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187. 업데이트 2
필리핀에 있는 팽글라우 국제공항.
비행기에서 내리자 후덥지근한 습기가 공기 중에서 느껴졌다.
근처에 바닷가가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챌 정도였다.
일행들을 이끌고 출국장을 나서자 코카리스웨트 홍보실장인 김창진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정유진 씨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커다란 팻말이 들려 있었다.
“여깁니다!”
김창진 실장은 3일 전에 미리 와 있었던 탓에 온몸이 새카맣게 타 있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고생 많으셨죠?”
“아뇨. 편하게 왔어요. 준비해주신 비즈니스석이 엄청 좋던데요?”
“다행입니다.”
유진이와 인사한 김창진 실장이 무릎을 꿇고서 미소와 시선을 맞췄다.
“네가 미소구나.”
“네!”
“이쁘고 똑똑하게 생겼구나. 우리 미소도 나중에 커서 연예인이 되면 우리 회사 광고 찍으면 딱이겠는데?”
그런데. 미소의 볼이 뿌루퉁해졌다.
“미소야. 왜?”
“치. 저 지금도 연예인인데······.”
“그 그래? 아저씨가 실수했어. 미안해?”
당황한 김창진 실장이 미소에게 연신 사과하자 미소의 화는 금세 풀려버렸다.
어차피 화를 내는 것 자체를 잘하지 못하는 미소였으니까.
‘미소야. 그래도 파워터프걸 사탕 하나에 웃는 건 너무 빠르지 않니?’
우린 그 뒤 김창진 실장을 따라 공항을 나섰다.
공항 출구에는 미리 준비한 15인용 승합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 올라타기 전 김창진 실장은 오늘부터 2박 3일 동안 필리핀 안내를 도와줄 가이드와 도우미 그리고 경호원을 소개했다.
“그리고 여기는 경호원 크리스 도우미 아니타 가이드 빅쌤입니다.”
그리고 우린 곧장 리조트로 향했다.
* * *
필리핀 보홀섬에 있는 버진 아일랜드는 간조가 일어날 때 드러나는 새하얀 반월 모래사장을 말하는 이름이다.
하루에 한 번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새하얀 모래사장은 반월로 휘어져 있는데 그 양쪽으로 청록색의 바닷물이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묵을 리조트는 그 버진 아일랜드에서 가장 가까운 버진 리조트였다.
버진 리조트에 도착하자 버거퀸 광고를 찍으면서 안면을 튼 마린 기획의 스태프들이 안부 인사를 나왔다.
“안녕하세요. 유진 씨. 오래간만에 뵙네요. 우리 감독님도 유진 씨와 작업을 한다고 신이 나셨어요.”
“그런데 박 감독님은 어디 가셨어요?”
“현장 답사 가셨어요.”
버거퀸의 광고로 확 뜨다시피 한 마린 기획이 이번에도 유진이의 광고를 맡게 되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박불출 감독이 다시 한번 유진이를 감당하게 되었고.
“나중에 저녁 회의 때 같이 보시죠.”
스태프들과 다시 한번 인사한 뒤 리조트에서 가장 좋은 곳인 2층짜리 독채 건물인 초대형 빌라 NO. 7로 이동했다.
푸른 벽으로 둘러싸인 독채 건물이 보이는 빌라 NO. 7의 갈색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25m짜리 넓은 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떤 방에서든 풀에 바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딱 붙은 거대한 2층짜리 건물이 서 있었다.
“우와! 삼촌! 나 풀장에 들어가도 돼요?”
“그럼.”
이럴 줄 알고 미소 수영복은 내가 챙겨왔지.
미소가 환호하는 모습에 지쳐 있던 유진이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덕분에 이 장소를 잡은 김창진 실장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촬영에 참석하지도 않는 미소에게도 비즈니스석을 제공하고 최고급 숙소를 잡은 것 모두 오로지 유진이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으니까.
유진이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말했다.
“실장님. 여긴 너무 과분한 숙소인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저희가 워낙 일찍 유진 씨랑 계약을 맺어 광고비를 좀 싸게 책정했다는 걸 본사도 알고 있습니다. 대신 성의 표시라도 확실히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흐뭇하게 웃던 김창진 실장이 연이어 일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시간 때 최종 점검 회의하시죠. 그리고 내일 간조 시간에 맞춰 촬영에 들어갈 겁니다. 햇볕이 따가우니 선크림은 심할 정도로 바르시고요.”
김창진 실장이 까맣게 탄 자신을 가리키며 신신당부를 해왔다.
우리 일행은 김창진 실장이 건네준 일정표를 받고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각자의 방에 짐을 풀고 모인 다음 회의를 위해 이영진과 이미리 대리를 다른 방으로 불러내었다.
철저한 준비 덕에 현장 대응을 위한 회의는 30분 만에 끝이 났다.
“······그러면 미리 씨는 내일 촬영 이후에 스타그램에 올릴 의상들 체크 한 번 더 해주세요. 온 김에 뽕을 뽑고 가죠.”
“예. 혹시 몰라 의상 준비는 넉넉히 해왔어요.”
이미리 대리가 자신이 들고 온 커다란 의상 케이스를 가리켰다.
“잘하셨어요. 그리고 영진이 너는 코카리스웨트 팀 만나서 사전 답사 좀 하고 와.”
“팀장님이 직접 안 가시고요?”
“대리 달려면 너도 현장 경험 쌓아야지. 안 그래?”
이영진이 감격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조금은 미안했다.
물론 이영진이 경험을 쌓기를 바란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회귀 전에도 여길 몇 번이나 와 봐서 다 아는 데다 따가운 햇볕에 살이 탈까 봐 안 나가는 거니까.
“그러면 현장 답사 분명히 해오겠습니다. 동영상으로 다 찍어 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야. 잠깐만. 선크림 바르고 가.”
“고작 몇 시간 길인데요. 뭘. 전 그런 거 안 발라도 거뜬합니다.”
이영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폰을 쥐고서 곧장 사라져버렸다.
“탈 텐데······.”
이미리 대리도 의상 체크를 하러 사라졌기에 그제야 다시 다이어리를 확인할 여지가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6월 25일]
-AM 09:30 [NEW. 정유진] 필리핀 보홀섬 경찰서장 미팅.
역시나 변한 건 없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내일 아침 9시 30분에 경찰서장과의 미팅이 있다는 건 적어도 오늘 밤부터 새벽녘 사이에 뭔가가 일어난다는 거다.
일단 유진이에게도 조심하라는 말부터 우선 해야겠다.
워낙 빌라 건물이 컸기에 내 방에서 유진이의 방까지 가는 데만 해도 한참이나 걸렸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자 미소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삼촌. 왜요?”
“아. 엄마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
“잠깐만요!”
미소의 고개가 쏙하고 들어갔다.
“뭐지?”
잠시 후.
달칵하고 다시금 문이 열리더니 유진이와 미소가 푸른색과 하얀색이 섞인 래쉬가드를 입고 나타났다.
“짜잔!”
두 사람이 밝은 표정으로 두 손을 뻗는다.
“뭐야. 그건?”
“안 예뻐요?”
유진이의 머리카락이 일명 똥머리라고 불리는 올림머리 스타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솜씨가 어찌나 어설픈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뻐. 예쁜데······. 머리는 다시 해야겠는데? 시차도 없는데 헤어스타일이 왜 그 모양이야? 큭.”
유진이가 입술을 살짝 내밀더니 투덜거렸다.
“오빠. 이거 미소가 해준 건데.”
“흡!”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벌써 미소의 입이 튀어나와 있었다.
요즘 들어서 미소가 그림이 아닌 패션에도 손을 댔을 줄이야!
“미 미소야. 삼촌이 농담한 거야.”
뾰로통한 미소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기에 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둘 다 앉아봐.”
웃음기 싹 뺀 얼굴로 두 사람을 불러 앉히는 순간 두 사람은 방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내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해외에 나와서는 무조건 조심 또 조심해야 해. 미소는 모르는 사람 절대 따라가면 안 되고. 알았지?”
“네!”
“유진아. 미소 잘 챙겨. 촬영 때는 최대한 내가 챙기겠지만 나머지 시간 땐 미소를 놓치지 말고.”
소파에 앉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경고한 다음 미소에게는 손목 띠를 두르고 비상 경고를 할 수 있는 호루라기까지 건넸다.
엄마나 내가 눈에 띄지 않으면 그 자리에 서서 힘차게 불라면서.
“네! 삼촌!”
“지금 불어볼래?”
삐이익–.
미소가 볼이 통통하게 부풀 정도로 힘차게 호루라기를 불었다.
거대한 빌라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소리가 났다.
하지만 여전히 다이어리의 일정에는 변한 건 없었다.
‘이게 아닌가?’
그렇다면 좀 더 심각한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데.
* * *
안전한 리조트로 널리 알려진 보홀 리조트는 자체 경호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코카리스웨트에서 붙여준 경호 담당자 크리스도 있었고.
하지만 한눈에 봐도 껄렁거리는 모습이 전문적인 경호 요원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결국 고심 끝에 경호 실수를 빚었던 TOP 경호의 최양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팀장님. 필리핀에 잘 도착하셨습니까?
“이제 막 도착해서 짐 풀고 정리 중입니다.”
-잘 도착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공항에서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하시죠. 그것보다 최 대표님. 혹시 필리핀 보홀에 사설 경비업체를 알고 있습니까? 보홀섬 경찰서장이랑 아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예. BH 인터네셔널이라고 제이슨이라는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가 있는데 실력이 좋습니다. 보홀섬 경찰서장이랑도 친하고요.
과거 한국이 그랬듯 필리핀은 지독할 정도로 인맥이 지배하는 사회라나.
“그러면 제이슨 대표에게 24시간 경호 체계로 상시 2명의 경호 인력을 부탁할 수 있을까요? 기간은 이틀 저희가 필리핀을 떠날 때까지면 됩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S급으로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용은 저희가 다 부담하겠습니다.
필리핀의 사설 경비비용은 한국보다 꽤 싼 편이었다.
이걸로 인천공항에서의 실수를 다시 만회하려는 최양한 대표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 귀국 날 뵙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팀장님. 실망하시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서 경호원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 * *
오후 6시가 넘어가자 해가 천천히 어둑어둑 내리기 시작했다.
벌컥.
현장에 나갔던 이영진이 새카맣게 그을린 채 들어왔다.
“으으······ 팀장님.”
“그러길래 선크림 바르고 가라니까.”
“그 정도로 햇볕이 좋을 줄 몰랐죠.”
“진정 크림이나 발라.”
내가 준비해 온 피부 진정 크림을 덕지덕지 바르자 이영진의 찌푸린 안색이 단숨에 밝아졌다.
“으으~ 살 거 같다.”
“현장은 어때?”
“아 날씨도 좋고 바다 빛깔도 최고던데요? 모래사장을 잠깐 확인했는데 깨끗했고요.”
이영진이 빠지는 것 없이 착착 대답할수록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하지만 일은 확실히 해야지.
“영진아. 모래 갈기는?”
“아직요.”
“내일 맨발로 촬영할 건데 유진이 발이 찔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미리 모래를 갈아둬야 안 다치지. 답사를 너무 성의 없이 한 거 아냐?”
영진이가 씨익 웃는다.
“팀장님. 버진 아일랜드는 매일 바닷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데 오늘 해봤자 뭐합니까? 당연히 내일 길 열리자마자 해야죠.”
“오올~”
“그래서 내일 스태프 10명이랑 같이 점검해 볼 겁니다.”
“제법인데?”
“저도 이제 과거의 이영진이 아닙니다. 예비 대리 이영진!”
이영진이 어깨를 쭉 펴며 자신을 어필했다.
그때였다.
인터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데스크에 현지 경호 회사의 대표 제이슨이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들어오라고 하자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제이슨 대표가 건장한 네 명의 남자를 데리고 왔다.
제이슨은 자기를 먼저 소개한 뒤 곁에 있는 경호원들이 필리핀을 떠날 때까지 우릴 보호할 거라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제이슨.”
회귀 전 영어를 따로 배웠기에 간단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하하.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제이슨 대표는 최양한 대표와 친구 사이라며 명함을 건넸다.
제이슨 대표가 교대조 두 명과 함께 방을 나선 후 우리 곁에는 리키와 마이클이라는 이름의 두 경호원만이 남았다.
두 사람은 바위처럼 단단한 체구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MILF)과의 오랜 전투 속에서 공훈을 세운 노련한 특전사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리키와 마이클은 날 보스라 부르겠다고 한 뒤 곧장 경호를 시작했다.
유진이가 딱딱한 표정의 두 사람을 보더니 긴장된 표정으로 질문을 해 왔다.
“오빠. 저 아저씨들 왜 여기 왔어요?”
“혹시나 해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아냐. 그냥 미소도 데리고 왔으니까 안전한 게 좋겠다 싶어서 부른 거야.”
“그러면 코카리스웨트에서 보내준 크리스 씨는 어떻게 해요?”
“그분도 함께 경호할 거야. 하지만 이분들이 더 프로들이라서 맡기는 거야.”
유진이를 진정시킨 뒤 마지막 광고 회의를 하러 가자 일렀다.
간단한 짐을 챙겨 빌라를 나서자 BH 인터네셔설에서 파견된 리키와 마이클이 곧장 우리 곁에 따라붙었다.
“침실 외 밀착 경호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리조트 안에서도 함께 다녀야 한다는 리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유진이의 새로운 일정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리키. 무슨 일이 생기면 우선순위는 미소 유진 그리고 직원들입니다.”
유진이와 미소에게는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보스는······”
“전 맨 마지막입니다.”
고용된 동안에는 보스라 부르기로 한 리키가 놀란 눈을 한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보스는 마지막. 진심이십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필리핀어인 타갈로그어로 대화를 나눴다.
영어가 필리핀의 공용어라고 하지만 실제로 영어 사용률은 7% 미만이라고 하더니 마이클은 영어를 모르는 모양이다.
리키로부터 내 의도를 들은 마이클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목례했다.
다시 한번 다이어리를 살폈지만 역시나 일정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그때였다.
주변을 살피던 리키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스께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의 입에서 다이어리에 적힌 일정을 해결할 유력한 단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