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9화
179. <경계 너머로> 현장 1
“저게 뭡니까? 태풍이가 왜 백윤성 선생님을 업고 있는 거죠?”
<경계 너머로>는 한국의 특수요원이 북한에 있는 핵물리학자의 가족들을 서울로 탈출시키는 과정을 그린 액션물이다.
이태풍은 북한군 ‘최인솔 소좌’로 위장해 평양에서 서울까지 탈출극을 벌인다.
그리고 지금은 세트장 안에 있는 야산에서 한국 입항 전 마지막 추격 씬을 찍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태풍의 등에는 북한의 천재과학자 ‘단명한’ 역을 맡은 백윤성 배우가 업혀 있었다.
험한 산길을 그냥 걸어 올라가는 것도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 사람을 업고 있다고?
깜짝 놀라서 표은미 실장에게 물었다.
이건 대본에도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아 오전 촬영 중에 백윤성 선생님께서 발목을 살짝 삐었거든요. 그래서 급히 대본이 수정되었데요.”
“혹시······ 감독님이 지시한 겁니까?”
“그럴 리가요. 이태풍 씨가 촬영 끊기는 게 싫다고 자원한 거예요.”
표은미 기획 실장은 쉬지 않고 이태풍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수풀이 우거지고 경사가 가파른 산길이다.
양손으로 사람을 업고 가다가 미끄러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나중에 잔소리 한 사발을 안겨줘야 할 거 같다.
“그런데 정 팀장님. 혹시 태풍 씨. 무술 같은 거 배웠어요? 몸 쓰는 게 예사롭지 않던데요?”
“태풍이가 원래 몸은 잘 썼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술 감독님께서도 태풍 씨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하시던데.”
“아 그건 영화 촬영 전에 액션 스쿨에서 미리 트레이닝 시켰습니다. 최 감독님 작품에 나오는데 대충 나올 수야 있나요.”
순간 표은미 실장의 얼굴이 밝아진다.
“어쩐지 남다르더라. 덕분에 감독님이 엄청 좋아하셨어요. 합 맞추기도 좋다면서요.”
액션 연기는 인정을 받았다는 거군.
“그러면 태풍이 발성이랑 감정 연기는 어떻던가요? 오디션 때보다는 좋아졌다고 들었는데요.”
“호호호. 이따가 직접 한번 보세요.”
표은미 실장은 마치 아들을 자랑하는 엄마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순간 태풍이 연기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 * *
“커트~! 수고했습니다!”
최성문 감독의 커트 소리에 이태풍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헉.”
등에 업혀 있던 백윤성이 이태풍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태풍아. 힘들게 업고 있지 말고 어서 내려라.”
“아 예. 선생님.”
이태풍이 야산의 등걸 앞에 백윤성을 내려놓았다.
백윤성은 앞선 촬영에서 발목을 접질렸지만 촬영이 끝나야 치료를 받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심지어 스포츠 테이핑을 하고 직접 움직이려 했기에 이태풍이 나섰다.
-감독님. 제가 백윤성 선생님을 등에 업고 움직이면 안 되겠습니까? 시나리오 전개와도 그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힘들 텐데. 사람을 업고 산을 오르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괜찮습니다. 그리고 대본을 몇 번이나 봤지만 업는 쪽이 더 그림이 좋게 나올 것 같기도 하고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후배가 몸을 아끼지 않고 해보겠다는데 뺄 수야 있나. 우리 최 감독님이 오더만 내리면 한번 해보지 뭐.
그렇게 최성문 감독은 이태풍의 요구를 승낙했었다.
그 이유로 백윤성은 이렇게 계속 업혀 산을 타는 중이었다.
백윤성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 때문에 힘들지?”
“아닙니다. 선생님. 오히려 극 중 인물에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 상황이 우리 영화 속 상황이랑 똑같구나. 그렇지?”
백윤성의 너스레에 이태풍이 씩 하고 웃는다.
백윤성은 한때는 CF용 배우를 주연으로 삼았다는 생각에 이태풍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촬영이 이어질수록 일취월장하는 이태풍의 연기력에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의 진심 어린 행동에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있었다.
특히 오늘같이 자신이 다리를 다친 순간 먼저 나선 행동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백윤성은 마치 샤워라도 한 듯 등이 흠뻑 젖은 이태풍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봤다.
무려 10번이나 자신을 업고서 야산을 뛰어올라 숨이 턱까지 올라올 텐데도 이태풍은 단 한 번의 불평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얼굴에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백윤성은 자신이 그동안 고리타분한 선입견을 품었다는 걸 인정했다.
‘얼굴만이 아니야.’
백윤성은 자기 눈앞에 있는 배우가 진짜배기 배우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미안한 마음이 든 백윤성은 한때 자기처럼 아직도 이태풍을 주연으로 인정하지 않는 다른 배우들을 납득시킬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태풍아. 이다음이 양섭이랑 일 대 일 격투씬이지?”
“예. 선생님.”
“그거 롱테이크로 한 방에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예? 제가 어떻게 감히······”
“왜? 못 하겠어?”
이번 작품의 주연을 노렸던 ‘최양섭’은 오디션에서 떨어진 이후에도 어떻게든 최성문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극 중 최고의 악역인 북한군 ‘강일록 대좌’ 역에 캐스팅이 되었다.
재작년 연기 대상 수상자인 최양섭과 연기 대결을 펼치라니.
순간 이태풍의 얼굴에 이제까지 없었던 망설임이 나타났다.
거기다 롱테이크는 한번 실수를 하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
부담감이 어깨를 누르자 이태풍이 주저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백윤성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찬다.
“난독증도 극복한 녀석이 뭘 그리 겁내? NG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권하는 대로 한번 해봐.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이태풍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순간 백윤성은 손을 들어 근처에 있던 스태프를 불렀다.
“영민아. 무전기 좀 줘.”
“예. 선생님.”
조영민 AD가 들고 있던 무전기를 건넸다.
백윤성이 무전기를 쥐고 말했다.
“최 감독. 다음 씬. 태풍이랑 양섭이. 컷 없이 한 큐에 찍어 보는 게 어때?”
-롱테이크로요?
“어. 자네도 내가 연출자 영역을 존중하는 건 알지?
-예. 선생님.
“그래도 오늘은 부탁 좀 하자고. 태풍이를 너무 고생시킨 게 미안해서 주연 대접도 한번 해주고 싶고.”
-흐음······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괜찮을까요? 힘든 건 둘째 치고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배우들이 하겠다고 하면?”
-그러면야 저야 좋죠.
“그럼 됐어. 두 사람은 내가 설득하지.”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죠.
최성문 감독이 흔쾌히 허락을 내린 순간 현장의 스태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최성문 감독이 갑작스러운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 번에 갈 거야. 앵글 따로 안 잡고 갈 거니까 한 번에 가야 해. 카메라 3대 더 설치하고 조명들 멀리서 쏴 줘. 앵글 안에 다른 카메라랑 조명 겹치게 나와도 CG로 지우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여러 대 써!”
“예! 감독님.”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카메라와 조명들을 야산에 추가로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번 촬영은 한바탕 격투를 벌이며 연기 대결을 하는 씬.
그런데 다섯 컷으로 끊어서 촬영하려던 계획이 갑작스레 변경되었단다.
“갑자기 왜요?”
“잠시만요. 저도 한번 알아볼게요.”
무전기로 상황을 파악한 표은미 실장이 이내 설명을 시작했다.
“다음 씬을 롱테이크로 간다네요.”
지금부터 펼칠 연기는 무려 5분간.
숨 막히는 액션을 펼치면서 감정 연기도 해야 하는 극한 난이도의 촬영이다.
그걸 롱테이크로 한 방에 간다고?
“태풍이가 찬성했답니까?”
“예. 백 선생님이 태풍 씨를 띄워주고 싶다고 해서 받아들였다는데······ 하아 양섭 씨랑 연기 대결이 될까? 이거 어려운데.”
재작년 연기 대상 수상자와의 연기 대결이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아귀에 진땀이 고여 축축해졌다.
일반적인 연기라면 이태풍이 최양섭에게 밀릴 이유는 없다.
최양섭은 본인의 능력보다 작품 보는 눈이 좋은 이른바 촉이 좋은 배우다.
연기 대상도 워낙에 좋은 역을 잡았기에 탈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5분짜리 롱테이크는 차원이 달랐다.
완급 조절을 해가면서 5분간 쉼 없이 연기를 펼쳐야 했기에 경험이 많은 최양섭이 훨씬 더 유리했다.
‘태풍이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표은미 실장이 날 향해 재촉한다.
“이럴 게 아니라 천막으로 가서 감독님 뵙고 우리도 곁에서 같이 봐요.”
스태프들이 촬영 준비를 하는 중이었기에 아직 촬영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최성문 감독이 있는 천막에는 모니터링용 디스플레이가 있으니 이태풍의 연기를 확실히 볼 수 있다면서.
“예. 바로 가시죠.”
난 표은미 실장을 따라 급히 산을 뛰어올랐다.
* * *
최성문 감독과 인사한 뒤 현장에 미리 와 있던 이대호 매니저와 인사를 나눴다.
“팀장님 오셨어요?”
“예. 태풍이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까 중간에 확인했는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대호 매니저는 연이어 이태풍의 말도 전했다.
“아 그리고 태풍이도 팀장님 오시면 자긴 괜찮다고 꼭 좀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잘할 수 있다고요.”
“하여간 걱정시켜놓고 말은 청산유수네요.”
이대호 매니저가 머리를 긁적인다.
“일단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신경 써 주세요.”
“예. 팀장님.”
그 뒤로 최성문 감독의 뒤에서 모니터링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잠시 후 스태프들이 오케이 사인을 주자 최성문 감독이 마이크를 붙잡고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다.
“자! 씬 83. 특수요원 최성하와 강일록 대좌의 격투씬. 다치지 않게 긴장들 하자!”
스태프들이 멀찍이 떨어진 채 긴장하기 시작했다.
롱테이크 연기를 펼치는 이상 감독의 컷이 없으면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니터로 여러 번 구도를 확인한 최성문 감독이 드디어 확성기를 들었다.
“컷 할 때까지는 아무도 끼어들지 말고. 자~ 한 방에 갑니다. 레디~ 액션!”
그와 동시에 최양섭이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죽으라! 이 반동 새끼!』
최양섭이 살벌한 표정을 짓고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양섭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게 연기라고?
턱도 없는 소리였다.
* * *
원래 액션 연기는 서로 다치지 않기 위해 미리 리허설을 하고 촬영한다.
일반적인 연기와는 달리 액션 연기에서 돌발적인 행동을 하다가는 둘 중 한 명이 크게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연기와 달리 액션 연기에는 절대 애드립을 하지 않는다.
합을 맞추지 않은 동작은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양섭은 약속되지 않은 궤도로 주먹을 내뻗었다.
최양섭의 멋대로 된 움직임에 이대로 촬영이 끝나나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태풍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최양섭의 공격을 온전히 막아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촬영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태풍은 연이어 눈앞으로 날아든 펀치와 발차기를 침착하게 피했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의 손과 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빡!
옷에서 먼지가 풀썩일 정도의 충돌이 일어났다.
팔뚝과 종아리를 감싸는 보호대를 착용시켜 놓았지만 혹시라도 다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꼭 쥔 두 손는 땀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최양섭이 페인트 동작으로 이태풍을 속인 뒤 발차기를 얼굴에 날렸다.
팍!
이태풍이 급하게 얼굴을 돌렸지만 매서운 발차기에 얼굴이 쓸려버렸다.
순간 이태풍의 광대 쪽이 발갛게 변했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피부가 살짝 까진 것 같다.
‘저게 감히!’
촬영 중 언제든 사고는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리허설대로 안 해서 발생한 거라면 전혀 이야기가 다르지.
‘최양섭. 감히 내 배우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 당장이라도 최양섭을 바닥에 때려 눕혀버리고 싶다.
현장을 지켜보던 이대호 매니저도 기가 막히는지 울분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다.
하지만 감독과 같은 천막 안에 있었기에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껏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늘 최양섭을 따라온 이찬동 실장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이거 설마 처음부터 작정한 거 아냐?’
주연 얼굴은 영화의 간판이다.
다른 현장 다른 감독이었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촬영에 클레임을 걸고 그대로 철수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면 주연에게 피해를 준 배우는 엿을 먹을 거고.
하지만 이 영화는 거장 최성문 감독의 영화.
이태풍이 그토록 원하던 작품이라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최양섭. 있다가 회식 때 보자.’
최양섭을 엿 먹일 방법이 수백 가지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와중에도 이태풍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거다.
‘배우 다 됐네. 우리 태풍이.’
한편으로 뿌듯함이 올라왔다.
그사이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 최양섭이 잠깐 거리를 벌려 자세를 고쳐잡았다.
『날래구만 기래.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 있가서?』
『개소리 그만하고 얼른 들어오기오.』
『기래? 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라우.』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 최양섭이 또 한 번 페인트를 걸었다.
이번에도 리허설에 없는 행동이다.
그때였다.
이태풍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깃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