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6화
186. 업데이트 1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미래의 기록이 담긴 에브리데이 V10이 업데이트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어떤 기능이 있는지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달려드는 팬 때문에 확인을 잠시 뒤로 미뤘다.
수백 명이 한 번에 몰려오는 현장은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었으니까.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우리 일행들은 즉시 유진이의 앞을 막았다.
유진이는 미소를 감싸고 맨 뒤로 움직였고.
“꺄아악!”
팬들의 표정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다.
이러다 깔려 죽는 거 아냐?
그때였다.
달려오던 팬들은 우리 앞 2m 정도 거리에서 그대로 멈췄다.
사방에서 몰려든 30명은 족히 될 법한 인파들이 우리를 삥 둘러 감쌌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진정하세요.”
“아이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들 질서 유지 부탁드릴게요.”
미리 연락한 ‘천호동 얼짱 버거 소녀’ 팬카페의 운영진인 버거맨 패티컬 양상추소년 3인방이 팬클럽 회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대략 200명은 될 법한 사람들은 30명의 팬카페 회원들에 의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사이 경호원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밀착 경호를 하면서도 억지로 팬들을 밀쳐내지 않는 것이 TOP 경호의 회사 방침이었었다.
그런데 경호 대상인 우릴 놓쳤다는 생각에 다급히 인파를 뚫고 오려 했다.
“경호원분들. 잠깐만 거기 계세요.”
내 말을 들었는지 최양한 대표가 함께 온 경호원들을 멈춰 세웠다.
그제야 안심한 나는 팬들을 향해 말했다.
“다른 이용객들이 놀라실 수 있으니 한쪽으로 붙어주세요. 여기 계신 분들은 사진 다 찍어드릴게요.”
연이어 유진이와 미소가 내 옆으로 나왔다.
“비행기 탈 시간 많이 남아 있으니까 오늘은 팬분들과 인사나 나눌까요?”
“나도! 나도!”
곁에 있던 미소도 해맑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팬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나듯 팬들이 갈라진 다음 오른쪽 벽으로 달라붙었다.
그 틈을 타 TOP 경호의 최양한 대표가 경호원들을 대동해 우리 곁에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주차장에서부터 모셨어야 했는데 미처 현장 파악을 못 했습니다.”
TOP 경호는 이제 막 생긴 신생 경호 회사다 보니 경호 대상의 동선 경로 파악에 실수를 해버렸다.
사실 이 정도 사건은 경호 실패로 문책을 해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번은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곧 최고의 경호 회사로 거듭날 TOP 경호 측에 빚 하나를 지워놓는 게 훨씬 이익이니까.
“괜찮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밀착 경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양한 대표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오늘부터 정유진 씨 등급을 제1 경호 대상으로 올리겠습니다.”
한 번 실수에 대한 보상으로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제1 경호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최양한 대표의 첫 번째 주요 경호 요인으로 등록한다는 뜻이니까.
그때부터 우린 경호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질서 정연하게 팬들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 * *
인천공항 공사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모여든 팬들과 일제히 사진을 찍었다.
출국장 안으로 들어오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지만 이곳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진이는 이제 어디서든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쟤 정유진 아냐?”
“맞네. 다큐에서 본 걔 그럼 쟤는 미소네?”
“저 옷 어디 상품이지? 괜찮은데?”
“LM 의류일걸? 요즘 거기서 광고하잖아.”
연신 밀려드는 사인 요청에도 유진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대응했다.
자신의 인기를 한없이 체감하면서 말이다.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난 후에야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라운지는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인천공항의 활주로가 훤히 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광경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라운지 안에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가장 큰 소파를 골라 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누이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휴우. 이제 좀 살겠네.”
“팀장님. 죽겠어요.”
“으으으. 난 아까 발등을 몇 번이나 밟혔는지······”
라운지의 한쪽에는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음식과 음료가 있었기에 함께 온 이영진과 이미리에게 잠시 먹고 마시며 쉬라고 말했다.
그런데 곁에 앉은 유진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
“응?”
“필리핀 가면 제대로 한 턱 낼게요.”
내기에서 패배를 순전히 인정하는 유진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사람들 많이 올 거라고.”
“그러게요. 근데 내기에 져도 기분은 좋은데요? 절 알아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행복한 표정을 짓는 유진이를 본 순간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그러면 잠시만 쉬고 있어. 촬영 팀이랑 스케줄 좀 확인할 게 있어서.”
“네!”
유진이가 미소를 데리고 라운지에 음식을 먹으러 일어나는 걸 보고 코카리스웨트 촬영 팀과 필리핀 공항 입국장에서 만날 장소를 정했다.
그 뒤에 깊이 심호흡을 하고 에브리데이 앱을 작동시켰다.
‘이제 확인해 볼까?’
[에브리데이 V2가 나왔습니다.]
[다이어리를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YES/NO? (적용 대상 : 에브리데이 V1 에브리데이 V10)]
메시지를 본 순간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한다?’
혹시라도 에브리데이의 기능이 사라질까 걱정되었기에 일단은 NO를 선택했다.
‘일단 업데이트 패치 설명부터 보고서 결정하자.’
보통 앱 업데이트가 일어나면 업데이트되는 내용을 미리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NO를 누른 순간 다시 한번 메시지가 떠올랐다.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다이어리를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YES/NO?]
‘무조건 다이어리를 업데이트해야 하는 건가?’
다시 한번 조심스레 NO를 눌렀지만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음으로는 폰을 아예 껐다가 켰지만 떠오르는 메시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내겐 선택지는 없었다.
‘설마 다이어리가 지워지진 않겠지?’
10년 치 일정이 적혀 있는 다이어리가 업데이트될 때 혹시나 삭제 기능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앱 자체를 사용할 수 없다면 어차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미래 일정은 다 백업을 해뒀기에 결국 과감하게 YES를 눌렀다.
그 순간 업데이트 진행 바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설치 파일을 다운로드 중입니다.]
[에브리데이 V2 설치 파일을 다운 중입니다.]
[에브리데이 V10.1 설치 파일을 다운 중입니다.]
‘10.1?’
보통 프로그램이 크게 변경되는 메이저 업그레이드 시에는 V1 V2처럼 아예 버전을 가리키는 숫자가 변경된다.
하지만 변화가 작은 마이너 업그레이드 시에는 V1.1같이 소수점 자리가 바뀐다.
‘V10에서 조금 변했다는 건가?’
어떤 변화이든지 간에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뭐가 됐든 원래의 V10에 있던 기능은 남아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 * *
회귀한 이후.
난 다이어리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다.
회귀 전 편집증적으로 기록을 했던 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내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으니까.
특히 선배들에게서 욕을 먹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다이어리를 작성했던 게 그 시작이었고.
그 탓에 난 과거의 안 좋은 버릇을 버리고 필요한 일부분만 V1에 기록하곤 했었다.
나머지는 녹음이나 녹화 같은 것으로 대체해 버렸고.
어차피 이미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데다 경험도 많은 내게는 다이어리에 일일이 기록하는 게 시간 낭비인 까닭이다.
3회차 인생을 살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3회차 인생?
그건 싫었다.
무한 도돌이표같이 같은 짓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회귀는 딱 한 번이 좋은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는 사이 다이어리의 업데이트가 완료되었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첫 번째 다이어리 : 에브리데이 V2]
[두 번째 다이어리 : 에브리데이 V10.1]
볼 것도 없이 두 번째 다이어리 탭을 눌렀다.
그 순간 첫 번째 화면에 패치 내용이 팍하고 떠올랐다.
[에브리데이 V10.1]
[설명]
-다이어리 전체 일정의 10%가 변경이 확인되었습니다.
-변화된 일정이 미래 일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부 미래 일정의 수정이 일어났습니다.
[패치 내용]
-1. 카테고리 ‘정유진’에 관한 새로운 일정이 추가됩니다.
-2. ‘정유진’과 관련된 새로운 일정 생성은 하루에 하나까지로 한정됩니다.
-3. ‘정유진’에 관한 새로운 일정은 알람으로 알려드립니다.
‘유진이에 관한 새로운 일정이 추가되었다고?’
그렇다면 이제 유진이에 한정해서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인 건가?
부르르.
긴장인지 흥분인지 알 수 없는 감각에 온몸이 떨려왔다.
마치 처음 이 다이어리를 만났을 때처럼.
‘진정하자. 진정.’
어떤 일정이 생겼는지.
그리고 바뀐 유진이의 운명에 어떤 것이 나타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확인 버튼을 눌렀다.
순간 알림창이 뿅 하고 떠올랐다.
[알림 : 2020년 6월 25일. 정유진 씨의 새로운 일정이 추가되었습니다.]
뭐야?
왜 이렇게 친절해?
패치의 3번 내용대로 이제까지 뜨지 않았던 알림 설정마저 떠올랐다.
오늘은 6월 24일.
곧바로 유진이의 새로운 일정이 생겨난 6월 25일로 다이어리를 넘겼다.
찰락.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6월 25일]
-AM 08:3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골든로드 6.25 사전 개인 인터뷰) -AM 09:30 [NEW. 정유진] 필리핀 보홀섬 경찰서장과 미팅.
“미친. 진짜 생겼네?”
에브리데이 V10.1에는 [NEW. 정유진]이란 굵은 말머리와 함께 유진이의 일정이 새롭게 떠 있었다.
이제부터는 진짜 유진이의 앞날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문구에 고민에 빠졌다.
보홀섬의 경찰서장과 미팅?
유진이가 보홀섬의 경찰서장과 만나서 이야기할 게 뭐가 있지?
경찰서에 가는 일이라면 폭행 음주 절도 등등의 사고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몇 가지 경우가 더 떠올랐다.
설마 미소를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물건을 잃어버려서 가는 사소한 일정일 수도 있고.
미래를 처음 보게 된 순간 떠오른 메시지가 이딴 거라니!
습관적으로 다이어리를 뒤로 넘겨봤지만 패치 내용 2번처럼 유진이에 관해 더는 떠오른 메시지가 없었다.
‘어떻게 한다?’
업데이트와 동시에 근심 걱정거리가 생겨버렸다.
* * *
보홀섬의 경찰서장과 만날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라운지에 있는 대형 LCD 화면에 우리가 탈 대한항공 비행기 KE112의 탑승 메시지가 나왔다.
현장 날씨 때문에 광고 촬영 스케줄도 두 번 정도 미뤄진 터라 더는 뒤로 뺄 수 없었다.
결국 현장에 도착해서 부딪혀봐야 할 것 같았다.
내 걱정이 과도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유진아. 가자.”
“잠시만요.”
새벽같이 일어난 미소가 간식을 먹고 배가 부른 나머지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에 빠져 있었다.
대신 미소를 안겠다고 했지만 유진이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점점 커가는 미소였기에 더 나이가 들면 못 안을까 봐 하루라도 더 안고 싶다면서.
유진이가 미소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미소야. 엄마랑 같이 비행기 타러 갈까?”
미소가 눈을 감은 채 대꾸한다.
“으······ 응.”
유진이가 두 손을 뻗어 미소를 일으켜 세우자 미소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뻗어 엄마 목을 감쌌다.
그 탓에 공항 패션 때문에 신경 쓴 유진이의 옷이 구겨졌다.
유진이는 예쁜 투피스가 구겨지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웃음만 가득했다.
유진이에게는 그 무엇보다 미소가 중요했으니까.
미소가 마치 코알라처럼 꼭 안기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유진이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엄마 냄새다. 헤헤.”
흥얼흥얼 잠꼬대하며 얼굴을 비비는 미소 덕에 유진이의 얼굴엔 따뜻한 웃음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난 반사적으로 폰을 꺼내 두 모녀의 사진을 찍었다.
찰칵.
“오빠. 뭐 해요?”
“꼭 코알라 모녀 같아서.”
유진이가 피식 웃는다.
“치. 코알라는 똥 냄새난다던데······.”
그게 여배우 입에서 나올 말이냐?
내 감동 돌려내!
“그래도 귀엽긴 하죠?”
“완전. 귀엽지. 코알라처럼.”
“또 코알라래.”
“아 몰라. 나한테 코알라는 냄새 안 나고 보들보들하고 귀엽고 깜찍한 동물이니까 환상 깨지 말아줘.”
“칫. 알았어요. 그러면 갈까요?”
“오케이.”
탑승 게이트로 움직이며 다시 한번 유진이에게 일어날 일들을 곱씹기 시작했다.
‘뭐가 됐든 다 막아 줄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난 떨리는 심장을 억누른 채 필리핀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