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5화
175. 스타일리스트 3
채상우가 원양어선을 타는 걸 막고 고용까지 마쳤다.
하지만 다이어리에 남은 채은별의 죽음에 관한 일정은 그대로다.
결국 채상우에게 병원을 옮기자고 말했다.
여기까지 했는데도 애를 살리지 못한다는 것은 한 가지 이유뿐이다.
이 병원은 아이를 살릴 실력이 없다는 것.
그제야 정신을 차린 채상우는 그런 문제는 아내와 함께 상의했으면 좋겠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는 채상우와 함께 1층 커피숍으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은 채상우는 한결 좋아진 표정으로 아내의 손을 잡았다.
“여보. 나도 굴렁쇠에 취직하게 됐어.”
“뭐? 어떻게?”
“팀장님께서 나도 함께 일하자고 권유하시더라. 직급은 당신보다 밑이지만.”
이미리는 연달아 찾아온 행운에 너무 놀라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두 분 모두 출근하시면 평소에는 간병인을 쓰셔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은별이가 아플 땐 두 분 중 한 분은 반드시 병원에 갈 수 있게 조치해드리겠습니다.”
“티······ 팀장님.”
두 사람이 서로를 얼싸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도란희도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잘됐어요. 언니. 흐흑.”
“고마워 란희 동생.”
‘란희야. 넌 언제 이미리 씨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 거야?’
역시 핵인싸 도란희 다웠다.
이미리와 도란희는 두 손을 잡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1층 커피숍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우리에게 쏠렸다.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더니 이미리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너무 기뻐서 제가 그만······.”
이미리는 눈물을 닦고서 이내 손수건을 꺼내 남편의 눈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 봐요. 여보.”
차상우가 자신의 눈을 닦아주는 아내를 그윽하게 쳐다본다.
가난으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걸 보니 회귀 전 남편이 죽은 뒤 이미리가 정신을 놓았던 게 이해가 갔다.
사랑하는 마음이 깊을수록 절망은 더욱 깊어지는 법이었으니까.
세 사람이 진정하자 조금 전 차상우에게 말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최대한 빨리 아산병원으로 은별이를 옮겨서 재검진부터 받죠. 소아암은 거기가 잘 봅니다.”
“아산병원요?”
회귀 전 채은별은 수술을 받았으면 살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탓에 한시라도 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다.
이미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레 묻기 시작했다.
“저 팀장님. 아무리 회사에서 병원비를 지원해 준다고 해도 체납 병원비만 해도 3천만 원을 넘었어요. 죄송하지만 저희는 가진 돈이 전혀 없어서······”
이미리 부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난이 무슨 죄라고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난 두 사람의 손을 잡으며 용기를 북돋웠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족한 수술비는 제가 먼저 융통해드릴 테니까 천천히 갚으세요. 저랑 오래오래 같이 일하면서요.”
누구보다 빨리 수술을 시키고 싶을 두 사람의 마음을 왜 모를까.
“은별이의 건강만 생각하시고 제 제안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두 부부가 서로를 쳐다보다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러면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정 팀’ 소속의 전속 스타일리스트가 두 명이나 생겼다.
그중 한 명은 미래의 탑 스타일리스트였고.
구두 계약을 마친 뒤 반쯤 남은 커피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절차 밟죠. 따라오세요.”
“지 지금 바로요?”
당황한 두 사람을 데리고서 난 곧장 병원 원무과로 향했다.
* * *
조금 전 일시불로 결제를 한 탓인지 이시국 원무과장이 밝은 얼굴로 날 맞이했다.
“아이고. 이번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불편하신 게 있으며 그냥 전화를 주시죠.”
“병원을 옮기려고요.”
“예? 병실이 아니라······ 병원을 옮긴다고요? 대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못 들으셨습니까? 이 병원에 한시도 있기 싫으니까 전원 준비해 주십시오. 서울 아산병원으로 갈 겁니다.”
원무과장이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암 환자는 나이를 불문하고 돈이 되다 보니 놓치기 싫어하는 거겠지.
특히 돈을 낼 수 있는 보호자를 둔 암 환자라면 더더욱 소중하니까.
“보 보호자 분. 그러니까 진료를 하지 못하게 한 건 병원 내규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까······”
원무과장이 말을 구질구질 길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더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전 여기 두 분 부모님들의 지인일 뿐 보호자가 아닙니다.”
쌀쌀맞은 내 태도에 원무과장이 내 곁에 있는 이미리와 채상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원무과장은 부드럽기가 봄날 햇살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두 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뭘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채은별 환자의 몸 상태를 고려하셔야 합니다. 다른 병원으로 전원시키다 문제가 커질 수도 있으니 찬찬히 생각을 바꿔 보시는 게······”
“돈 없으면 나가라고 병원이 자선 단체냐고 하셨던 거 기억나시죠?”
당황한 원무과장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건.”
“죽기 전에 집으로 데려가 맛난 음식이나 먹이고 보내라고 하신 건 또 어떻고요?”
이미리 부부도 내가 왜 여길 데리고 온 건지 알았는지 속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데리고 오길 잘했다 싶다.
“제가 원무를 책임지는 처지라 윗선의 압박이 심하다 보니······”
말이 막힌 원무과장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채상우가 아내에 뒤질세라 한 몫 거들었다.
“제 아내와 딸에게 했던 모욕.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딸이 죽어가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돈이 없어 치료도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분노가 고스란히 말과 표정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루에 아르바이트 세 개를 하면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상우의 말에는 엄청난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결국 기에 질린 원무과장이 두 손을 들었다.
“에잇! 이래서 없이 살고 못 배워 먹은 인간들을 상종하는 게 아닌데······. 젠장. 마음대로 해!”
당황한 원무과장의 입에서 악담이 터져 나왔다.
녹음이라도 해서 다시 한번 자근자근 밟아줄까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한바탕 울분을 쏟아낸 두 부부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져 있었으니까.
용무를 마친 우리 세 사람은 곧바로 원무과를 나왔다.
“당장 쓰실 돈이 없을 테니 이 돈을 먼저 쓰시고 계약서는 내일 쓰시죠.”
500만 원이 담긴 봉투를 내밀자 이미리와 채상우가 내 손을 부여잡았다.
“지금은 사양할 처지가 아니라 염치없이 받겠습니다. 대신 10배로 일하겠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출세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뉴욕 패션계에서도 최고로 화려하게 살 수 있었던 두 사람이다.
그런 이들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오로지 자신의 딸을 위해서.
부모를 가져 본 적도 부모가 되어 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저들의 심정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두 사람의 희생적인 모습에 한편으로는 경외감마저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은별이를 아산병원으로 이송했다.
재검진을 받고 치료 방향을 잡기 위해 1인실을 잡았다.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환경에 은별이가 날 꼭 껴안고 감사 인사를 해왔다.
“감사합니다! 삼촌.”
은별이는 이젠 삼촌이라 부르며 제법 친해진 티를 내었다.
“은별이가 빨리 건강해져야지. 치료가 힘들어도 잘 참고. 약속.”
“약속!”
“도장?”
“도장!”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 도장까지 찍은 뒤에야 맞잡은 손을 풀었다.
난 내친김에 병과 싸워나가는 은별이에게 조그만 목표라도 가질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이겨나갈 동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은별아. 조만간 그림 그리기 책들 가져다줄게. 색연필도.”
“색칠공부는 폰 어플로 하는데요?”
“그 그래?”
“그래도 삼촌이 가져다주시면 해볼게요.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폰만 가지고 논 거 같아요.”
“알았어. 그러면 그거랑 우리 은별이가 내년에 쓸 책가방이랑 필통 그리고 공책 같은 것도 사다 줄게.”
순간 은별이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진다.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감추지 못하는 게 보인다.
“진짜요?”
“응. 근데 왜 그렇게 좋아해?”
“저······ 진짜 학교 가고 싶었거든요.”
“아······.”
별것 아닌 준비물이었지만 하루하루 죽을 날을 기다리던 은별이에겐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듯했다.
덕분에 은별이의 얼굴에 남들처럼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어리는 게 보였다.
“삼촌이 꼭 사 올게! 약속.”
“약속~.”
은별이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내 곁에 있는 이미리와 채상우의 얼굴에 다시금 눈물이 고이는 게 보였다.
잠시 후.
1인실의 문이 열리며 담당 주치의가 들어왔다.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이미리와 채상우와 함께 앞으로의 치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자세한 건 재진료를 해봐야 알겠지만 한마음병원에서 보내온 차트를 보니 굳이 수술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선생님?”
수술할 필요가 없다고?
두 사람만큼이나 나 역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김오준 교수가 밝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요즘은 소아백혈병 정도는 골수 이식 없이도 치료 가능합니다.”
소아백혈병은 한때 무서운 병이었지만 최근엔 항암제 치료만으로도 상당히 좋은 치료율을 보이곤 한다고 한다.
그 탓에 골수 이식이라 불리는 조혈모세포 이식은 최대한 지양하는 게 지금의 추세라나.
“또 저희 병원이 도입한 항암제가 상당히 예후가 좋습니다.”
“수술 없이도 치료될 수 있다는 거. 정말인가요?”
이미리의 질문에 김오준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희 병원의 경우 소아암 환자의 92% 정도는 항암제만으로도 완치가 됩니다. 100%는 아니라서 속단하긴 힘들지만 일단 긍정적으로 접근해 보자는 거죠. 대부분 소아백혈병이라고 하면 골수 이식만 생각하시니까요.”
이미리와 채상우가 들뜬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본다.
순간 내 곁에 앉아 있던 은별이가 내 팔을 톡톡 두드린다.
“은별아. 왜?”
“삼촌. 나 수술 안 해도 되는 거 맞죠?”
“확실한 건 확인해 봐야겠지만 그런 거 같은데?”
채은별이 작게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무서웠는데.”
“그랬어?”
“네. 저 사실 엄청 겁 많거든요. 우리 엄마 닮아서.”
회귀 전 이미리의 별명은 ‘얼음 마녀’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오로지 딸이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눈물 많은 엄마였다.
늘 짧은 숏컷으로 날카롭게 미간을 찌푸리던 과거와 달리 단발머리를 아무렇게 질끈 묶은 채 틈만 나면 눈물을 흘려대는 보통의 엄마 말이다.
* * *
병원을 나오자마자 다이어리를 살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1년 2월 1일]
-PM 08: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이미리 스타일리스트의 외동딸 채은별. 한마음병원장례식장. 화환 배송.)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후우~ 이젠 안 죽나 보네.”
무조건 골수 이식을 하자는 한마음병원과 달리 더 좋은 신약으로 항암치료를 하는 서울 아산병원에 옮긴 게 옳은 선택이었다.
당연히 미래를 위하여 내린 선택.
회귀했다는 사실이 어떤 때보다 기분 좋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회사로 먼저 돌아가 강지영 본부장에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알렸다.
“잘됐네요. 혹시 돈이 너무 많이 들면 제게 말씀하세요. 저도 부족한 돈은 융통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차후의 경과는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저도 아이가 꼭 나았으면 좋겠네요.”
흐뭇하게 웃으며 잘될 거라 말했다.
다이어리로 확인한 내용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이 평상시와는 달리 잔뜩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저기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긴 한숨을 내쉰 강지영 본부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혹시 최만식이라는 이름. 들어보셨어요?”
최만식?
안다.
굴렁쇠 엔터의 주주 중 한 사람으로 김동수를 후원해 굴렁쇠 엔터를 반으로 쪼개는 데 큰 역할을 한 인간이니까.
김동수가 극진히 모셨던 돈 많은 전주로 한마디로 개 같은 인간이다.
아니 개 같다고 하니까 개한테 막 미안해진다.
정정.
개보다 못한 인간이다.
“예. 압니다. 회사 주주 중 한 분이시잖습니까?”
“예. 그분이 지금 회사로 들어오시겠다고 연락이 왔거든요. 근데 정 팀장을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절요?”
굴렁쇠 엔터의 주주 사인방 중 가장 젊은 최만식 대표가 지금 회사로 오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날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잘하면.
굴렁쇠 엔터가 쪼개지게 된 진짜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강지영 본부장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