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9화
189. 업데이트 4
수혈.
혈액을 주거나 받는 행위.
그 말의 사전적 의미를 알고는 있지만 둘 중 어떤 상황이라도 내키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들기 시작했다.
그 탓에 유진이의 방으로 가는 내 발걸음이 더욱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 큰 건물이다 보니 같은 2층인데도 유진이의 방에 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때였다.
우당탕!
요란한 소음이 1층에서 들려왔다.
“XX! XXX! XXXX!”
크리스의 목소리와 동시에 연이어 리키와 마이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충돌음과 짧은 몸싸움 소리 악을 쓰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크리스를 붙잡는 소리다.
‘설마 크리스의 공범이 있는 건가?’
리키는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의 길목을 지키고 있을 거라 했었다.
그리고 그 계단은 내 방 앞으로 연결된 계단이었기에 난 방문을 살짝 열어 두고 있었었다.
혹시나 1층에서 방어가 실패하면 크리스가 2층으로 올라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난 방문 앞을 지나는 인기척을 느낀 적이 없다.
리키가 그리 계단을 허술하게 막았을 리도 없고.
그 순간 2층으로 향하는 다른 통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유진이나 미소가 수혈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리는 없었으니까.
유진이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다이어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러나 새롭게 떠오른 15분 뒤 수혈에 관한 일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6월 25일]
-AM 00:15 [NEW. 정유진] 보홀 병원 방문. 수혈.
리키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기에 심호흡하고서 천천히 유진이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찰칵.
창밖에서 약한 달빛이 들어오자 어스름한 방 안의 실루엣들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는 대자로 뻗은 미소와 미소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옆으로 자는 유진이가 보였다.
그런데.
바스락!
침대 머리맡 서랍 쪽에 키 150cm 정도 되는 파마머리의 퉁퉁한 체형의 여자가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뭐야? 아니타. 당신이 한 패였어?’
허리를 구부린 채 뭔가를 뒤지는 아니타는 김창진 실장이 우리에게 붙여 준 도우미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니타가 들어와 있었다.
그 순간 난 그녀를 조심스레 붙잡아야겠다 생각했다.
혹시라도 놀란 아니타가 흉기를 휘두를 경우 세상모르고 잠든 유진이가 다칠 수도 있었으니까.
난 숨소리를 죽이고 아니타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열려 있는 문으로 크리스의 비명이 들려왔다.
“XX! XX!”
동시에 깜짝 놀란 아니타가 몸을 홱 돌렸다.
그녀의 왼손에 길쭉한 쇠붙이가 들린 게 보였다.
칼?
난 고민할 틈도 없이 아니타를 덮쳤다.
쾅.
강렬한 내 몸통 박치기에 아니타의 몸이 붕 떠 서랍에 부딪혔다.
그 순간 아니타가 들고 있던 쇠붙이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챙그랑!
그와 동시에 난 바닥으로 떨어진 쇠붙이를 발로 차 버렸다.
칼이 멀리 떨어진 순간 난 틈을 놓치지 않고 아니타를 붙들었다.
“XX! XXXX!”
아니타의 날 선 목소리가 들린 탓에 자고 있던 유진이가 벌떡 일어났다.
유진이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미소를 껴안았다.
“유진아. 괜찮아!”
유진이가 내 쪽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오 오빠?”
“어. 다 끝났으니까 안심······해.”
“뭐 뭔데요? 무슨 일인데?”
다급한 유진이의 목소리에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냐.”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 유진이는 더 놀랄 게 분명했으니까.
다행히 몸을 뒤척이던 미소는 엄마 품을 느끼자 꿈을 꾸는 거라고 착각했는지 웅얼대기만 할 뿐이었다.
그사이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1층의 정리를 다 끝냈는지 최우선 경호 대상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뛰어오는 소리였다.
혹여 리키나 마이클이 오해하고 내게 덤빌까 봐 즉각 나라는 사실을 알렸다.
“접니다! 여기도 상황이 끝났으니까 일단 불부터 켜세요.”
달칵.
형광등이 켜졌다.
“부 분명히 계단을 막고 있었는데······ 어떻게?”
“리키!”
눈이 휘둥그레진 리키가 멍하니 바라보다 내 곁으로 뛰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보스!”
리키는 옆구리에서 케이블 타이를 꺼내 능숙하게 아니타의 양 손목을 묶어 버렸다.
“이거 놔! 놓으라고!”
귀중품을 금고에 넣는 걸 보지 못한 아니타였다.
그 탓에 직접 유진이의 방을 털려고 한 모양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말해!”
리키가 아니타를 취조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서야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휴우~.”
다이어리가 아니었으면 유진이나 미소가 해코지를 당할 수 있었다.
만약 서랍을 여는 소리에 유진이가 일어났더라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싸늘히 식어 왔다.
겨우 안도하려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것도 운명을 바꾼 대가인 걸까?’
회귀한 직후 미소를 살리고 유진이의 인생을 바꿨다.
그리고 이제까지 유진이의 인생에 꽃길을 깔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마치 내가 바꾼 모든 걸 다시 바로잡으려는 것만 같았다.
일이 잘 돌아가는 걸 눈 뜨고 못 보는 심술쟁이처럼.
그게 아니고서야 유진이와 미소에게 일어나는 이 수많은 악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싶다.
<데스티네이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계속 떠올라서 명작인가 보다.
잊히질 않아!
하지만 신의 뜻이 무엇이든 간에 나에게는 운명에 저항할 수단이 있다.
버전 업으로 한층 강화된 다이어리가 말이다.
난 다시 한 번 인생의 목표를 되새겼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유진이의 앞길에 꽃길만 깔아주고 정실모에게도 그렇게 할 거라는걸.
설령 운명의 신과 영원히 싸우는 한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호흡을 가다듬고서 주머니에 넣어 둔 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내가 본 일정이 제발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6월 25일]
-AM 00:15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NEW. 정유진] 보홀 병원 방문. 수혈.)
끝났다.
이젠 수혈을 할 일도 수혈을 받을 일도 없어졌다.
안심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유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오 오빠······.”
“괜찮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다 끝났어.”
“아 아뇨. 그게······ 팔에서 피가······.”
유진이의 시선을 따라 왼쪽 팔로 시선을 돌렸다.
왼쪽 팔 부분에 옷이 찢어져 너덜대고 있었다.
베였다고 하기엔 민망하고 긁혔다고 하기엔 조금 심한 그런 정도?
아니타와 충돌할 때 그녀가 들고 있던 칼에 다친 모양이다.
“에이. 별거 아냐. 피한다고 피했는데. 하하.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 후시딘만 발라도 금방 아물걸?”
그때였다.
방문으로 이영진이 뛰어 들어왔다.
오른손에 프라이팬을 들고서.
“유진 씨~~!!”
그리고 그 뒤로 이미리 대리도 나타났다.
긴 막대기를 들고 검도를 하는 자세를 한 채로.
“상황 끝났으니까 긴장 풀어요. 두 사람 모두.”
“예?”
“무슨 사정인지 나중에 다 이야기해 줄 테니까 영진아 그것 좀 내려놔. 그리고 이 대리님도요.”
그때였다.
유진이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미소를 이영진에게 건넸다.
“영진 오빠. 미소 좀 봐 줘요.”
“어. 어.”
미소를 이영진에게 맡긴 유진이가 급히 내게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수건을 꺼내 급히 내 팔을 감싸기 시작했다.
“유진아. 괜찮대도? 별로 안 다쳤어.”
하지만 유진이는 내 말도 듣지 않은 채 수건으로 내 팔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이미리 대리가 1층으로 응급 키트를 가지러 갔지만 그걸 기다릴 정신이 아닌 듯했다.
“맨날 이래. 맨날! 급발진하는 차를 막지를 않나! 삼촌 뮤직에서 조폭들이랑 싸우지를 않나! 자기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맨날 남만 챙기고! 매니저가 무슨 슈퍼맨인 줄 알아······.”
유진이의 혼잣말이 가슴에 콕콕 박히고 있었다.
설마 그 모든 걸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 탓에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팔을 내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내 팔은 칭칭 감싼 수건으로 인해 타노스의 장갑을 낀 것처럼 되었다.
내 팔을 꽁꽁 싸맨 유진이가 한숨을 휴 하고 내 쉬었다.
그리고 케이블 타이에 묶여 움직일 수 없게 된 아니타에게로 다가갔다.
“당신! 우리 오빠가 크게 안 다친 걸 다행으로 알아요!”
그때부터 유진이는 아니타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말로 혼을 내기 시작했다.
* * *
유진이가 아니타를 몰아세우는 동안 리키가 상황을 보고해 왔다.
갱단 단원인 크리스가 1층 금고에 재산이 들어 있다는 정보를 알고는 동료를 배신하고 혼자 모든 걸 독식하려 했단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공범 아니타는 VIP 비상 탈출로를 통해 2층 유진이의 침실로 침입했던 거였고.
그래서 1층 계단 길목을 지키고 있던 리키나 나에게 걸리지 않았던 거였다.
“일단 크리스는 1층에 묶어 뒀고 리조트 총지배인을 호출했습니다. 곧 제이슨 대표가 리조트 밖의 공범을 잡으면 전원을 경찰서로 데리고 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경호 실책······에 대한 질책은 달게 받겠습니다.”
리키가 허리를 굽혔다.
“질책은 됐습니다. 우선은 뒤처리에 집중하도록 하죠.”
그와 동시에 제이슨 대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미스터 정. 밖에서 대기하는 아하스 조직원 한 명을 체포했습니다.
제이슨 대표는 조직원들은 모두 경찰에 인계될 거고 귀찮은 일은 자신이 모두 처리하겠노라 다짐했다.
거의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 아니타를 혼낸 유진이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오빠. 뒷일은 영진 오빠한테 맡기고 오빠는 병원부터 가세요. 네?”
그러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이영진에게 뒤처리를 맡겨 놓을 순 없었다.
“잠깐만. 금방 처리할게.”
유진이를 진정시킨 난 금방 끝난다고 말한 뒤 리키에게 연신 지시를 내렸다.
그때였다.
미소가 내게로 조르르 뛰어와 고개를 갸웃한다.
“삼촌. 피 났는데 안 아파요?”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이죠? 괜히 안 아픈 척하는 거죠?”
“아냐. 진짜야.”
“정말?”
“응.”
미소가 다행이라며 한숨을 휴 하고 내쉰다.
그리고 날 꼬옥 껴안았다.
“삼촌. 아프지 마세요. 삼촌 아프면 나 진짜 막 울 거야.”
걱정 가득한 말투로 말하는 미소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그럴게. 그런데 우리 미소 많이 놀랐지?”
“아니. 삼촌 덕에 하나도 안 놀랐어요!”
그 순간 미소가 뭔가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삼촌. 엄마 엄청 놀랐어요.”
“나도 알아.”
“그러면 빨리 엄마가 말하는 대로 병원 가요. 네?”
미소까지 채근하자 더는 업무 지시를 내릴 수가 없었다.
“알았어. 그럴게.”
난 품에 안긴 미소를 떼어 놓고서 벽을 향해 돌아서 있는 유진이에게 말했다.
“유진아. 알았어. 일 그만하고 병원부터 갈게.”
유진이가 여전히 돌아선 채 퉁명스레 대꾸한다.
“지금 바로 갈 거예요?”
“어. 그럴게.”
그제야 유진이가 몸을 돌린다.
그런데 유진이의 눈가로 눈물 자국이 보였다.
내 시선을 마주한 유진이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빠 빨리 병원 가세요. 오빠.”
그사이 이미리 대리가 응급 처치 키트를 가지고 왔다.
“잠깐만요! 유진 씨. 우선 소독부터 좀 하고요. 그리고 차는 불러 놨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가 꽁꽁 싸매 놓은 타노스의 장갑을 푸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응급 키트에 있는 가위를 사용해 수건을 잘랐다.
소독하는 동안 다들 내 상처가 크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이곳저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박불출 감독과 김창진 실장이 잠옷 바람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 팀장! 이게 무슨 일입니까?”
“유진 씨 괜찮아요?”
“뭐야 이게 무슨 난리야??”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김창진 실장이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저 정 팀장! 방은 왜 이래요? 그리고 그 상처는 또 뭐고?”
“다 끝났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난 김창진 실장에게 대략적인 일을 설명한 뒤 뒷정리를 부탁했다.
“나 나만 믿어요.”
곧이어 이번에는 호텔 총괄 매니저가 직원들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난 연신 사과를 하는 호텔 총괄 매니저의 인사를 받은 뒤 이영진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던 난 내 손에 든 폰을 보며 말했다.
‘고맙다. 에브리데이.’
업데이트된 에브리데이 덕에 다시 한 번 운명을 거스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