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8화
188. 업데이트 3
마지막 광고 회의를 하기 위해 코카리스웨트 홍보 실장이 있는 빌라로 가던 중 경호원 리키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보스. 크리스라는 친구는 누가 고용한 겁니까?”
“크리스요? 저희 광고주 측에서 고용한 경호원입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묻습니까?”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리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그 친구. 갱단 소속인 것 같습니다.
순간 발걸음이 절로 멈췄다.
“윤호 오빠?”
유진이가 따라오지 않는 날 의아한 표정으로 불렀다.
“먼저 가 있어. 잠깐만 있다가 갈게.”
난 곧장 이영진에게 지시를 내렸다.
“영진아. 넌 유진이랑 미소 데리고 먼저 가 있어. 나 리키랑 이야기 좀 하고 갈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냐. 현지 맛집 정보 좀 들어두려고. 금방 갈 테니까 먼저 가.”
“예! 이왕이면 제일 좋은 데로 알아봐 주십시오.”
“그래. 유진이가 사는 거니까 그러려고!”
유진이가 싱긋 웃는다.
“알았어요. 오빠! 내가 얼마든지 쏠게요!”
외국에 나와서인지 국밥 타령을 하지 않고 통 큰 모습을 보이는 유진이다.
리키가 마이클에게 눈짓으로 사인을 보내자 마이클이 일행들을 이끌고 광고 최종 점검 회의를 위해 1번 빌라로 향했다.
일행들이 멀리 떨어진 순간 다시 리키에게 물었다.
“갱단인 게 확실한 겁니까? 아니면 추측입니까?”
“크리스가 짐을 옮길 때 티셔츠 사이로 뱀 꼬리 문양을 봤습니다. 그건 BNG 갱단 계열에서 파생된 아하스 조직원들이 사용하는 표식입니다.”
BNG 갱단은 ‘될 대로 되라’라는 뜻을 가진 ‘바할라 나’라는 필리핀어에서 유래된 갱단이다.
그리고 그 갱단에서 독립한 사람들이 이 보홀섬에서 설립한 게 바로 ‘아하스’ 갱단이라고 한다.
‘아하스’라는 말은 타갈로그어로 ‘뱀’을 뜻하고.
리키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설명을 들을수록 피가 싸늘히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너무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갱단원이라고 해도 경호나 운전 같은 서브 잡(Job)을 가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으니까요.”
아하스 갱단은 총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약 판매 납치 보호비 갈취부터 온갖 잡다한 소매치기까지 한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무장 경비가 지키는 터라 리조트 안에서는 총을 가지고 있을 순 없단다.
“그런데 갱단 소속이 어떻게 리조트에서 일할 수가 있습니까?”
“갱단 소속이라고 해도 이 섬의 주민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말단 갱단원이 리조트에서 일하는 것 정도는 드물지 않은 일이란다.
평소 같으면 그냥 보고하지 않았을 거란다.
99%의 확률로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유진이가 A급 요인이었기에 이번엔 보고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잠깐 고민하던 리키가 조심스레 말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제 견해를 밝히자면 제이슨 대표에게 알려서 백업 플랜을 세워야 합니다. 단 결정은 보스의 몫입니다.”
아마도 비용 문제 때문인 모양이다.
하지만 새로운 일정이 뜨지 않았어도 돈을 썼을 거다.
보홀 경찰서에 가는 일이 생긴다는 일정이 나온 순간 내 선택은 간단했으니까.
“그렇다면 크리스를 배제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앙심을 가지고 내일 촬영을 방해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바라는 게 최선이라는 거군요.”
“그게 아니면 저희가 막던지요.”
“알겠습니다. 당장 제이슨 대표에게 보고해서 처리해 주십시오.”
“예. 보스.”
내 일행의 안전 특히나 유진이와 미소의 안전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한다.
나는 제이슨과 리키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봤다.
반짝이는 별들이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윤호야.’
심호흡하고 다이어리를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일정은 그대로였다.
결국 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사실 연예인들의 해외 일정에 동행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
회귀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촬영을 갔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평범해 보이던 동네 도우미 청년이 삽시간에 총을 든 강도로 돌변한 적도 있으니까.
당시 일체의 저항을 하지 않아 살아날 수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순간 번뜩이는 방법이 떠올랐다.
만약 크리스의 눈앞에서 빌라에 있는 임시 금고에 귀중품을 넣어두는 걸 보여준다면?
그리고 그 금고를 크리스에게 지키게 한다면?
굳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 돈만 가져가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도 사건이 절도 사건으로 변한다면 그게 어딘가?
그리고 어차피 비싼 걸 들고 온 것도 없다.
남들이 보면 명품에 비싼 주얼리를 착용한 것 같겠지만 사실은 모두 천호동 시장에서 사 온 것들이다.
코카리스웨트가 빌려준 명품 주얼리는 비쌌지만 그건 보험을 들어놨다고 했으니까 잃어버려도 보상을 받을 수 있을 테고.
그사이 리키의 전화가 끝이 났다.
“보스. 제이슨 대표가 바꿔 달랍니다.”
리키가 건네주는 전화를 받자 제이슨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정. 지금부터 경호 인력을 3배로 늘리겠습니다. 단 리조트 안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니 리키와 마이클이 근거리를. 저는 리조트 밖에서 원거리 경호를 할 겁니다.
“전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모른 척하세요. 다만 리조트 측에는 저희가 경호 인력을 늘렸다는 걸 알리지 마십시오. 정보가 새면 더 경호가 힘들어지니까요.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난 리키에게 재차 부탁했다.
“리키.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한 번도 경호를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저도 그 사례 안에 들어갔으면 하는군요.”
“그렇게 될 겁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리키의 눈이 선명히 빛났다.
든든한 그의 얼굴을 보며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순간 조금은 정신이 맑아졌다.
이대로 촬영을 다 중지하고 돌아갈까도 싶었다.
불확실하긴 했어도 갱단이 얽힌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불확실함이 문제였다.
아무런 핑계도 없이 광고 해지를 하면 위약금부터 시작해 온갖 소문에 시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이제껏 쌓아왔던 유진이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 막 연예계에서 빛나기 시작한 유진의 삶에는 꽃길만 깔려야 했으니까.
* * *
크리스는 아하스의 말단 갱 단원이자 틈틈이 관광객들의 경호원을 하며 하루 번 돈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그는 잠깐의 저녁 휴식 타임 동안 리조트 앞에 있는 블루스 스노클링 대여 샵으로 향했다.
블루스 스노클링 샵에선 상의를 벗어젖힌 한 남자가 장비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왼쪽 어깨에도 크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뱀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크리스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헤이. 미키. 한국에서 부자들이 왔어. 한탕 할 생각 있어?”
“한국놈들은 다 부자지. 하지만 현금은 일본놈들이 더 가지고 있으니까 일본 놈들로 골라서 와.”
“오우~ 노. 이번에는 급이 달라. 꽤 유명한 연예인이라던데?”
스노클링 장비를 정리하던 미키가 그대로 멈췄다.
“연예인?”
“그래. 뭐라더라······ 유진 정? 알아?”
“알지. 요즘 내 친구들이 그 여자 나오는 드라마를 보거든. 제목이 뭐라더라 블루 스카이? 맞다. 그거였을 걸?”
“그게 뭔데?”
“한국에서 가장 핫한 드라마인데 재미있다고 하더라고.”
크리스는 그게 뭐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한국 드라마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탕 할 거지? 걔들 가진 옷이랑 액세서리도 엄청 비싸 보이던데.”
크리스는 유명 연예인의 지갑과 귀중품을 털자는 제안을 꺼냈다.
미키가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런 일이라면 형님들에게도 미리 알려야 할 텐데······.”
“에이. 그러면 절반은 상납해야 하잖아. 그냥 애들 몇몇 모아서 우리끼리 해 먹자고.”
미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난 리조트 안에 못 들어가는데 어떻게 하려고? 보안 카드라도 얻어 주려고?”
“리조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게 맡겨. 같이 일하는 사람이랑 손을 잡았거든 넌 내일 새벽에 남서쪽 야자나무 쪽으로 차를 가지고 오기만 해.”
“오케. 운반조 해달라 이거지? 몇 시에?”
크리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12시 넘어서. 하여간 전화할 테니까 밖에서 꼭 기다려?”
“오케이.”
리조트로 돌아가는 크리스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크리스의 주목표는 정유진이 가진 액세서리와 신용카드였다.
신용카드의 경우는 자신이 아는 기술자에게 넘기면 단숨에 복제해 제한 액수까지 인출 해낼 수 있으니까.
크리스는 이번 기회에 큰돈을 번 다음 이 보홀섬을 떠날 생각이었다.
자기 같은 밑바닥 갱단원은 평생 굴러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보스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탕을 크게 할 생각이었다.
* * *
밤 8시.
코카리스웨트 홍보 실장이 센터로 사용하는 1번 빌라의 거실.
내일 버진 아일랜드에서 촬영할 콘티 점검 회의가 마무리되고 있다.
각종 씬마다 키 포인트를 알려준 박불출 감독이 한 가지만 체크하자 말했다.
“유진 씨. 음료수를 잡고 마시는 모습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유진이가 곁에 있는 코카리스웨트 캔을 붙잡았다.
마치 야구 배트를 잡듯 캔을 붙잡자 박불출 감독이 고개를 젓는다.
“아뇨. 너무 운동선수처럼 쥐셨어요. 시원함 그리고 상큼함을 표현해야 하니까 마지막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부드러운 솜사탕을 쥐듯 캔을 세 손가락으로만 가볍게 쥐어 보시겠어요?”
박불출 감독이 섬세하게 지도를 한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감독이 곰이나 닭 원숭이를 연기하라고 시킨 사람이 맞나 싶었다.
‘역시 광고 천재 박불출인가?’
다른 장르의 광고를 찍는 데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유진이가 즉각 캔을 잡는 손 모양을 바꾸었다.
“이렇게요?”
“역시 유진 씨는 두 번이 필요가 없네요. 좋습니다. 그럼 회의는 여기서 끝내시죠.”
회의가 끝나자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사가 테이블에 펼쳐졌다.
새끼 돼지 숯불 통구이 거대한 랍스터에 고소한 버터 소스 달콤짭짜름한 향을 풍기는 오징어순대 비슷한 요리들까지.
거기다 아열대의 해안 리조트라 그런지 빨강 파랑 각양각색의 신기한 해산물 요리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명한 현지 맥주인 산미구엘도 나왔지만 내일 촬영 때문에 스태프들에게는 한 병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주스만 마셨다.
잠시 후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사이 유진이와 미소는 음식을 눈으로 좇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진이는 내일 있을 촬영 때문에 몇 점밖에는 못 먹기에 내일 반드시 먹을 거라며 눈에다 꼭꼭 담고 있었다.
미소는 전혀 상관없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댔지만.
“엄마~ 나 저기 대왕 새우!”
“응. 엄마가 까 줄게. 자~ 아~?”
“아~!”
유진이는 미소에게 구운 타이거 새우를 까준 뒤 손가락만 쪽쪽 빨아댔다.
“근데 엄마는 왜 안 먹어?”
“응? 엄마는 새우 싫어하거든.”
거짓말이다.
유진이가 싫어하는 음식은 세상에 없다.
내일 촬영 때문에 참는 것일 뿐.
그렇게 유진이와 나만 빼고 즐거운 식사가 끝난 뒤 밤 10시가 되어서야 빌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
빌라에 도착하니 크리스와 아니타가 우리를 맞이했다.
잠자리 준비를 끝낸 메이드 아니타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그럼 전 자고 내일 아침에 올게요.”
“그래요. 아니타. 잘 쉬고 내일 봐요.”
아니타가 나가자 빌라에는 크리스만 남았다.
순간 난 리키와 의논한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크리스. 혹시 빌라 내에 금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크리스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본 순간 불행히도 내 생각이 맞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1층 두 번째 방에 있습니다.”
난 함께 온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귀중품은 꺼내서 1층 금고에 넣으세요.”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오빠. 코카리스웨트에서 준 주얼리도 넣어요?”
“어. 주얼리랑 지갑이랑 전부다.”
“아. 알았어요.”
유진이부터 직원들까지 모두 다 귀중품과 지갑을 꺼내 1층 금고에 집어넣었다.
가로세로 30cm 정도의 사이즈밖에 안 되는 임시 금고는 귀중품을 잠깐 넣어둘 수 있다.
하지만 리조트 직원들이라면 마스터키만 있으면 누구든지 열 수 있었다.
손님이 체크아웃하고 나면 잠긴 금고를 열어야 하니까.
난 태연한 표정으로 크리스에게 부탁했다.
“크리스. 리키와 마이클이 일행의 안전을 책임질 테니 크리스는 금고를 지켜 주세요.”
“믿고 맡겨주십시오. 보스!”
‘그래. 돈만 챙기고 우리 애들한테는 신경 쓰지 마.’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기’ 작전을 펼친 난 일행들에게 휴식을 지시했다.
일행들이 각자 방으로 돌아간 뒤 리키에게 말했다.
“리키. 사람이 안 다치는 게 첫 번째 크리스를 잡는 게 두 번째입니다.”
리키와 마이클은 크리스가 금고를 털면 밖에서 대기하는 경호원들이 크리스를 잡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스. 제이슨 대표가 도주할 만한 루트를 철저히 감시하는 중입니다.”
덫은 깔렸고 만일의 수까지 둔 상태.
부디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 일이 끝나기를 바라며 내 방으로 향했다.
재깍재깍.
1시간 2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12시가 되었다.
[에브리데이 V10.1]
-AM 09:3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NEW. 정유진] 필리핀 보홀섬 경찰서장 미팅.)
“됐다.”
크리스가 금고를 털다 리키에게 잡히는 모양이다.
겨우 안심을 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금 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알림 : 2020년 6월 25일. 정유진 씨의 새로운 일정이 추가되었습니다.]
‘이게 뭐야?’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6월 25일]
-AM 00:15 [NEW. 정유진] 보홀 병원 방문. 수혈.
유진이가 병원을 간다고?
그것도 지금부터 15분 뒤.
수혈을 위해서?
그 순간 생각도 할 것 없이 유진이의 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