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2화
182. 연기란?
‘연기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면 각양각색의 대답이 나온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이라든지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인물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이라든지.
그렇게 연기의 정의가 다르듯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도 제각각이다.
캐릭터 분석을 철저히 해서라든지 대본상의 캐릭터와 같은 경험을 해보려고 한다든지 등등.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사람들이 있다.
특출한 극소수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낸다.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미소는 자신의 재능을 내 눈앞에서 꽃피우고 있었다.
미소는 파워터프걸 인형이 꽂힌 색연필을 마치 무당이 쓰는 무구처럼 흔들어댔다.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춤을 추는데 어찌나 흥겨운지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미소는 소파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 엄마?』
현재 미소가 연기하는 건 귀신과 놀면서 굿을 하다 ‘만신 월아’에게 들킨 씬이었다.
극 중 자신의 딸은 무당이 되지 않기를 바라던 ‘만신 월아’는 딸 역시 자신처럼 귀신과 소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만신 월아’는 어린 ‘청명’에게 두 번 다시는 굿을 따라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해뒀었다.
하지만 친구가 없었던 어린 ‘청명’은 귀신과 다시 한번 놀다가 걸려버렸다는 설정이다.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귀신님들이랑 안 놀게요.』
속삭이듯 말한 미소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그리고 그 여린 어깨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래로 내리깐 미소 눈에는 슬픔이 가득 차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미소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난 엄마만 있으면 돼요. 네? 귀신님은 없어도 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세요.』
고개를 들어 올린 미소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순간 미소는 조그마한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엄마. 나······ 버리지 마세요. 착하게 있을게요. 말 잘 들을게요. 네? 엄마. 제발······.』
미소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겁을 먹은 목소리에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난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보육원에서 살 때.
자신을 버리려는 부모에게 매달려 간곡히 빌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착하게 살겠다고.
엄마 말 잘 듣겠다고.
아빠 말 잘 듣겠다고.
그러니까 제발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버려지던 아이들은 얼굴이 온통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보육원 입구의 흙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곤 했었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를 뒤도 보지 않고 떠밀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머리를 감싸자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솟아 올랐다.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와락 껴안아 버렸다.
“미 미소야. 삼촌은 미소 절대 안 버려! 내가 우리 미소를 어떻게 구했는데······.”
분명 연기를 하던 도중이었는데.
아차 하는 순간 연기와 현실을 분간하지 못했다.
품에 안긴 미소의 온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지만 내가 고작 7살의 연기에 홀렸다고?
‘이래서야 매니저 자격 미달인데······ 아니지. 미소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런 거야.’
품에 안은 미소의 등을 토닥이며 합리화를 시전했다.
미소 역시 몰입에서 깨어나 내 등을 토닥였다.
“응! 삼촌! 나 삼촌이랑 안 헤어져!”
그때였다.
미소가 고개를 갸웃한다.
“어? 삼촌 운다. 왜 울어요?”
눈물을 흘렸다고?
내 눈가에 손을 대 보니 미소 말대로 눈물이 묻어 나왔다.
“아 이건······ 미소 때문이야.”
“나 때문에? 왜요?”
“미소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헤헤헤. 진짜요?”
진심으로 칭찬하자 미소가 웃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 역시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짓궂은 장난이 치고 싶었다.
“미소야. 울다가 웃으면 응꼬에 털 나는 거 몰라?”
“거짓말! 안 나는 거 다 알거든요! 나 이제 7살이에요!”
미소가 콧김을 뿜뿜 내뿜으며 손가락 7개를 폈다.
많이 컸구나 우리 미소.
우린 그렇게 부둥켜안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며 감정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김수희 선생님과 유진이가 나와서 어이없이 쳐다보는 걸 깨닫기 직전까지 말이다.
* * *
김수희 선생님이 날 보며 낄낄거리며 웃는다.
“애잔하다 애잔해. 무슨 이산가족 상봉했어?”
“아 아······ 그게요······.”
미소 연기를 보고 울었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창피해서.
회귀한 나이로는 27살이지만 내 실제 나이는 37살.
고작 7살짜리 아역의 연기를 보고 울었다는 걸 어떻게 말하냐고.
하지만 진실은 밝혀지는 법.
내 품에서 떠난 미소가 엄마한테 안겨 미주알고주알 떠벌이기 시작했다.
“엄마. 삼촌이 내가 연기하는 거 보고 가슴 아파했어. 그래서 삼촌이 울었어. 그래서 나도 가슴이 아파서 울었어.”
아 또 울고 싶다.
우리 미소 어찌나 요약을 잘하는지.
유진이가 날 쳐다보며 씩 하고 웃는다.
“오빠. 우리 미소 연기 잘하죠?”
“어. 완전! 대박! 리얼~ 진심~ 짱이야!”
내가 아는 모든 단어를 섞어 과장되게 표현했다.
유진이와 미소의 얼굴이 해맑게 변한다.
김수희 선생님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나 딸이나······. 똑같구나. 유진이도 그만 하산해도 될 거 같던데.”
다시 말해 유진이의 노인 연기가 김수희 선생님을 만족시킬 수준에 이르렀단 소리였다.
그래서 레슨을 일찍 끝내고 나와 미소와 내가 얼싸안고 우는 걸 본 거였고.
“원래는 밥 먹을 시간도 없었는데 시간이 생겼네. 맛있는 거 먹을까? 내가 쏠게.”
하지만 유진이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그냥 라면 끓여 먹어요. 시키면 비싸잖아요.”
김수희 선생님에게 배달 음식은 비싸니까 라면 먹자 말할 사람은 대한민국에 유진이 혼자뿐일 거다.
아니 대부분은 아예 무서워서 말도 못 걸 테지.
하지만 그동안 친해졌는지 김수희 선생님은 유진이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면? 으흠. 가끔은 라면도 괜찮지. 근데 집에 라면이 있나 모르겠네?”
“있어요. 일하시는 아줌마가 천장에 늘 몇 개 놔둔다고 하셨거든요.”
“언제 또 안성댁이랑 친해졌어?”
“첫날부터요. 그러면 제가 할게요. 저 라면 진짜 잘 끓이거든요.”
김수희 선생님이 못 말린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사이 미소는 유진이에게 쪼르로 달려가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엄마 나도! 나도 라면 끓일 거야!”
“그래. 그럼 우리 미소는 엄마 도와줄래?”
“응!”
두 사람은 신나서 선생님의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김수희 선생님이 갑자기 거실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앞마당을 가리켰다.
“정 팀장. 저기서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지?”
* * *
주방에서 유진이와 미소가 라면을 끓이는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싶었다.
하지만 김수희 선생님은 생각보다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네.”
잠시 침묵하던 김수희 선생님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정 팀장. 유진이 감당할 수 있겠어?”
“감당할 수 있겠냐······뇨?”
“정 팀장이 아직 경력이 부족해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굴렁쇠에서 유진이 케어 못해. 내가 자기들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굴렁쇠는 아직 소속 배우를 칸 영화제나 베를린영화제에 내보낸 경험이 없잖아.”
김수희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자신이 유진이의 성공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당장은 아냐. 충분한 경력을 쌓은 후의 일이겠지. 하지만 유진이의 재능이라면 충분히 노려볼 수 있어.”
김수희 선생님은 유진이의 재능을 보호해 주려고 한다는 걸 밝혔다.
“그래서 말인데······ 온리원 액터즈 알지?”
“네.”
김수희 선생님이 고문으로 있는 온리원 액터즈는 배우 전문 관리회사였다.
회사 내에 연기 레슨 커리큘럼이 잘 잡혀 있고 배우 케어도 좋아 앞으로 5년 뒤 관련 분야의 1위가 된다.
충실히 기본기를 다진 배우들을 길러내며 아시아 시장을 노리는 할리우드의 대형 배급사들이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로 손꼽을 정도가 되고.
그리고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진도현이 소속된 곳이기도 하다.
“정 팀장이 두 사람이랑 함께 온리원으로 오는 건 어때? 유진이를 칸에 보내려면 지금부터라도 세심하게 필모 관리를 해야 해. 강 대표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김수희 선생님의 우려와 걱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무 고마운 말이었지만 김수희 선생님이 오해하는 게 있었다.
재능이라는 건 길러지거나 연습으로 발현되는 게 아니다.
애당초 타고나는 거지.
그리고 그 재능을 엮어 스타로 키워내는 능력은 온리원 전체를 다 합해도 내가 더 낫다.
회귀 전에도 한국 최고의 필모 관리 능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진이의 실력에 관해 완벽한 이해까지 한 상황이니까.
걱정하는 김수희 선생님에게 미소를 보였다.
“선생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옮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김수희 선생님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정 팀장. 오해하지 마. 내가 유진이를 데리고 가서 돈이나 벌겠다고 빼 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압니다. 선생님의 깊으신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굴렁쇠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거긴 액터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잖아.”
배우에 대한 존중이라.
그래서 온리원 액터즈는 안 된다.
작품성만 따라가는 회사라 대중적 인기와는 떨어진 선택을 자주 하니까.
하지만 유진이가 바라는 건 작품성에 치우친 게 아니었다.
-오빠. 저 조금은 제가 하고 싶은 걸 알 것 같아요.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모습을 미소한테 보여주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대중성이 유진이에겐 더 우선이었다.
물론 반쯤은 미소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지만.
그래도 진일보한 그녀의 인생 계획을 어떻게든 지켜 주고 싶었다.
어차피 이대로 연기하다 보면 김수희 선생님이 말하는 상은 언제든 받을 수도 있는 거니까.
“마음만 받겠습니다. 선생님.”
“어휴. 답답해. 도대체 왜 안 간다는 건데?”
발을 동동 굴리는 김수희 선생님에게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굴렁쇠는 유진이를 키울 능력이 안 되지만 전 할 수 있습니다.”
“정 팀장이 직접······ 유진이를 대배우로 만들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지금은 설명할 자신이 없네요. 그냥 지켜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회귀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배우가 아닌 내가 김수희 선생님을 설득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단 한 가지.
자신감을 내보이는 수밖에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만큼 유진이를 잘 이해하고 케어할 매니저는 없습니다.”
그때 통유리창 너머로 불안해하는 유진이의 얼굴이 보였다.
‘라면 다 끓였는데 언제 이야기 끝나요?’라는 표정이다.
저 눈빛을 알아채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 생각을 하자 조금 더 자신이 생겼다.
내 단호한 태도에 김수희 선생님이 한숨을 내쉰다.
“알겠어. 하지만 굴렁쇠가 돈벌이에 급급해 유진이를 함부로 굴린다 싶으면 그땐 내 말 들어. 알았지?”
사실 돈벌이에 관심이 더 많은 건 회사보단 유진이 본인인데.
물론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는 아니다.
“예. 선생님.”
“원석 같은 배우야. 나쁜 버릇 들지 않게 애지중지 키워줘. 앞으로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당연히 그럴 겁니다.”
그때였다.
유진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통유리창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라면이 분다며 마치 시한폭탄이 터지기 5초 전의 표정을 지은 채로.
그사이 미소는 그 와중에 테이블과 유진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라면이 불었는지를 체크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선생님. 그나저나 제 배우들은 당장은 라면이 부는 게 더 걱정인 거 같은데요?”
김수희 선생님이 유리창을 통해 거실을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풋. 쟤들 뭐 하는 거야?”
“언제 들어오나 궁금해하는 거 같아요. 라면 다 됐다면서요.”
“그래. 어서 들어가자. 난 내 제자한테 미움받기 싫거든.”
유진이와 있으면서 많이 유해진 김수희 선생이었다.
그런데 현관으로 막 들어가던 도중.
김수희 선생님이 짓궂은 표정으로 말한다.
“실은 유진이한테도 슬쩍 떠봤더니 자기는 정 팀장 떠나서는 배우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더라고. 차라리 버거퀸에서 일하고 말겠다나?”
스치듯 지나가듯 말한 한마디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매니저로서 배우에게 선택받은 것만큼 듣기 좋은 말은 없다.
매니저는 연예인이 있어야 완성되는 직업이었으니까.
“듣기 좋네요.”
“그래. 그러라고 한 말이야.”
후루룩!
살짝 라면 면발이 불긴 했지만 행복의 맛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 *
드디어 <신의 이름으로>의 제작 발표회 날이 밝았다.
오전 9시.
나는 일행들을 데리고 제작 발표회가 펼쳐지는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도착했다.
“유진아. 긴장 풀고.”
“간장이요?”
장난을 치는 걸 보면 전혀 긴장한 기색이 아니다.
역시 미래의 대배우.
개그는 좀 못하지만 그럼 어때?
내 배운데.
<신의 이름으로>에서 극 중 여대생 무당 ‘청명’ 역할은 주연급 조연이다.
미소가 맡은 ‘청명’ 아역도 회상 장면에서 종종 나오게 되는 꽤 중요한 역할이고.
“그래. 그러면 우리 힘내서 가볼까?”
미소가 두 손을 가슴에 X자로 모았다.
그걸 할 셈이군.
“그러면 미소가 먼저 외쳐. 그러면 삼촌이랑 엄마가 따라 할게.”
들뜬 미소가 알겠다며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파워터프!”
미소의 선창에 유진이와 난 힘차게 미소를 따라 했다.
“파워터프!”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차에서 내린 우린 곧장 대기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퀭한 얼굴로 우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