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6화
176. 최만식 1
“최만식 대표가 어떤 제안을 하든 무조건 받아들이세요.”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굴렁쇠 엔터 주주 사인방 중 한 명인 최만식 대표가 날 만나서 할 말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을 텐데?
“혹시 라인을 갈아타라고 해도요?”
강지영 본부장이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라?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데?
“정말······이십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은 정 팀장이 안 다치는 게 중요하니까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녀의 손에 들린 찻잔이 부르르 떨렸다.
잔 안에 든 차의 표면에 잔잔한 파동이 일어났다.
이렇게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자신이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최만식 대표는 결코 가깝게 지낼 사람이 아니니까.
앞으로 1년 후 최만식 대표는 자신을 거두고 길러준 양아버지 최은태 회장을 배신한다.
그 후 김동수와 함께 굴렁쇠 엔터를 쪼개고 탑 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가 되고.
내가 부사장이 된 이후로도 직접 만나본 적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내가 그를 개 같은 인간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비단 양아버지를 배신한 것뿐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씩 신인 여자 아이돌들을 접대 자리에 불러냈으니까.
그 일로 김동수 그 인간과도 얼마나 싸웠던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여자 아이돌들이 뜨기 위해 그 접대 자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는 나서지 않았다.
어쨌건 그토록 최만식 대표는 나와는 상극이다.
예전 생각을 갈무리한 나는 어떤 제안이라도 받아들이라는 강지영 본부장의 제의를 단번에 거절했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강지영 본부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윤호 씨가 잘 몰라서 그러시는데 최만식 대표. 명동 사채 시장에서도 살모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지독한 사람이에요. 괜히 대서다가는 크게 다칠 수도 있어요.”
“대표님 라인을 타면서 다른 라인과의 충돌은 각오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팀의 매출이 팀 중에서는 가장 좋은데 라인 좀 안 탔다고 자르기야 하겠습니까?”
굴렁쇠 엔터의 대주주이자 최만식 대표의 양아버지인 최은태 회장이 건재한 이상 최만식 대표는 아직은 함부로 날 자를 수 없다.
최은태 회장이 서예종 라인을 이끄는 리더라고 하지만 경영 성과를 더 신경 쓰는 사람이란 건 유명한 사실이니까.
그래서 굴렁쇠 엔터의 대표가 같은 서예종 라인의 이기철 이사가 아닌 강감찬 대표인 거고.
그러니 내가 할 건 하나다.
지금처럼 승승장구하는 것.
그러는 동안은 최만식 대표가 날 쳐낼 수는 없다.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후우. 알겠어요. 그러면 저도 그렇게 알고 대비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2개월 정도만 지나면 대표님께서도 돌아오시지 않습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소파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쉰다.
“그때까지 버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최만식 대표라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겠지만 설마 우리 대표님만 할까요?”
너스레를 떨자 강지영 본부장이 피식하고 웃는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회귀해서?
그리고 만약 회사에서 잘린다고 해도 정실모 중 절반은 날 따라 나올 거라는 게 내 믿음의 근간이었다.
“그보다 최만식 대표와 주주분들은 어떤 분들이십니까? 어떤 분들이기에 천하의 본부장님이 그리 긴장을 하는 겁니까?”
회귀 전에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굴렁쇠 엔터 주주 설립과 주주들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 * *
굴렁쇠 엔터의 시작은 왕년의 명배우 정문식이 강감찬 대표와 함께 설립한 1인 기획사였다.
그런데 무명의 정문식 배우가 뛰어난 연기를 바탕으로 점점 인기를 끌게 되자 강감찬 대표는 회사를 확장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때 손을 잡은 사람이 바로 이기철 이사.
이기철 이사는 당시 음반 업계 2위인 에딘 뮤직의 실장이었는데 지인의 소개로 만난 강감찬 대표와 의기투합했고 이내 자기 학교 선배들을 투자자로 소개했다고 한다.
그게 처음 강감찬 대표가 서예종 라인과 연결이 닿은 계기였다.
그 후 강감찬 대표는 서예종 9기였던 명동 사채 시장의 큰손인 최은태 회장을 만나 투자를 받았고 굴렁쇠의 기틀을 설립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엔 차례로 LSP 그룹의 이상필 회장과 트루엔젤스 투자사의 박형문 대표가 굴렁쇠의 주주로 들어왔고.
그런데 3년 전.
최은태 회장의 양자 최만식 대표가 4번째 주주로 전면에 등장하면서 주주들의 경영 간섭이 심해졌다고 한다.
“욕심 많은 최만식 대표가 오고서부터는 모든 게 바뀌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상장한 뒤에 서로 갈라설 준비를 하던 거죠.”
강감찬 대표도 최만식 대표의 야심과 위험성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말을 하는 강지영 본부장의 표정이 생각 이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괜한 생각인가 싶었지만 확인해야만 했다.
적에 관해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했으니까.
“혹시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아. 내가 정 팀장한테 뭘 숨기겠어요. 네. 최만식 대표. 그 새X가 저 좋아한다고 치근거리거든요.”
“예?”
강지영 본부장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진짜 생각하니 열 받네······”
강지영 본부장이 혼잣말을 하곤 테이블에 놓인 차를 원샷 해버렸다.
“최만식 그 인간. 자기한테 시집오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준다나 뭐라나? 여자는 바깥일 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찰 노릇이다.
내가 현장에서 자유롭게 날뛸 수 있는 건 모두 강지영 본부장이 백업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유능한 사람에게 집에만 있으란 소릴 한다고?
‘미친 거 아냐?’
열불을 내는 강지영을 보며 연신 맞장구를 쳤다.
한참을 불만을 터트린 강지영 본부장이 내 눈치를 본다.
“정 팀장한테는 그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해놓고 정작 난 열을 내고 있네요. 민망하게.”
“아닙니다.”
강지영 본부장이 손부채질을 하다 기분 좋은 이야기나 하자며 강감찬 대표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맞다. 아빠 회복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요.”
“압니다.”
“어떻게 알아요?”
“어제 저한테 전화하셨거든요. 힘든 거 있으면 바로 전화하라고 하시던데요?”
강지영 본부장이 애처럼 볼을 부풀렸다.
“하여간 우리 아빠도 나보다 정 팀장을 좋아한다는 거 같다니까?”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냐는 말에 별말은 아니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안부 전화였으니까.
많이 회복했다는 그 말 한마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강감찬 대표만 오면 몰아치는 적들에게서 버틸 수가 있을 테니까.
그때였다.
인터폰으로 최만식 대표가 도착했단 소식이 들려왔다.
“들어 오시라고 해요.”
테이블에 놓인 차를 치운 뒤 최만식 대표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 * *
최만식 대표는 상석에 앉아 마치 제 사무실인 것처럼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인테리어를 바꿨군.”
“안 바꿨어요.”
“그 그래?”
최만식 대표에겐 공식적으로는 직함이 없다.
그 탓에 두 사람은 서로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만식 대표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묘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아르마니 양복에 파텍 필립.
그리고 몽블랑 커프스에 에르메스 넥타이까지.
마치 회귀 전 내 모습을 보는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이 아닌 게 없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재수 없게 느껴진다.
가진 돈을 뽐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내가······ 저랬었구나.’
회귀 전 내 모습을 보는 듯해 자괴감이 들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을 느낀 최만식 대표가 빤히 쳐다본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사람 별론데?”
“죄송합니다.”
최만식 대표가 싸늘한 웃음을 지은 채 경고하자 강지영 본부장이 대신 나섰다.
“그쪽이 보자고 불러놓고서 왜 보자마자 지적질이에요?”
최만식 대표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강지영 본부장을 진짜 좋아하긴 하는지 날 보던 것과는 표정이 딴판이다.
“지적질이라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윗사람을 그렇게 빤히 보면 안 된다고 충고한 거잖아. 이 정도도 못 해?”
“윗사람 같은 소리 그만하고 할 말이나 빨리하고 가세요.”
이렇게 탐색전은 끝나고 본론이 시작됐다.
“오케이. 그러면 어르신들 말씀 전하지. 체리블라썸. 다음 달에 일본에 보낼 준비를 해 줘.”
“네?”
“여름에 맞춰 골든로드를 일본 현지 모델로 써 보려고 맺었던 계약이 하나 있어. 거기 맞춰 내보내자. 일본어 음반도 내고.”
“그 건은 SNS 파동으로 취소되었잖아요.”
“취소는 무슨. 그 계약은 체리블라썸이 그대로 이어받도록 이야기 끝냈으니까 진행해.”
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통고만 하면 어떻게 하라고요?”
“왜? 이번 활동은 곧 접는다며? 놀면 뭐 해. 일본에 가서 돈 벌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들 좋잖아.”
체리블라썸은 다음 주 음악방송을 끝으로 한동안 휴식기에 들어갈 예정이다.
체력적인 부담 때문에 활동을 접는 건데 바로 일본을 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스케줄도 취소하면서 매일 몸에 좋다는 건 다 먹이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일본 시장이 한국의 수 배나 되기에 욕심이 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설령 체리블라썸의 컨디션이 좋아도 당장 일본에 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현재 굴렁쇠의 일본 쪽 파트너는 야쿠자계 자금으로 설립된 바니즈 계열의 아리스 프로덕션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리스 프로덕션은 야쿠자의 습성을 그대로 가진 터라 정산을 상당히 불합리하게 해준다.
시장이 수 배가 크면 뭐 하나?
정산액이 수십 배가 작은데.
그 탓에 현재로는 한국에서 공연하는 게 더 이득이다.
게다가 현재 강지영 본부장은 강감찬 대표의 업무를 이어받아 주주들 몰래 일본 현지 파트너를 APEX와 AMOSE 그리고 HOSHI PRO 셋 중 하나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올 11월.
그 일에 성공하게 된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1월 24일]
-PM 03:00 일본 파트너 대표 (AMOSE 히로시 대표) 환영 행사. 지하 소강당.
그런 이유로 일본 진출은 반드시 11월 이후가 되어야 했다.
강지영 본부장은 최만식 대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주주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체리블라썸 애들은 지쳐서 활동 못 해요. 준비도 안 되었고요. 절대 허락 못 하니까 그런 줄 아세요.”
최만식 대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주주이신 이상필 회장께서 힘들게 계약을 따낸 건데 그럼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
“기회고 뭐고 불가능하다니까요? 그리고 이런 일은 당사자인 가수 1실과 상의하세요. 골든로드가 친 사고를 왜 체리블라썸에게 떠넘겨요?”
주주 중 한 명인 이상필 회장의 특별요청이라고 했지만 강지영 본부장은 절대 승낙하지 않았다.
애들은 죽어라 고생할 게 뻔하고 굴렁쇠는 큰돈도 못 벌고 주주인 이상필 회장만 배를 불리는 짓이니까.
최만식 대표가 인상을 와락 찡그리더니 이번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 팀장. 자네가 뭐라고 말 좀 해 봐. 일본 진출로 아시아권을 아우르는 스타가 될 기회를 놓칠 셈은 아니겠지?”
“저도 마음은 간절하지만······.”
“간절하지만?”
“지난 10주간 지나친 강행군을 한 탓에 다들 한계입니다.”
“대체 얼마나 안 좋은데?”
“당장이라도 입원을 고려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살짝 뻥을 섞어 말했더니 최만식 대표가 이를 악물었다.
“좋아. 그러면 활동 끝나는 대로 2주 정도만 휴식을 주고 보내는 건 어때? 병원은 최고로 좋은 데 보내줄게.”
“아뇨. 제가 볼 때는 앞으로 한 달간은 못 움직입니다. 저희가 관리하는 건 사람이지 기계가 아니니까요.”
거듭되는 거절에 최만식 대표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하기 시작했다.
“좋은 말로 하니까 부탁으로 들리나 본데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애들 일본에 보낼 준비해!”
순간 강지영 본부장이 화를 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적당히 하시죠? 회사 운영은 저희 쪽에 맡기로 한 거 기억 안 나세요?”
최만식 대표가 강지영 본부장을 노려본다.
“그랬지. 하지만 지금 강 대표가 없잖아.”
“대신 제가 있죠. 그리고 전 절대 들어드릴 생각 없어요. 정 팀장 말대로 걔들 지금 보내면 100% 퍼져요. 애들이 무대에서 쓰러져서 NHK 뉴스에 나오는 거 보고 싶어요?”
“이것들이!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여? 씨X.”
거친 말투 탓에 강지영 본부장이 살짝 움찔거렸다.
하지만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최만식 대표가 열을 받으면 쌍욕부터 하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으니까.
“그만하시죠. 최 대표님.”
순간 최만식 대표의 싸늘한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