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191. 보홀섬을 떠나며 2
보홀섬의 경찰서장 에디는 아하스 갱단의 보스 다니엘의 선물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쿵.
가로세로 50cm 정도 되는 검은 가죽 가방은 무거운 게 들었는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어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다니엘 보스의 사과입니다.”
혹시 탄원서라도 써달라는 거냐고 묻자 제이슨 대표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조무래기들이 잡혀가는 건 늘 있는 일인 데다 하부 조직원을 신경 쓸 사람이 아닙니다. 당연히 이번 일도 다니엘이 시킨 게 아니고요.”
“그러면요?”
곁에 있던 에디 서장이 눈치를 보다 말을 꺼냈다.
“사실 아하스 갱단 보스 다니엘에게 애니라는 이름의 딸이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아침에 애니가 난생처음으로 아빠한테 화를 냈다고 하더군요. 아빠 부하들 때문에 자기는 죽을 때까지 유진 씨를 못 보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설마 유진이 팬입니까?”
에디 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식음을 전폐한 다니엘 보스의 딸 애니가 섬이 떠나가라 울고 있다고 한다.
모두가 아빠 탓이라고.
부하 관리를 잘못한 아빠 때문에 자기는 평생 미움을 받을지 모른다고.
15살의 애니는 흔한 말로 중2병이 폭발할 시기였기에 다니엘 보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이렇게 선물로 호의를 사려 하는 거란다.
에디 서장이 내 눈치를 보며 한숨을 쉰다.
“솔직히 이해가 안 가실 거라는 거 압니다.”
“아뇨. 반 정도는 이해했습니다. 갱단 보스라도 자기 딸은 남다르겠죠. 하지만 서장님이 직접 이러는 게 더 이해가 안 갑니다.”
갱과 경찰.
어떻게 봐도 유착이다.
한 지역의 치안을 책임진 경찰 고위직이 이렇게 대놓고 갱의 심부름꾼 노릇을 할 줄은 몰랐다.
수상하다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에디 서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다니엘 그 녀석과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하지만 경찰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떳떳하지 않은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만약 유진이가 사과를 받아준다면 한국인에 대해서는 아예 손대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전했다면서.
아무리 딸바보라고 하지만 이 정도의 제안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갱단 보스의 제안이라 고민을 하자 제이슨 대표가 에디 서장의 말을 거들었다.
“다니엘이 갱단 보스긴 해도 거짓말을 할 인간은 아닙니다.”
결국 난 유진이를 불렀다.
“유진아!”
2층에서 귀국 준비를 하던 유진이가 내려왔다.
사정을 들은 유진이가 피식 웃는다.
“뭐가 고민이에요?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그만이지.”
“네가 갱단 보스와 조금이라도 얽히는 게 싫어서.”
“그러면 선물만 안 받으면 되죠. 그리고 애니가 무슨 잘못이에요. 용서는 받아들인다고 전해주세요.”
“괜찮겠어?”
유진이가 싱긋 웃는다.
“제가 나서면 범죄가 줄어들 수도 있다면서요?”
“어. 그렇지. 마더 테레사처럼?”
“그 그분과 비교는 좀 그렇지만······ 어쨌건 가능만 하다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알았어.”
그 순간 유진이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아 참 오빠. 그런데 선물을 안 받으면 거절당했다고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사인이나 한 장 해서 보내 주는 거 어때요?”
“그래. 그렇게 하자.”
유진이의 결정을 에디 서장에게 전했다.
에디 서장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유진 씨 덕분에 많은 관광객이 안전해질 겁니다.”
“천만에요.”
그때부터 유진이는 자신의 얼굴이 프린팅된 사진에 사인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에디 서장이 가지고 온 가방에 시선이 닿았다.
솔직히 선물이 뭔지 궁금했으니까.
“서장님. 그런데 다니엘 보스의 선물이 대체 뭡니까?”
에디 서장의 얼굴이 다시 한번 밝아진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아뇨. 받을 생각으로 물어본 건 아닙니다. 대체 뭐가 들었기에 그렇게 무거운 소리가······”
찌익.
에디 서장이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설마 금괴?’
납작한 황금빛 덩어리에는 선명히 1000g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파여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몇 갭니까?”
“10개입니다. 통관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받아만 주시면 한국에서 받을 수 있게 해준답니다.”
금괴 1kg은 대략 6천만 원.
10개면 무려 6억이다.
‘사과 한 번에 6억을 태워? 미친······.’
유진이도 봤나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태연한 얼굴과 달리 유진이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덕분에 반듯한 유진이의 사인이 점점 괴발개발 적은 것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아 왜 왜 이러지? 호호. 손이 왜 떨려?”
어색한 웃음을 짓던 유진이가 사인을 멈췄다.
유진이가 가죽 가방을 힐끔 쳐다보더니 내 귀에 대고 속닥였다.
“오 오빠? 저 저게 뭐예요?”
“금괴.”
“진짜 금괴요? 금괴 모양 초콜릿이나 18K 그런 거 아니고요?”
“응. 순금 1kg 10개. 다 알면서 왜 물어?”
“안 믿겨서요. 그 그런데 저걸 우리한테 다 준다고 했다고요?”
“응.”
“내 내가 뭘······ 한 거죠?”
“뭐 하긴. 다니엘이 준 금괴를 보지도 않고 뻥 하고 찬 거지.”
유진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침을 꼴딱 삼킨 유진이가 조심스레 내 귀에 속닥거렸다.
“오빠. 우리 저거 다시 달라고 할까요?”
“쪽팔리게 어떻게 안 받는다고 한 걸 다시 달라고 해?”
“하긴 그쵸? 안 되겠죠?”
“너 진짜 갖고 싶은가 보다? 내가 말 해줘?”
유진이가 날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하고 웃는다.
“에이~ 농담도 못 해요? 그리고 내가 갖겠다고 말해도 오빠가 말려줘야죠! 서 설마. 제가 범죄 수익에 욕심내겠어요?”
“근데 왜 목소리가 떨려?”
“저런 돈을 보고도 안 떨릴 수가 있나요. 내가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그보다 저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인데······.”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역시 정유진.
어찌 국밥 이야기를 안 꺼내나 했다.
덕분에 내 몸을 둘러싼 긴장감마저 흩어져버렸다.
“세상에. 저걸 거절하다니. 정유진. 진짜 배가 불렀구나!”
유진이는 홀로 중얼거리며 사인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유진이의 사인이 점점 제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하는 걸 보니 흔들리던 마음이 빠르게 바로잡히고 있었다.
‘그래. 그게 너답지.’
미소를 위해 돈을 모으는 유진이었지만 그래도 선을 넘지 않는 모습이 좋았다.
매니저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연예인이 그 선을 넘으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게 매니저의 숙명이었으니까.
뿌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속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고맙다. 유진아.”
“예?”
“아 아냐. 사인이나 마저 해.”
“오빠가 부른 것 때문에 사인이 엉망이잖아요. 이거 봐요 이거!”
아니 그건 네가 금괴 보고 놀라서 그은 선 같은데?
하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싶어 입을 꾹 닫아 버렸다.
* * *
필리핀에서 돌아왔을 때는 출국 때와 달리 안전하게 차에 오를 수가 있었다.
최양한 대표가 인천공항공사의 협조를 받아 입국 심사 때부터 우릴 경호했기 때문이다.
유진이와 미소를 집으로 보내놓은 뒤 잠실 원룸으로 돌아와 온종일 잠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오늘도 역시 유진이의 새로운 일정이 하나 떠올라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7월 1일]
-AM 11:00 [NEW. 정유진] <신의 이름으로> 크랭크인. 경기도 양평 세트장.
일단 새롭게 생긴 다이어리에서 확실한 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에브리데이 V10처럼 일정이 삭제된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유진이에 한정해서 일정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다음번 업데이트 때는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단편적이나마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단 희망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에브리데이 V10.1.’
폰을 쳐다보며 피식하고 웃는 순간 하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일어났으면 식사하세요.”
하루가 밥상을 차리다 인사를 해 왔다.
하루가 내온 조그마한 상에는 돼지고기 두루치기에 김치찌개가 놓여 있었다.
김치찌개의 시큼한 향에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그래. 어서 먹자.”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하루는 샤워를 마쳤다.
나는 머리를 털며 나오는 하루에게 이사 일정을 말했다.
“하루야. 이달 말일 정도에 유진이네로 이사 갈 거야.”
“공사가 벌써 끝났어요?”
“어. 거의 다.”
“잘됐다······.”
머리가 다 마르지 않은 하루는 아련한 눈빛으로 작은 내 원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마음 편히 잘 수 있었던 공간을 떠나는 게 아쉬운 모양이다.
“자. 그럼 빨리 옷 챙겨입고 나가자. 유진이네 집에 가야지.”
“네! 형.”
하루는 현재 세리가 다니는 ‘한영예술중학교’에 편입 절차를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출근하면서 유진이네 집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며칠 뒤에 있는 <먹방의 대가> 오디션을 위해 팔팔 노인정에 가서 ‘자신감 증진 프로젝트’도 수행해야 했으니까.
* * *
하루를 정인지 아주머니께 맡기고서 회사에 도착했다.
내일은 체리블라썸의 마지막 무대가 열리는 날.
본래라면 코카리스웨트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뒤 내일 MBS 현장에서 한명호 팀장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의 스케줄이 하루 앞당겨져 시간이 남았기에 쉬지도 않고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댄 뒤 유진이의 스타그램부터 확인했다.
[정유진@miso_1004]
[게시물 367 팔로워 28만 팔로우 270]
공항에 오신 분들 대박!
사랑해요~! 아이러브유! 워아니! 쎄쎄! 이히리베디히! 아이시떼루! ······ 마할끼따! 나쿠펜다!
(사진 : 팬이_보내준_공항사진.jpeg)
#공항사진 #대박 #유진이랑미소랑첫나들이 #싸랑해요 #팬들이이렇게많을줄이야 #나도이제연예인 #한류스타인줄
[좋아요♡ 12512개]
(댓글)
-Risa99 : 정유진 대박 이쁨! 미소야 언니가 격하게 아낀다!
-YEDAM : 정유진 그날 한 명씩 다 사진 찍어줬음. 인성 대박!
-padopadomidam : 공항 사진 찍으러 가서 개인 팬싸하고 온 기분. 미소도 일일이 다 사진 찍어줬음.
-burgerQ : 버거퀸은 추가 광고 안 만드나요? 왜 2탄에서 멈춰있음?
-tellmeSomething : 정유진 공항 사진에서 입은 옷 브랜드 어디 거예요?
“사랑한다는 말을 잘도 찾아 써 놨네. 그런데 마할끼따? 나쿠펜다? 이건 어느 나라 말이야?”
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 싶어 찾아보니 마할끼따는 유진이와 갔었던 필리핀어 타갈로그어였고 나쿠펜다는 동아프리카 쪽에서 쓰는 스와힐리어라고 한다.
“하쿠나마타타라고 안 한 것만 해도 다행인가······”
혹여나 이상한 말을 썼으면 대대손손 흑역사로 남았을 텐데 제대로 찾아보고 적은 것 같아 다행이다.
“이제 팔로워가 28만이네. 휘유. 정유진. 많이 컸다.”
점점 늘어나는 팔로워에서 유진이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연말에 있는 시상식은 드라마의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팬들의 지원이 절대적이다.
“어쩌면 올해 상 하나 받을지도 모르겠네.”
벌써 연말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 * *
체리블라썸은 이번 주를 끝으로 곡 활동을 마무리한다.
이동민 실장과 나는 그동안 고생한 체리블라썸을 위해 몇 가지 이벤트를 준비해 놓았다.
그 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정 팀의 사무실이 아닌 가수 2실부터 들렀다.
준비가 잘 되어 있었기에 잘 부탁한다고 말만 한 뒤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4층에 있는 정 팀의 사무실로 가자 새카맣게 탄 이영진이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필리핀에서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프라이팬을 딱 들고 강도를 물리치려고 갔는데!”
도란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오빠가요?”
“그래. 내가!”
거짓말쟁이.
프라이팬을 들고 와서 한 거라고는 놀란 미소를 껴안고 달래준 것밖에 없으면서.
“그러면 오빠가 강도 잡았어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하려던 이영진이 출근하는 날 발견했다.
순간 이영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잡는데 일조했지. 큰 도움이 되었다고나 할까?”
“일조요? 도움요?”
그 순간 이영진이 날 보며 꾸벅 인사를 한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이영진이 날 보며 윙크한다.
말을 맞춰 달라는 사인이다.
‘이걸 어쩐다?’
하긴 미소를 챙기고 병원에 데려다준 건 맞으니까 도움이 되었다는 말도 꼭 틀린 건 아니지.
도란희가 내게 인사한 뒤 물었다.
“팀장님! 영진 오빠 말. 진짜예요?”
“그래. 영진이 아니었으면 진짜 위험했어.”
순간 이영진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얘는 내가 뻥만 치는 줄 알아?”
“체. 오빠가 하도 뻥이 심하니까 그렇지!”
난 이영진을 향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모든 거짓말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니까.
이영진이 부들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최소 치킨값은 벌었다.
“자자. 쓸데없는 소리 말고 회의 준비하자. 내일 체리블라썸 막방 무대야. 란희야. 준비는 잘 되고 있지?”
“당연하죠.”
도란희가 가슴을 쭉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이동민 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윤호야. 회의실로 좀 와라. 가수 파트 전체 팀장 회의다.
“예? 지금요?”
-어. 이기철 이사가 체리블라썸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하자는데? 이러다가 우리가 준비한 게 무산될 수도 있을 거 같다. 일단 올라와!
주말 음악방송을 끝으로 활동을 종료하는 체리블라썸을 위해 착실히 이벤트를 준비해 놓았다.
그런데 이기철 이사가 그걸 방해하려 한단다.
‘누구 마음대로?’
난 전화를 끊고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절대 내 계획이 바뀌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설령 이기철 이사와 얼굴을 붉히고 맞서는 한이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