏘아보며 외쳤다.
“악마다 악마! 그 말은 떡볶이에서 고추장 빼고 먹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악마라니.
적어도 먹지 말라고는 안 하잖아.
이 정도면 천사 아냐?
삐죽하고 입술을 내민 유진이를 보자 절로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꿈에도 그리던.
밝은 얼굴을 한 유진이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으니까.
* * *
현재 50m 정도 떨어진 곳에선 MBS 월화 드라마 <아침이 간다>의 촬영이 준비되고 있었다.
드라마계의 대모라 불리는 이지연 작가가 극본을 쓴 <아침이 간다>는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지키고 있는 작품이다.
유진이는 작품의 후반부인 21화 22화 두 화에 투입되어 주인공의 친구 역인 이설란을 연기하게 된 상황이고.
삐-.
저 멀리 확성기에서 고막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확성기에 대고 외치는 박 PD의 타박이 이어졌다.
“명식아! 조명판 제대로 안 들지! 너 인마 배우 얼굴보다 몸에 관심 있냐?”
“정훈이 너도! 붐 대 똑바로 잡으라고! 화면에 털 날리는 거 다 보여! 어서 카메라 앵글 밖으로 빼.”
“자자 이제 촬영 들어갑니다. 소리 내지 마세요. 레디~ 악숀!”
50m나 떨어진 세트장이지만 산 때문에 메아리가 생겨 현장 상황이 생생히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난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떠올리느라 현장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나와 유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