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5화
185. 해외 광고 촬영
유진이가 ‘청명’과 ‘만신 월아’로 1인 2역을 맡는다는 건 제작 발표회장에 모인 사람 중에서는 김성운 PD와 나 김수희 선생님 그리고 이지연 작가 총 넷만 알고 있다.
이제까지 몇몇 물어본 사람들은 있었지만 김성운 PD가 아는 사람이라고 말을 끊으면 굳이 더는 캐묻진 않았었다.
하지만 주영인은 기어코 ‘만신 월아’가 누군지를 물어왔다.
그 순간 김성운 PD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연극판에 계시던 선배님인데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신 분이세요. 평소에는 산에 계십니다.”
“아······ 그러시구나.”
연기자 경험은 있는 현직 무당.
그게 ‘만신 월아’ 역을 맡을 정체불명 배우의 백그라운드였다.
하지만 주영인의 호기심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분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장에서 뵈면 인사라도 드려야 할 텐데요?”
다른 배우들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김 PD. 이제까지는 말을 안 했는데 이름 정도는 알려줘야지.”
“그래요. 김수희 선생님과 연배가 비슷하시다는데 아무리 조연이라도 이름조차 모르면 안 되죠.”
그런데 그 순간 김성운 PD의 입이 막혔다.
설마 그것까지는 생각 안 한 건가?
김명학 CP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름을 물을 생각은 안 했군.”
“그 그게 말입니다······”
“왜 이름을 말하면 혼이라도 나나?”
김명학 CP가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순간 내가 나서서 다급히 외쳤다.
“진유정 여사님이라고 합니다.”
그 순간 모두의 눈이 내게로 몰려버렸다.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는 제가 직접 진유정 여사님을 에스코트할 겁니다.”
주영인이 의심이 가득 쌓인 눈빛을 띤다.
“진유······정이요?”
설마 알아챈 건가?
정유진.
그 이름을 거꾸로 하면 진유정.
하지만 특수 분장을 한 유진이를 만나면 눈으로 봐도 알아챌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김명학 CP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 진유정 여사라는 분이 굴렁쇠에서 관리하는 배우였어?”
“저희가 관리하는 건 아니고요. 이번 드라마 찍는 동안에만 제가 케어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네. 그래도 필요한 건 저를 통해서 물어보시면 됩니다. 그분 직업이 직업이신지라 사람 만나는 걸 꺼리시거든요. 김수희 선생님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캐스팅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오케이.”
김명학 CP는 한시름을 덜었다는 듯 주변을 보며 말했다.
“자! 그러면 잘들 해보자고! 우리도 동 시간대 1위 한번 차지해 봐야지! 사장님께서도 기대가 크시니까.”
주영인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행히 더는 묻지 않았다.
이제 <신의 이름으로>의 크랭크 인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체불명의 배우 진유정이 나타날 날도.
* * *
[<신의 이름으로> 크랭크 인 7월 1일!]
[이지연 작가! 은퇴 선언?]
[이지연 작가! <신의 이름으로>는 <파란 하늘>을 뛰어넘는 대작일 것이라 공언! “파란 하늘의 시청률을 못 넘으면 은퇴한다!”]
[주영인의 단발머리! 파격적인 변신!]
[정유진이 입고 나온 화제의 드레스! 자체 발광 소재의 정체는?]
[정미소! 화제의 씰룩씰룩 댄스!]
기사를 보던 김동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영인에 대한 기사를 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가 힘든 까닭이다.
“에잇! 차라리 확 망해 버리지!”
하지만 그 말과는 달리 주영인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했다.
기회만 되면 누가 뭐라든 간에 다시 데리고 돌아올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런데 또 하나 짜증 나는 건 정유진이 입은 핑크빛 드레스가 실검 3위 안에 들어갔다는 거다.
새로 스타일리스트를 영입했다더니 단번에 실검 순위에 올라갈 줄이야.
“이건 또 뭐야? 자체 발광? 밤무대 가수도 아니고 기자 간담회에 이런 의상을 입고 나오다니. 촌스럽게······.”
괜한 심술로 정유진의 인기를 폄훼했다.
순간 곁에 앉아 있던 주호성이 조심스레 물었다.
“실장님. 그런데 최만식 대표님이 지시하신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 다른 일보다 그게 가장 급한 것 같은데요?”
대주주 최은태 회장의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라는 지시를 떠올린 김동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날새가 열심히 찾고 있긴 한데 성과가 없어.”
“무작정 찾는 게 아니라 관계자들을 더 파보면 뭔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김동수가 고개를 저었다.
“산파는 회장이 끼고 있고. 나 빼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최 회장의 수족들이란다. 그 사람들 곁에 가서 운이라도 띄웠다간 너나 나. 바로 인천 앞바다 행이다.”
“그러면 정보를 더 캐내긴 힘들겠네요······.”
“그래.”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꾹꾹 누르던 주호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경기도 광주라고 했죠? 그 여자가 아이 낳은 곳이?”
“그래. 하여간 반드시 찾아야 해. 그 녀석이 우리에게는 금 동아줄이 될 테니까.”
그때였다.
김동수가 생각에 잠긴 주호성을 보며 물었다.
“너 인마. 혹시 딴 맘이라도 먹은 건 아니겠지?”
주호성이 대경실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요.”
“뭔데?”
“그 여자. 돈도 없었다면 애를 고아원 아니 보육원에 맡기지 않았을까요?”
순간 김동수의 눈이 번뜩였다.
“그거······ 말 되네?”
“100%는 아니지만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라면 그렇게 시작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여전히 직접 키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또 모르잖습니까?”
김동수의 얼굴이 밝아진다.
“우리 주 팀장. 역시 머리가 보통이 아니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예. 실장님.”
“애 엄마가 갓난애 때 애를 맡긴 게 아니라 그 뒤로 몇 년 키우다가 보육원에 맡겼으면 어떻게 하지?”
순간 주호성이 침을 꼴딱 삼켰다.
그것까지는 생각 못 했으니까.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 그래도 나이가 있잖습니까? 갓난아기 때 맡겼든 10살에 맡겼든 간에 같은 나이대 아이들을 다 찾아보라고 하면 되죠. 지금 스물예닐곱이라면서요?”
그제야 김동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좋은 생각이네.”
그 순간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이 밝아졌다.
“주 팀장. 경기도 광주에 보육원이 몇 개인지 알아?”
“그거야 무슨 상관입니까? 날새가 뛰어다닐 건데.”
“푸하하하. 그래. 그렇지. 우린 상관할 필요가 없지.”
김동수는 즉각 전화를 들어 날새에게 경기도에 있는 보육원을 중심으로 아이를 찾으라고 일렀다.
그렇게 최만식과 김동수의 검은 손은 최은태 회장의 잃어버린 아들을 향해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 * *
4층 회의실에서 정 팀의 회의가 열렸다.
이태풍 촬영 상황과 하루의 드라마 오디션 대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후 체리블라썸의 활동 중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내일 유진이의 코카리스웨트 광고 촬영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와 해외 촬영에 같이 갈 사람은 이영진과 이미리 스타일리스트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미리 스타일리스트가 곤란한 표정으로 광고 콘티 파일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 대리님? 왜 그러세요?”
“팀장님. 컨셉 파일에 나온 의상 컬러가 코카리의 고유 컬러보다 채도가 한 단계 떨어지는 거 같은데요? 필리핀에서는 대체품을 구할 수가 없으니까 미리 업체에 연락해서 래쉬가드 3벌 정도 준비해 둘게요.”
“의상은 LM 의류와 전속 계약을 맺었으니까 그쪽에서 받으세요. 3개가 아니라 더 받아도 문제없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이미리 대리는 딱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코카리스웨트의 컬러 의상과 프린팅된 컬러의 차이를 알아내었다.
심지어 백업 플랜까지 단번에 내놓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팀장님. 모니터랑 프린터 캘리브레이션을 다시 잡아야 할 거 같아요. 모니터로 보는 색상이랑 프린터로 출력된 결과물도 차이가 꽤 나요.”
캘리브레이션은 한국말로 교정을 뜻한다.
다시 말해 정확한 색상을 볼 수 있도록 모니터와 프린터에 색감 조정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깐깐한 요구였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꽤 중요한 일이다.
가령 방송이나 CF에 출연할 때 붉은색 의상인 줄 알고 나갔는데 감독은 핑크색을 원했다는 걸 뒤늦게 아는 일 같은 건 부지기수였으니까.
그 경우에는 제일 죽어 나가는 건 매니저들이었다.
새로 의상을 구해야 하는 데다 기분이 상한 감독의 비위도 맞춰야 했고.
하지만 이미리 대리 덕분에 그런 실수는 없앨 수가 있었다.
다만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모르는 다른 매니저들은 멍하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적막감이 돌자 의견을 제시하던 이미리 대리가 어깨를 움츠렸다.
“죄 죄송해요. 제가 좀 나댄 거 같네요.”
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 대리님.”
“예?”
“제가 이 대리님을 팀장급 대우로 모셔온 게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아이디어는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정 팀에서는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커팅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건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예. 팀장님.”
이미리 대리가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짓기에 내친김에 한마디를 더했다.
“그리고 캘리브레이션 때문에 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생기는지 알고도 있으니까 정 팀에서 사용하는 PC와 프린터를 모두 조정해 주세요. 정 안되면 새 제품을 구매하시고요.”
“그렇게까지는 할 것 없는데.”
“아뇨. 컬러 피킹을 못하는 감독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해피 핑크랑 밀레니얼핑크도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 널린 게 이 판입니다.”
이미리 대리의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안다며 예시를 말하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곰곰이 대화를 듣고 있던 도란희가 쌍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쉬~ 우리 팀장님!”
“란희야. 너 무슨 말인지 알아듣긴 했니?”
“반만요? 그 그래도 좋은 말은 맞잖아요. 안 그래요?”
어 그래.
엄청 좋은 말이야.
덕분에 회의실은 한바탕 웃음으로 가득 찼다.
팀원들이 잘 못 알아듣지만 그럼 뭐 어때?
차차 가르치면 되는 거지.
어차피 이미리 대리에게 어필하려는 목적은 이뤘고.
“하여간 이 대리님. 그 문제는 전권을 드릴 테니 알아서 처리하세요.”
“네! 최선을 다할게요!”
회귀 전에는 1년 만에 회사 스타일리스트를 모조리 휘어잡았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지 궁금해졌다.
“자 그러면 내일 봅시다.”
내일은 유진이의 첫 해외 촬영이다.
덕분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라 애를 써야 했다.
회귀까지 했지만 비행기를 타는 건 언제고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 * *
6월 24일 새벽 5시.
인천공항 제2 청사의 주차장에 차를 댄 후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옆에는 이영진이 그리고 뒷좌석에는 스타일리스트로 동행한 이미리와 유진이 미소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유진이와 미소는 이미리가 준비한 파스텔톤의 꽃무늬가 새겨진 분홍빛 투피스로 깔맞춤을 하고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졸릴 법도 하지만 비행기를 타는 게 기쁜 탓인지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공항으로 들어가면 경호원들이 마중 나올 거야. 절대 혼자서 움직이지 말고. 팬들이 몰려들면 사고가 날 수도 있어.”
팬들이 몰려들 때의 유의 사항을 말해주자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오빠. 이렇게 이른 시간에 팬들이 올까요? 사람이 한 명도 안 보이는데.”
유진이가 창문 밖 주차장을 가리켰다.
아직 어두운 주차장에는 세워진 차들 말고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공항 건물 안에는 사정이 다를 거다.
작년부터 연초까지 이어진 활약으로 유진이도 극성팬이 많이 늘어난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극성팬들이라 불릴 정도라면 어떻게든 출국 사실과 시간을 알아내는 법.
사람이 몰려들 게 뻔하다고 생각한 나는 현장을 통제하기 위해 팬카페에 협조 요청을 해 둔 상태다.
“최소 100명 정도는 나와 있을걸?”
“에이~ 내가 한류스타도 아닌데.”
“내기할래? 너 요즘 인기 많다니까?”
“좋죠. 100명 넘으면 필리핀에 가서 한 턱 쏘기?”
“콜!”
그래 모든 건 내기가 걸려야 재미있지.
사정을 모르는 유진이를 골려 먹는 게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유진이는 자신만만하기만 했다.
“미소야. 오늘 우리 삼촌이 맛있는 거 사줄 거야!”
“응! 엄마.”
“미소야. 삼촌이 이겨도 미소 맛난 음식은 사줄게.”
“응! 삼촌.”
미소가 유진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본다.
잠깐.
누가 이기든 간에 미소는 상관없나?
미소가 해맑게 웃는 모습에 절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우리 미소가 나날이 똑똑해지는 거 같은데?’
* * *
이영진과 함께 짐을 챙긴 다음 캐리어를 끌고 가며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작은 규모지만 몇 년이 지나기 전 최고의 연예인 경호 전문 회사가 되는 TOP 경호의 최양한 대표가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저 정 팀장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티 팀장님.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다니요?”
-일단 들어오지 말고 거기 계세요! 저희가 주차장 쪽으로 갈 테니······. 어? 어? 학생 밀지 마!
달칵.
최양한 대표의 폰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겨버렸다.
나는 급히 앞서가는 일행들을 불렀다.
“잠깐만! 거기 서.”
하지만 우리 일행은 이미 2청사 앞까지 온 상태였고 눈치를 챈 팬들이 급히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꺄아아악!”
“정유진이다!”
인천공항 2청사의 높은 천장 덕에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땅이 둥둥 울릴 정도로 진동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우웅.
손에 든 폰에서도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최양한 대표의 전화인가 싶어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뭐야 이거?’
[에브리데이 V2가 출시되었습니다.]
[다이어리를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YES/NO? (적용 대상 : 에브리데이 V1 에브리데이 V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