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3화
183. <신의 이름으로> 제작 발표회 1
“오셨어요?”
대기실에는 새롭게 영입한 스타일리스트 이미리와 채상우 부부가 초췌한 몰골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이와 미소가 입을 옷을 협찬받기 위해 어젯밤부터 압구정과 동대문을 돌아다니느라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제가 너무 고생을 시키네요.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하하.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팀장님!”
“그래요 예전에 원단 떼오는 일할 때와 비하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지시가 아니더라도 이번 제작 발표회에서 유진이와 미소를 가장 빛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두 사람이다.
최근 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덕에 나날이 좋아지는 채은별의 상태에 보답할 길은 그것밖에 없다면서.
“그래도 건강 챙겨가며 일합시다. 일단 의상만 넘기고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주무세요.”
“오늘 현장이 잘 마무리되는 걸 확인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제작 발표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두 사람의 말에 ‘업무 지시’라는 말로 돌아가라 못을 박았다.
이미리 대리가 알겠다고 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팀장님.”
“네.”
“우리 은별이가 정 팀장님은 언제 오냐고 자꾸 묻는데 이걸 어떻게 하죠?”
장난스러운 이미리 대리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조만간 들른다고 해주세요.”
“호호.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아 그리고 미소도 같이 갈 겁니다.”
곁에 있는 미소를 가리키자 미소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동년배의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미리 약속했으니까.
“응! 나 은별이 보고 싶어요.”
이미리 대리가 감격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 은별이 진짜······ 좋아하겠다. 어쩜 좋아. 고마워 미소야. 우리 은별이가 미소 네 팬이거든.”
“진짜요? 우와! 신난다!”
미소가 방방 뛰자 이미리 대리의 얼굴이 환해지고 있었다.
이미리의 딸을 구하고 그녀의 남편까지 구했다.
그 덕에 회귀 전 내가 알던 ‘얼음 마녀’ 이미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준비해 오신 의상 좀 볼까요?”
“예. 예. 팀장님.”
정신을 차린 이미리 대리는 전용 케이스에서 투피스로 된 연한 핑크빛 시스루 레이스 원피스를 꺼냈다.
미디 기장에 아랫단이 플레어 치마 형태로 이뤄져 있는데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예쁜 옷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옷은 너무 예쁜데······ 시스루라서 안이 비칠 것 같은데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리 대리는 전용 케이스 안에서 이너 슬립용 흰색 드레스를 한 벌 더 꺼내 들었다.
“여기요. 이걸 받쳐입으면 돼요.”
아 두 개가 한 세트였구나.
그제야 안심이 된다.
“유진아. 어때?”
그런데 대답을 듣기도 전 반응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미 유진이는 넋을 잃고 있었으니까.
“예?”
유진이는 미소를 키우는 데 돈을 써야 한다며 돈을 아끼는 게 습관화되어 있다.
그 탓에 유진이는 자기 옷을 산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오늘 이미리 대리가 골라온 옷은 그런 유진이의 마음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너 너무 좋아요.”
유진이가 조심스레 드레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옷을 만지작대는 유진이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아무래도 이 옷은 따로 구매해서 선물해야 할 거 같다.
안 그래도 비싼 정장을 선물 받아 답례로 뭘 해줄까 고민했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난 속내를 숨긴 채 이미리 대리에게 말했다.
“이 옷이라면 오늘 기삿감은 확실하네요. 제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해 주셨습니다.”
“천만에요.”
“그리고 이 옷. 따로 구매하겠다고 디자이너분한테 말씀해 두세요.”
“예?”
“아 쓸 데가 있어서요. 그리고 제 개인 비용으로 낼 거니까 입금 계좌랑 금액 까톡으로 알려주세요.”
“아 네. 팀장님.”
이미리 대리가 꾸벅하고 인사를 하자 이번엔 채상우가 자신의 차례라며 옷을 내밀었다.
“이건 미소가 입을 의상입니다.”
극 중 어린 ‘청명’은 한복을 늘 입고 산다는 설정이다.
채상우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미소가 입을 한복을 꺼내 들었다.
옅은 분홍 저고리에 연한 하늘색의 한복 치마였다.
곳곳에 꽃무늬가 수로 놓인 한복을 보자 이번엔 미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감탄사를 터트린 미소가 날 쳐다본다.
“삼촌 나 진짜 이거 입어도 돼요?”
“응! 우리 미소가 입을 거야.”
“우와! 진짜요?”
놀란 미소가 눈이 두 배로 커졌다.
“그래. 그러니까 미소야. 상우 아저씨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응!”
미소가 채상우에게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
“감사합니다! 저 꿈만 같아요!”
“그래? 우리 미소가 좋아하니까 아저씨가 더 좋은걸?”
채상우는 마치 자신의 딸에게 선물하고서 반응을 보는 듯 기뻐하고 있었다.
미소 옷도 사줘야겠다.
난 채상우에게도 계좌와 금액을 까톡으로 보내라 말했다.
“그럼 난 잠깐 나가 있을게. 갈아입어.”
옷을 갈아입게 둔 뒤 잠깐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웅성웅성.
복도에서는 제작 발표회를 준비하는 진행 요원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도 바빴지만 세상 모두가 각자의 공간에서 열심히 살고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대기실 복도 한쪽 끝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지연 작가가 여길······ 왜?’
이지연 작가는 평소에는 제작 발표회장 같은 곳에는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 나서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데다 집필 스트레스에 신경 쓰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이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
‘주영인. 너 대체 왜 그래?’
* * *
주영인을 특정하는 몇 가지 트레이드 마크가 있다.
그중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는 그녀의 자랑거리였다.
샴푸 광고의 단골 모델이기도 했고 본인 스스로도 윤기 있고 찰랑거리는 머릿결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다.
나와 결혼하고 나서도 늘 머리카락에는 공을 들였으니까.
그 탓에 <신의 이름으로>의 여주인공 ‘방신애’ 역할의 신임 여검사를 맡아도 머리를 자르는 게 아니라 올림머리를 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런데 주영인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타났다.
귀밑머리 5cm 정도의 단발머리.
지금은 여중생들도 하지 않을 법한 머리카락 길이로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주영인이 멀리서 날 보며 아는 체를 한다.
“윤호 오빠!”
제작 발표회 현장에 있는 진행 요원들이 보든 말든 너무도 태연하게 손을 흔든다.
조금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예. 안녕하세요. 주영인 씨.”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인사한 뒤 함께 온 이지연 작가에게 고개를 숙였다.
“작가님.”
“유노. 아니지~ 이제 정 팀장이라 불러줘야 하나?”
“서먹하게 왜 그러십니까? 전 언제까지나 작가님의 유노가 되고 싶습니다.”
두 손을 귀 옆에 대고 딸랑딸랑 흔들어댔다.
그러자 여지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이지연 작가였다.
“호호호. 우리 유노. 팀장이 되더니 넉살이 더 늘어났네?”
“그렇습니까? 하하.”
“그래. 처음 봤을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자긴 변함이 없어서 참 좋아.”
이지연 작가는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특히 이번 <신의 이름으로>가 제작사 ‘붉은달’이 부도날 위기라는 걸 알려 준 탓에 또다시 드라마가 엎어질 뻔한 걸 막은 까닭이다.
그렇게 이지연 작가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주영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윤호 오빠. 나 달라진 데 없어요?”
달라진 데가 없냐고?
순간 싸우자고 말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내 머리는 반사적으로 적절한 대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잘랐다?
아냐 그건 너무 쉬운 대답이니 함정일 것 같고.
혹시 18K로 된 실처럼 가는 체인 십자 귀걸이인가?
아니면 평소에는 안 하던 샤넬 정장에 달린 브로치?
대체 어떤 게 정답인지 몰라 골몰하는 사이 번뜩하고 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주영인과 얽히면 자꾸만 내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대답을 바라는 주영인을 향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했다.
“머리하셨네요.”
싸우자 주영인!
곧이어 튀어나올 날카로운 말을 기다렸건만 주영인이 아이처럼 기뻐하며 손뼉을 친다.
“우와! 역시 알아보실 줄 알았어요!”
뭐지 이 반응?
설마 이런 쉬운 게 정답이었어?
어처구니가 없어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손등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주영인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한다.
“저 이번 드라마에 목숨 걸었어요!”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영인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래. 유노~ 그동안 영인이가 많이 바뀌었어. 날 찾아와서 글쎄 자신의 캐릭터를 더 강하게 살려보겠다며 숏컷을 하겠다지 뭐야? 하지만 여배우 머리를 숏컷으로 칠 수야 있나. 그래서 단발로 합의 봤어.”
‘영인이······라고?’
주영인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이지연 작가가 주영인의 이름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얘 쟤 걔 하시더니.
자존심을 죽여가며 매달려 독하게 배역을 따내더니 결국 이지연 작가에게 ‘배우’라는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런데 자신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탓일까?
주영인은 샐쭉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치. 뭐야. 이만큼 진심으로 배역에 올인하는데 칭찬 같은 거 안 해줘요?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섭섭하게.”
“아 예. 축하드립니다.”
“완전 영혼 없는 축하다 진짜. 뭐 그게 오빠답긴 하지만.”
주영인이 키득거리며 웃자 이지연 작가가 우스갯소리로 사랑 놀음은 그만하란다.
사랑 놀음이라니?
우리 둘은 사랑과 전쟁 시즌 14까지는 찍은 험악한 관계인데!
아니다.
생각을 말자.
농담을 끝낸 이지연 작가가 두리번거리며 유진이를 찾았다.
“그런데 유진은? 어디 있어?”
그 순간 유진이와 미소가 기다렸다는 듯 대기실에서 나왔다.
“작가님!”
시스루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유진이는 마치 미대생처럼 화구통을 등에 메고 있었다.
화구통에는 미소가 덕지덕지 붙여놓은 스티커가 있었고 손잡이에는 파워터프걸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이지연 작가는 ‘청명’이 입고 다니는 스타일로 입은 유진이를 보자 감탄사를 터트렸다.
“유진~ 캐릭터 분석 열심히 했네? 내가 상상하던 청명의 모습 그대로야.”
“정말요?”
“그래. 내가 원하는 딱 그 스탈~ 이야.”
이지연 작가가 원하는 느낌을 찾기 위해 우리 스타일리스트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오늘 예쁘게 찍히는 것만큼이나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지연 작가는 미소에게도 칭찬을 늘어놓았다.
“우리 미소는 꼬마 청명이 되었네?”
“우와! 진짜요?”
꼬마 청명이란 말에 미소는 날 듯이 기뻐했다.
한복 치마를 입은 미소가 한 바퀴 뱅그르르 돌자 이지연 작가는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요 꼬맹이 녀석. 왜 이리 방정맞게 굴어? 호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냉랭한 이지연 작가지만 이상하게도 유진이와 미소에게만큼은 예외였다.
졸지에 외톨이가 된 주영인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작가에게 투정을 부릴 수는 없으니 그 투정은 유진이에게로 향했다.
“정유진. 난 안 보여?”
“어? 영인 선배!”
“선배라니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아.”
그래 하기로 했지.
일이건 남자건 간에 뺏고 뺏기는 사이라는 뜻의 ‘친구’라며?
하지만 미소가 곁에 있었기에 유진이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인사를 받았다.
“하긴 그랬었······지. 넌 잘 지냈어?”
“네가 연락 안 해주는 것만 빼면 뭐. 잘 지냈지.”
어색한 인사가 끝나자 주영인은 미소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미소야 안녕? 난 너희 엄마랑 친구야.”
주영인이 적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미소는 주영인을 빤히 보다 유진이의 치마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미소야 왜?”
미소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입을 꾹 다문다.
‘왜 저러지?’
순간 주영인이 내민 손이 어색해졌다.
“호호호. 애가 낯을 많이 가리네······”
미소가 낯을 가린다고?
인싸 오브 인싸인 도란희와 이영진보다 사귐성이 좋은 미소가?
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안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보다.
그때였다.
“5분 뒤에 입장하셔야 합니다.”
진행요원들이 다가와 제작 발표회가 곧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네!”
진행요원들의 말을 듣고 대연회장의 입구로 향했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신의 이름으로>가 시작될 순간이다.
난 들떠 있는 유진이와 미소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대연회장 입구로 들어가는 곳까지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곁에서 따라오던 주영인이 내 쪽을 힐끔거렸지만 내 손은 두 개뿐이라 유진이와 미소를 에스코트하기도 바빴다.
제작 발표회가 열리는 대연회장으로 유진이와 미소가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방향을 돌려 뒤쪽 스태프 출입구를 통해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연회장으로 들어선 순간.
제작발표회장에는 있으면 안 되는 한 사람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저 인간이 여기 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