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1화
181. <경계 너머로> 현장 3
<경계 너머로>의 촬영이 끝난 회식 자리.
배우 테이블과는 고작 1m밖에 떨어지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조리 들을 수가 있었다.
어디서 깨를 볶는지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난다.
덕분에 최양섭을 엿 먹일 방법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태풍이 백윤성과 배우들의 인정을 받아버렸는데 나서봐야 괜히 악영향만 있으니까.
이미 최양섭의 체면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었고.
그런데 그때 내 왼쪽에 앉은 최성문 감독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역시 백 선생님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상추에 마늘 고기를 올려 꼼꼼히 쌈을 싸던 표은미 실장도 그 말에 동의했다.
“당연하죠. 백 선생님이신데. 그나저나 감독님. 우리 태풍 씨 연기 너~무 많이 좋아진 거 같지 않아요?”
표은미 실장이 들으라는 듯 외쳤다.
“암. 그렇지. 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안 했군.”
그 순간 최성문 감독은 표은미 실장과 날 번갈아 보며 감사 인사를 해왔다.
“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주연으로 태풍이를 고를 생각을 못 했을 것 같아. 고마워.”
“아닙니다. 존경하는 최성문 감독님 작품이라 저희 태풍이도 저렇게 이를 악물고 하는 겁니다. 동기부여를 잘해주신 감독님 덕분입니다.”
겸손을 떨었더니 최성문 감독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다.
“그런가? 허허. 빈말이라도 듣기엔 좋군그래.”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최성문 감독이 이찬동 실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날 대할 때와는 달리 살벌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 실장. 에이스 엔터는 배우 관리 좀 잘해야겠어.”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리허설 때 잡아둔 동선도 무시하고 얼굴을 노리는 걸 못 봤어? 만약 태풍이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아 아니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양섭이 체면도 있으니 내가 이번 한 번은 넘어가는데 또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나도 생각이 있으니 그리 알아 둬.”
이찬동 실장이 사색이 되었다.
“가 감독님.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최 배우가 역할에 몰입하다 보니까 조금 과하게 연기를 한 것뿐입니다.”
이찬동 실장이 계속해서 변명을 해대자 술이 얼큰하게 오른 최성문 감독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말대꾸를 싫어하는 그의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잘못했다고 무조건 숙이는 게 상책인데 말이다.
“이 실장! 너 지금 날 상등신으로 보는 거야? 내가 좋게 말하려고 했더니 이게 어디서 따박따박 대들어?”
순간 표은미 실장이 말리고 나섰다.
“어휴. 감독님도 참. 제발 성질 좀 누르세요. 듣는 사람도 많은데······”
하지만 최성문 감독은 한 번 화가 나면 유명 배우들과도 주먹다짐을 꺼리지 않는 독불장군.
표은미 실장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최성문 감독이 배우 테이블로 몸을 돌렸다.
“최양섭! 이리 좀 와 봐!”
묵언 수행을 하듯 잔만 비우던 최양섭이 냉큼 달려왔다.
연기 대상을 받았어도 최성문 감독에게는 그저 일개 배우일 뿐이니까.
최성문 감독이 최양섭을 노려보며 외쳤다.
“너 아까 현장에서 왜 그랬냐? 내가 너 체면도 있고 해서 그냥 넘어갔는데 이찬동 실장 말하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했다.
최성문 감독은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긴 해도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잘못만 인정하면 흔쾌히 넘어가 주니까.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 최양섭은 모르쇠로 나왔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가 볼 땐 내 지시를 개무시하고 네 마음대로 영화를 찍던데?”
“그런 적 없습니다. 약간의 애드립이 있긴 했지만 최선이라 생각하는 방향으로 연기했을 뿐입니다.”
뻔뻔한 최양섭의 태도에 최성문 감독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배우나 매니저나 쌍으로 똑같네. 야! 너 당분간 현장에 나오지 마!”
“예?”
“네 얼굴 보면 촬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으니까 현장에 나오지 말라고!”
최양섭도 뒤늦게서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파악하고 사과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게 또 내 말을 개무시하네? 주연 배우 얼굴에 멋대로 생채기를 내고 사과 한마디를 안 한 주제에 뭐? 새X가 날 개X으로 보나!”
그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이찬동 실장이 급히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화끈한 감독 갑질은 오랜만에 본다.
그제야 최양섭도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감독님.”
“감독님. 제 제가 감정 절제를 못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최성문 감독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무릎은 왜 꿇어? 끝까지 날 등신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다 이거지? 당장 꺼져! 아니다. 그냥 내 영화에서 나갈래? 아까 그 씬 죽을 뻔한 게 아니라 그냥 죽은 거로 치자. 응?”
최성문 감독의 얼굴이 핵불닭볶음면 2개를 먹은 듯 달아오르는 순간 표은미 실장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팬덤을 가진 대형 스타와 관계가 엉망이 되는 건 큰 손해다.
특히 최양섭 정도의 스타를 내쳤다가는 투자자들이 난리를 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표은미 실장이 서둘러 손짓했다.
“두 분! 일단 오늘은 돌아들 가세요! 따로 연락드릴 테니까.”
“아 예. 예.”
두 사람은 연신 눈치를 보다 쫓겨나듯 자리를 떠버렸다.
어차피 이틀 정도면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겠지만 연기 대상 출신의 최양섭이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봤을까.
한참이나 씩씩대던 최성문 감독이 소주잔에 찰랑하게 담긴 소주를 원샷 해버렸다.
“기 싸움도 적당히 해야지. 작은 상 하나 받았으면서 기고만장 꼴하고는······ 누군 상 안 받아봤어?”
씩씩대는 최성문 감독 탓에 회식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대로 회식이 끝나면 오늘 자리를 마련한 효과가 반감된다.
그 탓에 난 이태풍을 거론하며 조심스레 나섰다.
“감독님. 진정하시죠. 태풍이 얼굴의 상처는 하루 이틀이면 없어질 겁니다.”
순간 최성문 감독이 날 힐끗 쳐다본다.
반사적으로 언성을 높이려던 최성문 감독이 가까스로 화를 삭였다.
오늘 회식 자리도 내가 만들었는 데다 속이 상한다고 해도 이태풍의 매니저인 내가 제일 속이 상할 거라는 걸 안 까닭이다.
“흠흠. 그 그러면 천만다행이고.”
최성문 감독의 언성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때다하고 최성문 감독에게 술을 따랐다.
최성문 감독이 내가 준 소주를 원샷 했다.
“크으~”
술잔을 비운 최성문 감독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정 팀장은 화도 안 나나? 자기 배우가 당했는데?”
“이미 백 선생님과 감독님이 혼내 주셨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뭘 더 이야기하겠습니까?”
“이 친구 말하는 것 좀 보게? 이거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였어? ”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뭐? 으하하하. 진짜 그런 거였어?”
날 잠깐 쳐다보던 최성문 감독이 급기야 너털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싸늘했던 회식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웃음을 그친 최성문 감독이 좌중을 보며 술잔을 치켜들었다.
“내가 못 볼 꼴을 보였군. 미안해 다들.”
“아닙니다! 감독님!”
“흠흠. 자자 다들 지나간 일은 잊고. 오늘 여기 정 팀장이 거하게 쐈는데······ 한마디 들어야겠지?”
“예! 감독님!”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환호하며 날 일으켜 세웠다.
소주잔을 든 채 일어난 나는 선창으로 외칠 말을 골라야 했다.
어떤 말을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나올 말은 단 하나였다.
“그러면 제가 선창을 하겠습니다.”
바로 ‘위하여’를 따라 하겠다는 직원들을 보며 힘차게 외쳤다.
“천만 관객 돌파를~”
순간 배우와 스태프 너나 할 것 없이 환호를 지른다.
“오오오~~”
“이야. 대번에 천만을 불러?”
“휘유. 정 팀장. 배포가 장난 아닌데?”
스태프들의 환호에 최성문 감독이 피식 웃는다.
“위하여를 바로 외쳐야지 오오는 뭐야. 다시!”
분위기가 약간 어수선해졌기에 조금 전보다 두 배 큰 목소리로 힘차게 외쳤다.
“‘경계 너머로’의 천만 관객 돌파를~”
연이어 삼겹살집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대답이 이어졌다.
“위하여!”
* * *
관리하는 스타가 늘어나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진이는 일주일에 두 번씩 노인정을 다니며 배역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고 있었다.
이제 차기작 <신의 이름으로>를 공개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김수희 선생님께 유진이의 연습 성과를 확인해 보겠다는 연락을 받은 나는 급히 집으로 차를 돌렸다.
그런데 아침에는 보이지 않던 경비원 차림을 한 네 명의 남자가 대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왔네.’
검은 정장을 입은 네 사람의 가슴팍에는 ADD 캡스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집에는 CCTV가 있었지만 최근 들어 몇몇 사생팬들이 집 앞을 떠나지 않고 서성이기에 보안을 더욱 강화하면서 온 사람들이다.
경호 때문에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갈까도 싶었지만 유진이는 차라리 경호비를 내겠노라 대답했다.
주인아줌마와 떨어지기 싫다면서 말이다.
집 쪽 주차장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 두 사람이 날 막아 세웠다.
“신분증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운전석 창문을 열어 신분증을 내밀자 30대 후반의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정 팀장님. 백석만 팀장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백 팀장님. 별일은 없었나요?”
“기자들 두세 명 정도랑 사생팬들이 왔었는데 좋은 말로 돌려보냈습니다.”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혹시 과격한 방법을 쓴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닙니다. 유진 씨나 미소 양에게 직접적인 위해가 없으면 과잉 경호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네 명이나 왔습니까?”
유진이의 경호는 ADD 캡스에서 2인 1조로 맡기로 했다.
주간에는 사람이.
야간에는 무인 감시를 하다가 긴급사항이 터지면 2분 안에 근처 ADD 캡스에서 달려올 예정이었고.
“오늘은 2층이랑 3층 리모델링 때문에 들락거리는 인부들 관리 문제도 있어서 인원을 늘렸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앞으로도 우리 유진이와 미소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경호원들과 인사를 한 나는 집에 있는 주차장 안으로 차를 몰았다.
* * *
하루와 함께 이사하면서 옥탑방인 3층을 리모델링 할 계획이었는데 주인아줌마가 욕심을 부려 아예 집 전체를 손을 보고 있었다.
주인아줌마와도 인사를 나누는 사이 유진이와 미소가 김수희 선생님네 집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자 그럼 갈까?”
“네!”
벤츠 스프린터 2호 차에 두 사람을 태우고 곧장 김수희 선생님 집으로 향했다.
김수희 선생님이 우릴 반기더니 오늘 처음 데려온 미소를 빤히 쳐다본다.
“얘가 미소로구나.”
미소가 김수희 선생님을 보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리라 유치원 정미소입니다! 엄마 혼내지 마세요. 선생님!”
미소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인사와 요구를 동시에 한다.
미소의 당돌한 모습에 김수희 선생님의 얼굴에 웃음이 언뜻 스쳤다.
“얘가 아주 똑똑하네. 그런데 우리 미소도 연기하기로 했다지?”
“네! 선생님.”
“열심히 준비하렴?”
김수희 선생님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격려를 하자 미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김수희 선생님이 유진이를 향해 재촉했다.
“나 오늘 시간 별로 없으니까 빨리 올라가자. 유진아.”
“네. 선생님.”
유진이는 2층으로 레슨을 받으러 가기 전 미소에게 말했다.
“미소야. 장난치지 말고 삼촌이랑 얌전히 있어야 해. 알지?”
“응! 엄마!”
유진이는 미소의 대답을 듣자마자 선생님과 함께 2층으로 향했다.
그사이 난 미소의 가방에서 그림 그리기 도구를 꺼냈다.
테이블에 펼쳐놓고 그림을 그려보자 했지만 평소와 달리 미소는 2층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미소야. 왜? 그림 그리기 싫어?”
“나도 연기하고 싶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떤 연기를 하고 싶냐 물었다.
“아무거나요! 엄마 연기하는 거 보고 있으면 기분이 대땅 좋거든요.”
미소는 연기 그 자체가 좋다고 대답했다.
“그래?”
“삼촌. 미소 연기 보고 싶지 않아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미소는 내 앞에 자리했다.
그동안 미소의 연기 지도는 철저히 유진이가 맡아서 하고 있었다.
연기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웠지만 덕분에 미소는 다른 아역들과 달리 연기를 한다는 두려움이 없었다.
아역 오디션장에서 연기를 본 뒤로는 미소의 연기를 본 적이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면 우리 미소 연기가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볼까?”
“네!”
미소가 두 손을 모으고는 고개를 끄덕한다.
준비되었다는 신호인가 보다.
눈 한쪽을 찡긋하기에 마치 감독이 된 것처럼 신호를 보냈다.
“레디~ 액션!”
미소는 길게 숨을 들이쉬더니 순식간에 자신이 맡을 어린 ‘청명’으로 빙의했다.
그 순간 난 입을 쩍 하고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