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190. 보홀섬을 떠나며 1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밑에 청록빛의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새하얀 백사장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기다란 반월의 모래사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버진 아일랜드.
그 아름다운 광경이 드러난 순간 배를 타고 있던 박불출 감독이 내리며 외쳤다.
“김 AD. 관광객들에게 양해 구하고 최 AD. 관광청 직원분에게 인원 통제 좀 부탁드려!”
우리가 탄 배 말고는 수십 척의 배들이 정박을 준비 중이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주요 관광지였기에 AD들은 배에서 뛰어 내려 인원 통제를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금방 촬영 끝내겠습니다.”
“얼마 안 걸릴 거예요.”
AD들이 빠르게 움직인 덕에 버진 아일랜드의 절반 정도를 온전히 촬영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유진이와 미소 그리고 회사 직원들이 탄 배도 버진 아일랜드에 닿았다.
하지만 얕은 수심에도 발이 닿는 장소에는 바닷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첨벙.
난 먼저 바닷물로 뛰어든 다음 유진이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혀.”
“괜찮아요. 오빠. 옷 들고 내리면 돼요.”
“안 돼. 드레스 입고 찍는 촬영인데 밑단 젖으면 다시 옷 바꿔 입어야 하잖아.”
“알았어요.”
고민하던 유진이가 내 등에 사뿐히 업혔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았는데 어제 온종일 굶은 터라 업었는지 안 업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모래사장까지 가는 짧은 순간에도 등에 업힌 유진이는 쉬지 않고 조잘대기 시작했다.
“나 무겁죠?”
“그다지?”
“치. 좀 가볍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나?”
유진이는 아침부터 말이 많아져 있었다.
어제 그렇게 화를 낸 게 무안한 모양이다.
유진이를 새하얀 모래사장까지 업어 나르자 이영진과 이미리 대리가 헐레벌떡 따라왔다.
이영진은 미소를 안고 내렸고 이미리 대리는 옷 가방을 가지고 내리고 있었다.
일행들이 모래사장에 다 오르자 박불출 감독이 빠르게 지시를 내린다.
“자. 촬영은 1시간 만에 갑니다. 스태프들 빨리빨리 움직이세요. 그리고 유진 씨가 맨발로 촬영해야 하니까 손이 비는 사람들은 다시 한번 모래에 이물질 있는지 확인해 주시고.”
버진 아일랜드가 열려 있는 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그 안에 수많은 컷을 찍어야 하는 터라 스태프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유진이와 미소를 이미리 대리에게 맡긴 뒤 이영진과 함께 모래사장을 훑기 시작했다.
* * *
박불출 감독의 사인에 유진이는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에 섰다.
“유진 씨. 준비되셨어요?”
“네! 감독님!”
박불출 감독이 스태프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배 위에 촬영 팀들은 어때요?”
“저희도 오케이입니다!”
모래사장 이외에도 10m 정도 떨어진 배 위에서도 촬영을 준비 중이었다.
“일단 드론부터 띄워요.”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촬영용 드론이 떠올랐다.
연이어 박불출 감독은 이동용 녹색 크로마키 배경을 든 2명의 AD를 불렀다.
“최 AD랑 김 AD는 컷 떨어지면 바로 뛰어가서 유진 씨 뒤에 서서 배경 깔고!”
“예.”
일사불란하게 이어진 지시는 눈 깜짝할 사이 끝이 났다.
“그러면 자. 손이 남는 스태프들은 지속적으로 관광객분들 통제해 주세요. 조용해지면 바로 촬영 스타트 합니다.”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주변이 고요해진 순간 박불출 감독이 촬영 시작을 외쳤다.
“레디~~ 액션!”
촬영 시작을 알리는 순간.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유진이가 버진 아일랜드의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하얀 드레스가 바람에 나풀나풀 날리고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천천히 걷는 유진이가 모래사장에 꽂혀 있던 코카리스웨트 캔을 조심스레 뽑아내었다.
캔에는 바닷물과 모래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캔을 딴 뒤 시원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세 모금 정도를 마신 유진이는 입에서 캔을 떼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카메라를 보며 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과 반짝이는 새하얀 모래사장 그리고 청록빛 바다 배경에 서 있는 유진이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이쁘네.’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박불출 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커트~! 이야~ 끝내주네요. 유진 씨. 1분 뒤에 바스트 샷 얼굴 클로즈샷! 연이어 갈 테니까 한 번 더 부탁해요.”
“네~! 감독님!”
이젠 완벽한 연예인이 된 유진이는 그 뒤로 몇 번이나 같은 연기를 이어갔다.
세트장이 아닌 현장 촬영이었기에 다양한 앵글에서 같은 연기를 반복해 찍어야 했으니까.
* * *
박불출 감독의 빠른 촬영과 유진이의 NG 없는 연기에 한 시간도 되기 전 마지막 씬을 찍게 되었다.
하루 만에 촬영이 못 끝날 경우를 대비해 2박 3일의 스케줄을 잡아놓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커트! 여기까지입니다.”
촬영을 끝낸 박불출 감독이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이 빠른 촬영 종료를 축하했다.
“빨리 장비 철수합시다! 곧 물들어 올 테니까!”
“예! 감독님.”
스태프들이 모래사장에 있는 장비를 서둘러 정리하기 시작했다.
버진 아일랜드가 닫혀 촬영 장비에 바닷물이 닿으면 장비를 다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탓에 이영진과 나 역시 스태프를 도와 짐 정리를 시작했다.
유진이는 자신도 돕겠다고 했지만 미소와 잠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뒀다.
어젯밤의 사건 때문에 놀라 밤새도록 제대로 자지 못한 유진이와 미소에게 조금이나마 좋은 기억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 * *
20분 정도 만에 정리가 끝났다.
이제 버진 아일랜드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
바닷물이 찰랑거리며 조금씩 들어올 무렵 하얀 드레스를 입은 유진이와 미소는 몰려드는 바닷물을 보며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미소야. 담에 또 올까?”
“응 엄마. 또 오자!”
따가운 햇볕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미소는 누구보다 밝은 얼굴을 띠고 있었다.
그 순간 얼른 폰을 꺼내 두 사람을 찍기 시작했다.
“우리 미소. 목마르지 않아?”
“조금. 근데 괜찮아. 참을 수 있어.”
“이거 마실래?”
유진이가 무릎을 쪼그리고 앉은 뒤 조금 전에 모래사장에서 빼지 않은 코카리스웨트를 빼냈다.
“마셔도 돼?”
“응. 괜찮아.”
“그럼 마실래!”
유진이는 쪼그려 앉은 채로 조심스레 캔을 따 미소에게 내밀었다.
미소가 양손으로 음료수를 받은 뒤 조금씩 홀짝이기 시작했다.
한 모금 두 모금.
그런데 미소는 얼마 마시지도 않고 음료수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이제 엄마 마셔!”
유진이가 흐뭇한 표정으로 묻는다.
“엄마는 아까 마셨는데?”
“엄마 계속 촬영한다고 힘들었잖아. 그니까 조금 더 마셔.”
유진이가 환한 표정으로 미소를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역시 엄마 생각하는 건 미소밖에 없구나.”
“히히. 응!”
유진이가 웃으며 미소가 건넨 코카리스웨트를 마셨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방치된 음료수는 미적지근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진이는 미소가 건넨 코카리스웨트를 오늘 마신 어떤 것보다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마셨다.
유진이는 자신이 마시던 코카리스웨트 캔을 다시금 내밀었다.
“미소야. 조금 더 마실래?”
미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왜? 우리 미소 이제 목 안 말라?”
미소가 눈치를 보다 코카리스웨트 캔을 가리켰다.
“그게 실은······ 여기에서 소금물이랑 설탕물을 반씩 섞은 맛이 나.”
“뭐? 풋. 그래서 조금밖에 안 마신 거야? 맛없어서?”
미소가 배시시 웃는다.
“헤헤. 그래도 엄마 목마를까 봐서 준 거야. 진짜야!”
“뭐어~? 엄마한테 맛없는 걸 주다니! 벌이닷!”
유진이가 미소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꺄하하하. 엄마. 엄마. 간지러워.”
행복하게 웃던 두 사람은 코카리스웨트 캔을 놓고도 한참을 까르륵거렸다.
바닷물이 조금 더 모래사장을 덮기 시작하자 유진이가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소야. 물 들어와. 이제 갈까?”
“응 엄마!”
유진이는 미소와 손을 잡고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빠! 다 놀았어요.”
유진이가 날 보더니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댄다.
그러자 미소 역시 손을 흔들었다.
“삼촌~!”
난 카메라의 촬영 종료를 누르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천천히 와도 돼. 아직 10분 정도 남았으니까.”
“괜찮아요. 다 놀았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곁에서 갑작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 팀장님. 지금 찍은 영상······ 제게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감독님. 이걸 왜요?”
“유진 씨의 미소가 너무 보기 좋아서요. 쓸 데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박불출 감독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진지한 표정으로 거듭 부탁을 해 왔다.
하지만 모든 영상에 미소가 담겨 있었기에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스틸컷이든 스타그램이든 이 영상을 쓰시면 미소 광고료는 따로 주셔야 합니다?”
박불출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코카리스웨트 김 실장한테 반드시 받아내겠습니다!”
어차피 마린 기획은 광고를 제작하는 일만 한다.
기획 예산은 모두 코카리스웨트 홍보 실장인 김창진이 집행하고.
박불출 감독은 날 대신해 반드시 미소 광고료도 받아주겠노라 말했다.
그러면 무조건 오케이지.
박불출 감독에게는 리조트에 가서 파일을 전송해 주겠노라 말하고는 유진이와 미소부터 배에 먼저 태웠다.
배 위에 올라온 다음 유진이에게 물었다.
“촬영은 마음에 들었어?”
“최고였어요. 근데 다음에도 올 수 있을까요?”
유진이는 파도에 서서히 잠기기 시작하는 버진 아일랜드를 보며 아쉬워한다.
선크림을 잔뜩 발랐지만 뜨거운 햇살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당연히 올 수 있지.”
유진이의 머리에 모자를 씌워주자 조금 찡그린 얼굴이 밝아졌다.
“고마워요 오빠. 그런데 오늘 뭐 먹을 거예요? 맛집은 다 알아놨죠?”
어제 그 난리를 겪고도 맛집을 찾는 유진이다.
“미안한데 우린 오늘 저녁 비행기로 귀국할 거야.”
“예? 내일 밤 아니었어요?”
“일정이 바뀌었어.”
오늘 새벽에 구성철 실장에게 현장 상황을 보고하고는 촬영이 끝나는 대로 귀국하겠다 말했었다.
크리스와 아니타가 경찰에 잡혔으니 언제 아하스 갱단이 보복해 올지 몰랐기에 내린 결정이다.
* * *
박불출 감독과 코카리스웨트 팀은 원래 스케줄대로 귀국할 일정이었기에 우리만 먼저 귀국 일정을 잡았다.
리키는 우리가 공항에 돌아갈 때까지 지키겠노라며 한숨도 자지 않고 곁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난 짐을 싸며 리키에게 말했다.
“리키. 너무 자책 안 해도 됩니다.”
“아닙니다. 보스. 조금만 늦었으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도 몰랐잖습니까?”
“지나간 일은 묻어둡시다. 그런데 혹시 저희가 필리핀에 다시 올 경우에 갱단이 보복을 시도할 수도 있을까요?”
“다시······ 오실 생각입니까?”
“예. 우리 꼬마 숙녀님이 꼭 다시 오고 싶다는군요. 하지만 안전 때문에 고민입니다.”
리키의 얼굴이 환해진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스. 아하스든 누구든 절대 접근조차 못 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리조트를 샅샅이 훑어서 모든 준비를 완료해 두겠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리키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런데 공항으로 출발하려는 우리 일행 앞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나타났다.
* * *
경호 업체의 대표 제이슨과 보홀섬의 경찰서장 에디를 동행한 채 이곳을 찾아왔다.
“어젯밤 있었던 사건에 대해 이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는 서장으로서 사과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에디 서장은 유진이 같은 연예인이 최고급 호텔 리조트에서 당한 일에 심심한 사과를 해왔다.
크리스와 아니타 그리고 아하스 일당들은 곧 재판을 받을 거라고 한다.
소식을 전해줘 고맙다고 말했더니 에디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주춤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서장님.”
에디 서장이 대답을 망설이자 제이슨 대표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신 대답했다.
“미스터 정.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아하스 갱단의 보스인 다니엘이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선물······이요?”
순간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착각할 정도였다.
어제 그 난리를 피웠는데 선물을 보냈다고?
거기다 경찰서장과 경호 회사의 사장이 갱단 보스의 선물을 들고 왔다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