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192. 내려오는 것도 즐겁게 1
아이돌이 난립하는 음악 시장에는 하룻밤만 지나도 무수한 신인들과 신곡이 쏟아져 나왔고 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경쟁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그 탓에 활동 중단을 할 때도 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게 신경을 써야 했다.
특히 아직 팬카페만 있고 정식 팬클럽은 없는 체리블라썸의 경우는 더 조심해야 했다.
그대로 활동 종료를 했다가는 다른 아이돌의 덕질에 팬들을 뺏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팬들에게 해줄 ‘감사 이벤트’를 기획했는데 갑자기 끼어든 이기철 이사가 내 계획에 초를 치려 들고 있었다.
6층 회의실로 올라가자 이기철 이사와 함께 강지영 본부장을 비롯해 가수 1실과 2실의 실장과 팀장들이 다 모여 있었다.
홍보팀장인 성민석과 안무팀장인 성은수도 오늘 회의에는 참석해 있었고.
내가 마지막 참석자였기에 자리에 앉자마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기철 이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체리블라썸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강지영 본부장이 대답했다.
“이제 방송 출연이랑 행사도 다 정리했고 주말에 음방만 남았어요.”
“하긴 이제 활동 종료를 할 테니까 정리해야 하는 게 맞지. 아 그리고 애들 컨디션이 안 좋다고 했지? 끝나는 대로 병원에 보내서 몸 관리 좀 할 수 있게 해줘.”
“안 그래도 계속 클리닉을 다니며 컨디션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기철 이사가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어허. 그런 데 말고 제대로 된 곳으로 보내야지. 대학병원급으로 알아봐. 우리 회사의 기둥인데 대접이 그리 박해서야 원!”
이기철 이사가 체리블라썸을 챙겨주려는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회사의 주요 수익원이 되어주던 골든로드의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은지유 대리가 빠지면서 구심점이 사라진 골든로드는 시간이 갈수록 제멋대로 굴고 있었고 덕분에 일본 쪽에서도 관리가 안 된다며 연일 항의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어떻게든 체리블라썸과 관계를 좋게 개선한 뒤에 일본 진출을 꾀하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분명 최만식 대표가 은연중에 손을 썼을 게 틀림없다.
뭐 물론 강지영 본부장과 이동민 실장은 눈 하나 깜빡 안 했지만 말이다.
이기철 이사가 이번엔 성민석 홍보팀장에게 말을 건다.
“성 팀장. 이번 주말에 홍보비는 얼마로 풀기로 책정했나?”
“5천만 원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허! 그거 가지고 되겠어? 1억까지 올려. 홍보팀 전원이 기자들 만나서 밥 한번 거하게 사 먹이고. 그리고······ 알지?”
이기철 이사는 뒷말을 흐리며 별도의 접대를 지시했다.
하지만 이번엔 이동민 실장이 반기를 들었다.
“저기 이사님?”
“왜?”
“그냥 저희 기획안대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준비도 다 끝났고 예산도 이미 투입되었습니다.”
거듭된 반론에 이기철 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봐 이 실장. 아무리 임시라지만 내가 대표이사 역할을 하는 걸 몰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때는 가장 힘없는 실장이라 불렸던 이동민 실장은 체리블라썸이 잘 나가자 누구보다 발언권이 강해진 상태였다.
“대체 뭘 하려고 다들 반대야? 한번 들어나 보지.”
이동민 실장이 내 쪽을 바라보며 말하라고 한다.
“정 팀장이 대신 보고 좀 하지?”
“정 팀장이?”
이기철 이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물론 자리에 참석한 가수 1실의 차상진 실장의 얼굴도 마찬가지였고.
꾸벅하고 인사한 뒤 회의실에 있는 LCD 화면에 PPT 파일을 띄웠다.
“이번이 10주 연속 1위 도전 무대입니다. 어차피 기자들은 돈을 뿌리지 않아도 알아서 기사를 쓸 겁니다.”
“크흠.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이기철 이사의 입에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난 깔끔히 그 말을 무시해 버렸다.
“음방 당일 참석하는 팬들에게 머리띠와 응원봉 기타 굿즈와 도시락 같은 역조공으로 대미를 장식해 볼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가수 1실의 차상진 실장이 태클을 건다.
“기자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팬들에게 역조공을 왜 해? 격 떨어지게.”
차상진 실장이 그런 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차상진 실장은 스타병에 걸린 스타들만 다루다 보니 팬들이 얼마큼 소중한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팬들은 오로지 ATM기나 다름없었으니까.
“역조공을 하면 스타그램을 하는 팬들 덕에 추가 광고 효과가 생길 겁니다. 저희 팬클럽 카페 회원 중에는 팔로워 20만 이상의 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도 여러 명 있으니까요.”
충분히 설명했지만 서예종 라인 식구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을 만도 한데 이기철 이사와 서예종 라인의 몇몇 팀장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때였다.
결국 강지영 본부장이 결단을 내렸다.
“전 정 팀장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그리고 반대를 하실 거면 미리 말씀하셨어야죠. 하루 전날 이게 뭐 하는 거죠?”
이기철 이사가 날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본부장! 지금 제정신이야? 그냥 이대로 막내 팀장 뜻대로 일을 진행하겠다고?”
“예. 체리블라썸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게 바로 그 막내 팀장이니까요. 그러니까 마무리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경영진이 할 일이 아닐까요?”
“뭐? 뭐라고?”
강지영 본부장이 날 쳐다본다.
“정 팀장. 그대로 진행하세요. 안 되면 내가 전결로 할 수 있는 예산에서 빼서 써도 좋아요.”
이기철 이사가 연신 압박을 했지만 강지영 본부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참이나 이야기가 오갔지만 내 기획안에서 변한 건 전혀 없었다.
체리블라썸이 인기를 얻고 골든로드의 인기가 사라지자 강지영 본부장의 발언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었다.
역시 이 판은 데리고 있는 연예인들의 인기가 곧 매니저의 힘이 된다.
결국 이기철 이사는 씩씩거리며 입을 닫아 버렸고 그때부터 이동민 실장이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그런데 회의가 끝날 무렵.
한명호 팀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명호 팀장은 안무팀장인 성은수를 향해 말했다.
“성 팀장. 체리블라썸 고별 무대 준비로 당분간 연습실 좀 써야 하는데 연습실 좀 비워줄 수 있지?”
박선녀 안무가를 영입하자 성은수 안무팀장은 앙심을 품고 체리블라썸의 연습을 방해한 적이 있다.
그 일로 한동안 체리블라썸은 에어로빅 교실과 지하 소극장을 오가며 연습을 했었다.
그때의 복수를 하려는 한명호 팀장이다.
순간 성은수 안무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며 몇 시에 쓸 건데요?”
“아 시간은 나도 몰라. 당분간 쭈욱?”
한명호 팀장이 얄미운 표정으로 깐죽거렸다.
그 탓에 성은수 안무팀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명호 팀장은 단순한 복수를 하는 게 아니었다.
회사 내 가장 큰 1번 연습실에 대한 우선 사용 권한을 가지는 건 가수 파트에서는 일종의 권력이나 다름없었다.
굴렁쇠에서는 주로 데뷔한 아이돌이나 곧 데뷔시키려고 준비하는 애들을 1번 연습실에서 연습시키고는 했었는데 그걸 본 연습생들이 ‘어떤 연습실에서 연습하느냐’에 따라 자기 위치를 가늠하곤 했기 때문이다.
데뷔 조가 될지 아니면 언제 데뷔할지도 모르는 연습생 신분으로 계속 버텨야 할지를 말이다.
문제는 연습생들의 그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성은수 안무팀장이 어린 연습생을 상대로 장난질을 해댔다는 거다.
말을 잘 들으면 1번 연습실에서 연습을 아니면 2번도 아닌 3번에서 연습을 시키면서.
하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졸지에 권력을 잃게 된 성은수 팀장이 얼굴을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대답했다.
“오 오늘부터 1번 연습실은 ······ 비워두도록 할게요.”
그 순간 한명호 팀장이 너털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하지만 한명호 팀장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명호 팀장의 한풀이를 끝으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체리블라썸을 위한 선물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체크 해야 했다.
아름답게 무대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도 매니저인 내가 할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준비한 이벤트에는 한 가지 더 숨겨진 목적이 담겨 있었다.
* * *
주말 음악방송을 하루 앞둔 밤.
방선우와 장예빈이 준비 중인 체리블라썸의 차기 곡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지하 2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녹음이 한창이었기에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인간들이 집에도 안 가냐······”
난 1번 녹음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방선우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미 차기 곡은 미리 준비가 다 된 상황.
지금은 편곡 작업으로 곡의 퀄리티를 올리는 중이다.
체리블라썸의 차기 곡은 ‘연락해’라는 뜻을 가진 후크송 과 팝 발라드인 <여름 눈꽃>과 <처음 느낌>이라는 댄스곡으로 총 세 곡이다.
그중에서 <여름 눈꽃>과 <처음 느낌>은 회귀 전 에필.K가 표절해 걸프렌즈7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명곡이다.
당시 성적은 각각 4주간 1위와 3주간 1위.
그래서 난 <여름 눈꽃>을 타이틀곡으로 밀었다.
방선우가 편곡을 하고 나면 4주 1위가 아닌 그 이상도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회귀 전 들어보지 못했던 이라는 곡이 완성된 순간 타이틀곡을 뭐로 할지에 관한 판단을 보류했다.
듣는 순간 나를 비롯해 녹음실 멤버들과 가수 2실 모두 입을 모아 ‘이건 될 곡!’이라 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종 결정은 지금 녹음실에서 흘러나오는 의 편곡 작업이 끝난 후로 미뤘다.
10분 정도 지나자 작업이 잠시 끊겼다.
방선우가 언제 또 작업을 시작할지 몰라 냅다 문을 열고 1번 방으로 들어갔다.
“어? 윤호 형. 왔어요? ”
“선우야. 이만하면 편곡 끝내도 되지 않겠냐?”
목이 늘어진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방선우가 머리를 긁적인다.
“그 그게요······”
그 순간 곁에 앉은 장예빈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시작이에요. 선우 얘 완벽병 터져서 끝나려면 한참 남았어요.”
“그러면 언제쯤 완성될 거 같아? 애들한테 들려주고 싶은데.”
방선우가 또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마음이 여린 방선우였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지독한 면이 있었다.
“알았어. 완성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네! 형.”
방선우가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 고민이 끝나면 지금보다 더 좋은 곡이 나올 거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너 며칠째 집에 안 들어갔어?”
“요즘은 매일 들어가요. 란희 누나가 출퇴근시켜주거든요.”
“그런데 옷이 왜 그래?”
“아 이거 작업용 옷이요. 이걸 입어야 왠지 작곡이 잘 되더라고요.”
방선우가 늘어난 티셔츠의 목을 가리키자 장예빈이 곁에서 키득거렸다.
“목이 늘어나서 영혼이 자유롭게 느껴진대요.”
무슨 그런 헛소리를.
그냥 여기가 자기 안방처럼 편하게 느껴지는 옷이겠지.
방선우가 장예빈을 째려본다.
“그러는 누나는? 누나는 작업할 때 머리를 안 감······”
“야! 죽을래! 누 누가 그래! 나 매일 샤워해!”
방선우가 장예빈의 비밀을 폭로하자 장예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사람들이 징크스 하나 정도는 가질 수 있지.
머리 좀 안 감으면 어때?
이 업계 최고의 실력자들인데.
나는 마치 오누이처럼 서로의 디스를 멈추지 않는 두 사람을 중재했다.
그때였다.
“선우 오빠! 저 왔어요!”
언제 들어도 우렁찬 세리의 목소리가 지하 녹음실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 연이어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각에 얘들이 여기는 웬일이지? 내일 새벽부터 마지막 음악방송을 준비해야 하는데?’
세리가 녹음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어? 유노 오빠도 있었네? 오늘 바쁘다면서 여기 왜 있어요?”
“깔끔하게 끝내고 왔지.”
“역시~ 우리 유노 오빠. 그런 의미에서 세하~.”
세리가 쌍 하이파이브를 하겠다며 양손을 든 채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하이파이브를 해주기 위해 두 손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다가오던 세리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세리는 갑작스레 목을 쭉 내밀고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밀더니 냄새를 킁킁 맡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붙잡았다.
“으웩. 술 냄새. 유노 오빠. 술 마셨죠?”
저녁때 일이 있어 삼겹살과 함께 반주를 곁들었다.
딱 한 잔밖에 마시진 않았지만 세리는 기가 막히게 그 냄새를 알아차렸다.
심지어 페브리즈도 뿌렸는데 말이다.
‘삼겹살 냄새는 안 나니?’
나는 가슴에 머리를 묻고 킁킁거리는 세리의 작은 머리통을 살짝 밀어냈다.
하지만 세리는 기어코 삼겹살을 먹은 것까지 알아차렸다.
“어? 삼겹살도 먹었네? 와~ 유노 오빠. 이거 배신이야 배신! 그거 알죠?”
삼겹살의 기름기 때문에 애들이 종종 배탈이 나곤 했기에 활동 중에는 일절 식단에 넣지 않았다.
단백질을 섭취하는 건 주로 삶은 달걀과 닭가슴살을 통해서였고 가끔 소 불고기를 먹일 뿐이었다.
덕분에 세리가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항의를 해왔다.
“우리는 퍽퍽살 주고! 오빠는 고소한 삼겹살 먹고! 유노 오빠. 이거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언니들한테 다 이를 거야!”
“알았어. 어차피 활동 기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활동 끝나는 대로 내가 배 터지게 사줄게. 삼겹살이든 오겹살이든. 뭐든 간에.”
그제야 세리의 얼굴이 환해진다.
“진짜죠? 그러면 약속! 그리고 배 터지게는 절대 잊으면 안 돼요?”
“그래 약속.”
그제야 세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사이 체리블라썸이 녹음실로 들어왔다.
“어? 오빠도 있었네요?”
어지간히 지쳤는지 축 처진 어깨로 들어오던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날 보고 화들짝 놀란다.
현재 시각은 밤 11시.
내일 마지막 음방에 가려면 숙소에서 쉬고 있어야 할 시각이었으니까.
“다들 안자고 여긴 어쩐 일들이야? 내일 스케줄 가려면 좀 쉬어야지.”
순간 세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