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화
19. 조짐이 보인다
버거퀸 홍보실의 이영숙 인턴은 원래 드라마 작가를 꿈꿨었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로 가는 길은 너무도 험난했다.
힘들게 아는 언니를 통해 막내 작가가 되었지만 3년 동안이나 한 달에 60만 원씩을 받다 포기해 버렸다.
돈도 돈이었지만 고졸인 자신으로선 대학을 나온 작가들끼리 만드는 라인에서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재능이 있다는 소릴 듣긴 했어도 현실은 너무도 차가웠다.
결국 작가실을 뛰쳐나와 사회라는 전쟁터에 뛰어든 이영숙은 지금은 햄버거 업계 3위 버거퀸 홍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영숙은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내었다.
인턴으로서 자기 존재감을 알려야 계약직으로나마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폰을 꺼내든 이영숙이 아침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김영진 팀장에게 다가갔다.
“티 팀장님. 이것 좀 봐 주시겠어요?”
“왜? 좋은 광고 카피라도 나왔어?”
김영진 팀장의 짜증 섞인 말투에 이영숙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낙장불입.
이영숙은 폰을 보이며 네이브에 나온 실시간 검색 순위를 김영진 팀장에게 보여줬다.
[1위 아침이 간다]
[3위 아침이 간다 시청률]
[7위 버거퀸 얼짱 알바 정유진]
[9위 버거퀸 정유진]
[10위 아침이 간다 정유진]
“이게 뭐야. 잠깐만 정유진······이면 그 정유진?”
정유진의 존재는 버거퀸 홍보실에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천호동 지점의 매출을 500% 신장시켰던 전설의 주인공이니까.
“얘. 방송 시작했어?”
“예. 어제 첫 출연이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인터넷에 화제가 되고 난리예요.”
“지난 1년간 잠수를 타서 뭘 하나 했더니 배우 하려고 준비 중이었나 보다. 그치?”
“네. 거기다 첫 출연작이 이지연 작가님 드라마인데 어제 시청률 대박이었어요.”
“시청률은 얼마나 나왔길래?”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김영진 팀장은 별다른 기대 없이 물었다.
그러자 이영숙은 시청률 집계표를 폰으로 확대해 김영진 팀장에게 내밀었다.
순간 김영진 팀장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리스너는 20.1% TNK는 20.2%라고? 대박이네?”
아무리 드라마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명색이 홍보팀의 팀장이다.
20%를 넘은 드라마가 대박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천하의 이지연 작가님 작품이잖아요. 그리고 이것 좀 보세요. 시간대별 통계요.”
이영숙 인턴이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녀가 보여준 시청률 집계표에는 10시 50분까지는 오르락내리락하며 19.1%의 시청률을 유지하다 갑자기 드라마 끝나기 5분 전부터 올라가고 있었다.
“5분 전이라. 왜 여기서 그래프가 확 오르지?”
“여기서부터 정유진이 나왔거든요.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이영숙의 말을 끊은 김영진 팀장이 물었다.
“잠깐 그러면 우리 홈페이지 트래픽은 어때? 회사 이름이 실검 순위에 이 정도로 올랐을 거면 반응이 있을 거 아냐?”
김영진 팀장의 질문에 이영숙 인턴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그건 최 대리님이 담당하시지 않나요?”
“아. 맞다. 미안.”
김영진 팀장은 눈앞의 이영숙이 인턴인 걸 잠시 잊었다.
급히 최무성 대리를 찾은 김영진 팀장이 데이터를 물었다.
“어때?”
“올랐어요.”
“얼마나?”
“5%요.”
“뭐? 5%?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아 아니. 아까 다른 거 시켜 놓으시고선······”
홈페이지 전체 트래픽 5%면 적은 수치가 아니었다.
“혹시 우리 이벤트 때문은 아니지?”
최무성 대리는 고개를 저었다.
“예. 이벤트는 월초부터 쭈욱 했잖습니까? 그동안 그래프 변화 없다고 이벤트 폭망이라고 하신 거 기억 안 나세요?”
“그 그랬지.”
“그리고 지금 광고 모델인 박은빈 걔 돈값 못 한다고 말씀하신 건 기억하시고요?”
최무성 대리의 연속된 말에 김영진 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기억난다. 미안 미안해. 됐냐? 팀장을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예. 속이 시원~합니다.”
활명수를 마신 것처럼 식도를 훑어내리는 최무성의 행동에 김영진 팀장이 주먹을 쥐었다.
그때였다.
“뭐가 이리 시끄러워? 연말이라고 긴장 늦추지 말랬잖아.”
안지윤 홍보실장이 인상을 쓰며 들이닥쳤다.
4분기 매출이 떨어져 현재 햄버거 업계 순위 4위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비상상황이니까.
“실장님! 여기 좀. 와 보십시오. 영숙 씨. 나한테 한 보고 빨리해드려.”
안지윤 홍보실장을 자리에 앉힌 김영진 팀장의 재촉에 이영숙은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고 조금 전 했던 말을 다시 늘어놓았다.
잠시 후.
안지윤 홍보실장은 단호한 태도로 업무를 지시했다.
“광고 모델 교체 건 알아봐요. 얘 신인이니까 몸값 쌀 거 아냐?”
“박은빈은요? 걔가 광고하고 있는 거 내리시게요?”
“반응 좀 더 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래야 할 거 같은데? 박은빈 걔 광고에 넣기 전이랑 지금 우리 매출이 얼마나 올랐죠?”
“오른 게 아니라 내렸습니다. 마이너스······ 7%입니다.”
“그래. 잘 아시네. 그러니까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요. 걔 요즘 드라마 찍는다고 해서 올라갈 줄 알았는데 연기력 똥망이네~. 인공지능 로봇 앉혀 놓았네 하는 소리가 나오는 건 알죠?”
“그 그래도 팬덤에서는 인기가······”
“팬덤? 걔들 수가 몇이나 된다고. 1인당 매일 10개씩 사 먹어도 안 돼요.”
“예. 알겠습니다.”
“아 저기 실장님. 팀장님.”
“왜요? 최 대리?”
“지금 확인했는데 앱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10% 늘었는데요? 주문량은 12% 늘었고요. 게시판에 무슨 이벤트 같은 거 하냐고 사람들이 댓글 달고 있는데요?”
순간 안지윤 홍보실장이 120데시벨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회사에 전화해 봐욧! 하여간 정유진씨를 다른 데 뺏기면 다들 옷 벗을 줄 알아요!!”
그 순간 버거퀸의 홍보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숙 씨. 뭐해? 아까 말한 거 대표님께 보고할 거야. 데이터 좀 만들어 줘. 할 수 있지?”
안지윤 홍보실장이 이영숙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 제가요?”
“그럼 누가 해? 자기 작가 생활도 해 봤다면서? 드라마 관련해서는 자기가 제일 잘 알 거 아냐? 통계랑 이것저것 추려서 지금 당장 보고서 꾸려 줘. 준비되는 대로 대표님한테 올라갈 거니까.”
“아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영숙은 기대감을 안고 자기 좌석으로 돌아가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긋지긋한 인턴 딱지도 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정규직 명함을 받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처졌던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 * *
“대박이네.”
유진이의 이름이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있었다.
미소가 말했던 [버거퀸 얼짱 알바 정유진]이란 검색어는 잠깐 5위까지를 찍은 뒤 현재 7위를 유지 중이다.
그 탓에 유진이가 아침부터 들뜬 채로 까톡을 보내왔다.
[러블리♡유진 : 진짜 오빠 말대로네요? 한 방에 떴어요!]
[정윤호 매니저 :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뜬다고······ 하지만 아직 나는 배가 고프다.]
[러블리♡유진 : 쳇.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 알았어요. 반짝인기라 이거죠?]
그래.
지금은 반짝인기지.
하지만 이런 게 몇 번만 이어지면 인지도 있는 연예인이 된다.
어쨌든 이 정도로 반응이 빨리 올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분량이 적은 21화의 반응이 이 정도인데 유진이의 분량이 확 늘어난 22화는 어떨까 살짝 두렵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기뻐하는 틈을 타 유진이가 발칙한 이야기를 꺼냈다.
[러블리♡유진 : 파이팅 하자는 의미에서 오늘 빈대떡 콜? ♥♥♥]
[정윤호 매니저 : 배우님. 자중하세요.]
[러블리♡유진 : 세 개만 먹을게요. 미소가 아침부터 빈대떡 먹자고 해서 반죽 중이란 말이에요. 이거 보세요. (사진 : 오늘은 미소가 요리사!_JPEG)]
방금 막 찍은 사진엔 미소의 조막만 한 손으로 빈대떡 반죽을 만드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내 까톡이 하나 더 도착했다.
[미소천사♥ : 삼촌. 미소 빈대떡. 이모한테 많이 주고 시퍼요!]
[정윤호 매니저 : 유진아?]
[미소천사♥ : 어······ 어. 나 유진이 아닌데요?]
어디서 약을 팔아.
한창 빈대떡 반죽하는 애가 까톡을 보낼 리가 없잖아.
[정윤호 매니저 : 오늘 스케줄 없으니까 운동 2배로 하고. 현장에 가기 전에 체중계 들고 가서 체크할 테니까 각오하시죠. 우리 배우님?]
그 뒤로는 아무 답이 없었다.
“하여간 잔꾀만 늘어서는.”
나는 승합차 핸들에 턱을 괴곤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 입구를 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언제 내려오시려나······”
어젯밤 11시 구성철 실장의 급한 연락을 받았다.
걸그룹 체리블라썸의 매니저가 조부상으로 고향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급히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일정이 빈 사람이 나 하나뿐이란다.
회귀 전에는 김동수 실장의 지시를 받고 도움을 주러 갔었는데.
시키는 사람만 달라졌을 뿐이지 다이어리의 일정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난 체리블라썸의 일정을 돕고자 회사 지하주차장에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 역시도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11:00 체리블라썸 3집 앨범 제작비 삭감 통보
KBC에서 진행하는 아이돌 대전을 끝마치고 한명호 팀장과 함께 회사로 들어갔을 때 이기철 이사에게 들은 통보였다.
두 달 전에 런칭한 체리블라썸의 미니 앨범 2집 모든 곡이 모조리 폭망한 탓이었다.
“이걸 지울 방법이 없을까······”
곡을 만드는 비용은 얼마 들지 않지만 홍보비가 삭감되면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좋은 곡이 나왔는지도 모르고 묻힐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체리블라썸의 인지도를 올려야 했다.
최소한 실검 10위 안에는 들 수 있도록.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이기철 이사도 함부로 앨범 제작비를 삭감한단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안에 체리블라썸의 인지도를 높일 방법이 없을까 다이어리를 살피던 중 일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09:30 쁘띠모 백스테이지 합동 무대 결원 발생.
“잘하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오늘 있을 아이돌 대전엔 쁘띠모와 함께 걸그룹 네 팀이 합동으로 펼치는 공연에 결원이 생긴다.
그런데 쁘띠모가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함께 한 걸그룹 모두가 실검 순위에 오르게 되었던 게 기억났다.
그 빈자리에 체리블라썸을 넣는다면?
체리블라썸이 실검 순위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 빈자리에 우리 애들을 넣자.’
그때였다.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초췌한 인상의 아이돌팀 한명호 팀장이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 스타. 헬로~.”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고 수염은 거뭇거뭇한 게 초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한 팀장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어. 나 두 시간밖에 못 잤거든. 어제 해남에서 행사가 있어서.”
아이돌은 메이저가 되기 전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행사를 돈다.
막대한 투자금을 조금이라도 회수하기 위해서.
행사를 얼마나 뛰었는지 체리 블라썸의 스타렉스 승합차의 운행 거리는 무려 23만 km다.
중고차 도매상도 아이돌 매니저의 차는 사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노인학대 수준을 넘어 백골이 된 유물을 인수하는 거니까.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키 주십시오.”
“어. 안 그래도 부탁하려 했어. 나 가는 동안 좀 잘게.”
이미 반쯤 눈을 감은 한명호 팀장이 내게 키를 건넸다.
“도착할 때까지 깨우지 말고.”
안전벨트를 매고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한명호 팀장은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드르릉~.”
“아니 한 팀장님. 숙소 위치는······”
숙소 위치도 말해 주지 않고 잘 줄이야.
내가 회귀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 * *
체리블라썸의 숙소는 회사에서 1km 정도 떨어진 압구정 인근의 쓰리룸이다.
제일 작은 방 하나를 전담 여성 매니저 이주영이 쓰고 나머지 투룸에 2명씩 나눠 산다.
애들의 생활을 책임지며 밥과 빨래를 해주는 이미자 아주머님은 출퇴근을 하는데 오늘은 휴가다.
끼이익.
압구정 숙소에 차를 대곤 한명호 팀장을 깨웠다.
“한명호 팀장님. 다 왔습니다.”
“으응? 벌써?”
한명호 팀장이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데 내가 여기 위치를 알려 줬던가?”
아뇨.
전혀요?
“으흠. 제대로 온 걸 보니까 알려 줬나 보네. 일단 내리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명호 팀장이 먼저 내리고 내가 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한명호 팀장을 따라가려는데 타이밍에 맞게 구성철 실장의 까톡이 도착했다.
[구성철 실장 : 윤호야! 스케줄 끝나고 바로 들어와! 유진이에게 광고 들어왔다!]
벌써 광고가 붙었다고?
그런데 좋은 소식은 그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