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4화
174. 스타일리스트 2
“후우. 후우.”
호흡곤란에 시달리던 채은별은 의사의 긴급 처치가 끝나자 다시 상태가 좋아졌다.
숨소리도 고르게 변하자 백지장처럼 하얗던 채은별의 안색에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치료를 마친 의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저도 의산데 이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각각의 사정이 있다는 걸 안다.
눈앞의 의사도 경영진이 시켰기에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는 것도 짐작이 갔다.
조금 전 두 손을 불끈 쥐고 눈을 꼭 감는 게 의사 본인도 괴로워 보였으니까.
하지만 당장 아이가 숨이 넘어갈 듯한데 손도 안 쓰는 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분명 어떤 경우에도 사람 살리겠다는 그 맹세는 이 병원과 이 의사에게는 적용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탓에 난 의사가 나가는 동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외면했다.
‘옮겨야겠다.’
내 눈으로 이 병원의 치료 거부행위를 본 이상 채은별을 이곳에 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주변을 감싼 적막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고개를 돌아보니 6인실에 있는 모든 환자와 보호자들이 다들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넋을 놓고 있던 이미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누구······세요?”
이미리와 채상우는 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왜 어마어마한 체납 병원비를 내주는지.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 팀장이라고 합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시죠.”
채상우와 이미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힘들게 참는 게 보였다.
일단 난 채은별의 상태부터 살폈다.
“괜찮아? 이제 좀 숨 쉴 만해?”
병실에만 있어 햇볕을 쐬지 못한 탓인지 피부가 하얗다 못해 새파란 채은별이 눈을 깜빡이며 날 쳐다본다.
약이 잘 들었는지 아까보다는 편해진 얼굴이다.
“네. 이제 안 아파요.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아저씨 아닌데 삼촌인데?”
아팠을 텐데도 어른스러운 태도로 대꾸하는 모습이 조금은 놀라웠다.
“음. 알았어요. 그러면 삼촌은 누구세요? 혹시 키다리 아저씨? 그러면 병원비가 나중에 제가 커서 다 갚을게요.”
영특하고 밝은 아이였다.
채은별과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이는 돈 같은 거 신경 쓰는 거 아니야. 그리고 난 은별이 엄마랑 같이 일할 사람이란다.”
이미리와 채상우가 화들짝 놀라는 게 보였지만 모른 척하고 계속 채은별과 대화를 이어갔다.
“엄마랑 일한다고요? 우리 엄마는 맨날 나랑 같이 있어서 일 못 하는데요?”
“이제부터 같이 할 거야. 그래서 말인데 삼촌이 엄마 좀 잠깐만 빌려 가도 될까? 엄마랑 이제부터 자세히 이야기해 봐야 하거든. 아 아빠도 좀 빌려줄래?”
채은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혼자서도 있을 수 있어요. 나 인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산소마스크를 낀 채은별이 두 주먹을 쥔다.
괜찮다면서 여전히 파리한 입술로 아빠와 엄마를 데려가라면서.
주사를 맞아도 아픔이 쉽게 가실 리가 없다는 걸 안다.
죽기 전까지 병원에서 고통을 참고 연명했던 나였기에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채은별은 내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러면 우리 은별이. 파이팅 할까? 이깟 병한테 지지 말기!”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채은별이 웃으며 내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가져다 대며 주먹 인사를 한다.
“파이팅!”
채은별이 생글거리며 미소를 짓는다.
‘반드시 고쳐줄게. 은별아.’
이미 조사를 끝내고 왔지만 은별이 병은 제대로 된 치료만 받으면 살릴 수 있는 병이다.
돈은 좀 들지만 그럼 어때.
이럴 때 쓰기 위해 번 돈인데.
그렇기에 자신 있는 표정으로 채은별을 안심시켰다.
채은별과 인사를 나누고 나자 그제야 뒤편에 있던 채상우가 쭈뼛대며 말한다.
“은별아. 엄마랑 아빠 삼촌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괜찮아?”
“응. 아빠. 나 이제 괜찮아?”
순간 이미리가 옆 침대에 있던 40대 중반의 여자에게 말했다.
“지수 엄마. 우리 은별이 좀 봐줘요.”
“그 그래. 알았어요.”
병실의 모든 사람이 여전히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인사를 한 뒤 병실 밖으로 나서자 이미리와 채상우가 날 따라 나왔다.
* * *
달칵.
문을 닫고 나자 두 사람이 허리를 반으로 굽힌다.
“가 감사합니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이 치료비는 저희 부부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내 손을 꽉 붙들었다.
덜덜 떨리는 두 사람의 손에서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한 떨림이 느껴졌다.
허리를 굽힌 두 사람의 눈에서 바닥으로 눈물이 연신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고개 드세요.”
이미리와 채상우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눈물범벅으로 얼굴은 엉망이 되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한 줄기 희망이 담겨 있었다.
“저기 그런데 저희 아내와 일을 하시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채상우가 무슨 일을 하게 되냐 묻자 이미리가 뭔가 오해를 했는지 다급히 남편의 입을 막았다.
“아녜요. 뭐든 할게요. 시켜만 주세요. 팀장님이라고 하셨죠?”
채상우가 화들짝 놀라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아 아냐 여보. 일을 고르겠다는 말이 아니야. 당연히 해야지. 그런데 당신 엔터 회사에서는 일한 적이 없잖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아야지.”
“뭐든 하면 되지. 할 거야. 아니 해야 해. 우리 딸 목숨 구해주셨는데 내가 뭔들 못해?”
이미리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뒤 내게 말했다.
“엔터 회사라고 하셨죠. 아이돌 가수? 누굴 맡겨주셔도 다 완벽하게 입힐 수 있어요. 저 지금 이래도 뉴욕 보그지에서······”
“알고 있습니다.”
“예?”
“레이첼 편집장님 밑에서 일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말하자면 긴데 일단 여기 제 명함부터 받으시죠.”
두 사람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명함을 받았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 팀장입니다. 이미리 씨가 제 팀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해주셨으면 해서 찾아왔습니다.”
“코디가 아니라 스타일······리스트요?”
“아 코디라고 부르는 게 편하실까요?”
“아 아뇨. 스타일리스트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해요. 한국에서는 코디라고들 하길래 그만.”
“뭐 다들 섞어 쓰긴 하죠. 그래도 요즘은 스타일리스트라고 부르는 비중이 많이 늘었습니다. 하여간 구체적인 건 여기서 말고 병원 1층에 커피숍에서 말하면 안 될까요? 보는 눈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아. 예!”
그때였다.
1층으로 내려갔던 도란희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팀장님.”
“왜?”
“액수가 커서 직접 사인하셔야 한다는데요?”
“아? 그래?”
괜히 의사한테 큰소리를 쳤나 보다.
난 세 사람과 함께 1층으로 향한 다음 원무과로 향했다.
얼굴에 기름기가 잔뜩 오른 원무과장이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혹시 어떤 관계이시길래 이렇게 큰돈을 일시불로······”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일시불로 해드릴까요? 한도가······”
“그냥 긁어보세요.”
조금 전 이미리와 채상우가 복도에서 대화를 나눌 때부터 채은별의 병실로 들어갈 때까지 모든 대화를 다 들은 나였다.
눈앞의 이 원무과장이 진료를 막았다지.
원무과장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카드를 꽂았다.
금액은 무려 3222만 원.
조금 전 의사의 처치가 10만 원짜리였나 보다.
아무런 제한 없이 카드를 긁을 수 있게 된 순간 원무과장의 얼굴이 환하게 변하는 게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그로서는 일시불로 3천만 원을 긁는 VIP로 보였을 테니까.
“하하하. 이제 저도 마음이 후련하네요. 사실 환자들에게 모질게 구는 게 사람이 할 짓이 아니거든요.”
“아. 예.”
“여기 제 명함입니다. 보호자님도 명함 한 장 주시겠습니까?”
원무과장이 허리를 반으로 숙였다.
고작 일시불 카드 결제 한 번에 말이다.
하지만 난 그의 인사에 일절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가 인사한 건 내가 아닌 일시불로 긁을 수 있는 내 카드였으니까.
* * *
병원 1층 커피숍.
도란희에게 커피를 사 오라고 하고서 이미리에게 연봉과 조건을 이야기했다.
“일단 연봉은 5천만 원에서 시작하고 병원비로 2천 한도 내까지 회사에서 복지로 지원하는 조건입니다. 직급은 대리고요.”
이미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대리 연봉이 그렇게 높죠?”
“하하. 이미리 씨의 경력을 일부 인정하는 취지입니다. 사실상 팀장급 연봉입니다.”
스타일리스트는 하는 일이 고된 데 비해서 엄청난 박봉이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제시한 건 최소 팀장급 대우였다.
강지영 본부장에게 엄청나게 어필한 끝에 이미리의 커리어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미리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입술을 꾹 깨물고 대답했다.
“제 사정이 이래서 과한 조건이지만 염치불구하고 그 제안 받겠습니다. 팀장님.”
곁에 있던 채상우 역시 기쁜 표정을 짓더니 내 손을 꽉 하고 부여잡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여보. 선생님이 아니라 팀장님이셔.”
“아 그래. 팀장님. 그리고 저도 열심히 일해서 최대한 빨리 돈 갚겠습니다. 제 아내도 꾀부리는 사람은 아니니까 절대 돈을 떼먹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이미리와의 대화가 끝나자 채상우에게 잠깐만 따로 이야기하자 말했다.
“저랑요?”
“예. 이미리 씨는 잠시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드리고 둘이서만.”
“아 예.”
그사이 도란희가 커피를 가지고 왔다.
난 여전히 눈물을 글썽이는 이미리를 도란희에게 맡겨두고 채상우와 함께 병원의 1층 공원으로 이동했다.
채상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한다.
“혹시 돈 문제라면 제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딸을 위해선 두 부부가 모든 걸 희생할 각오를 했다며 인상을 굳혔다.
“아 그런 게 아닙니다.”
채상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무슨 일로 절 따로 부르셨는지?”
“상우 씨도 미국에서 패션 잡지 에디터로 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GQ의 편집장인 테리와 함께 일하셨죠?”
“어 어떻게 그걸······”
채상우 또한 미국의 남성 잡지 GQ에서 일하던 에디터였다.
비록 현재는 그 경험과 상관없이 한국 동대문시장에서 의상 운반을 하고 있지만.
“그래서 말인데 채상우 씨도 혹시 저랑 같이 일을 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예?”
“두 분을 한 번에 특채로 채용하기는 사정이 힘들어서 채상우 씨 연봉은 일반 직원과 비슷한 수준에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팀의 규모가 커지는 대로 채상우 씨도 경력에 맞는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채상우는 설마 자신도 취업 제안을 받을지는 몰랐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 죽어버린 사람이라 그의 직접적인 실력을 알진 못한다.
하지만 그 또한 뉴욕 GQ 본사에서 5년 이상 일한 전문가.
이미리가 여성 스타일을 맡고 채상우가 남성 스타일을 맡기면 딱일 것만 같았다.
그런데 채상우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아. 죄송합니다. 팀장님. 마음 같아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하고 싶은데······ 미리 계약한 곳이 있습니다.”
채상우가 입술을 꽉 깨문다.
이미 방법이 없다는 듯 말이다.
난 채상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양어선 타려고 하시는 거죠?”
“그 그걸······ 어떻게?”
“병원비를 내겠다고 너무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길래 짚어봤습니다. 원양어선 말고는 선금을 수천만 원이나 주는 데는 없잖습니까?”
회귀 전 원양어선을 타다 죽었으니 그가 돈을 마련할 곳은 한 곳뿐이었다.
놀란 표정의 채상우에게 재차 물었다.
“벌써 선금을 받은 건 아니죠?”
“지금은 선장님을 소개해 주겠다는 분과 만나서 가계약만 했습니다.”
“잘됐네요. 그러면 계약 해지가 쉬울 거 같습니다. 그리고 계약 해지를 하실 때는 저희가 변호사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채상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계약하면 못 물린다던데······.”
“그런 게 어딨습니까?”
난 채상우와 계약한 원양어선 브로커의 연락처를 곽무혁 팀장에게 보냈다.
예상했던 것처럼 곽무혁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걱정하지 마. 이런 브로커들은 생각보다 힘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마음 푹 놔.
“감사합니다. 팀장님.”
곁에서 전화 내용을 듣던 채상우의 얼굴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전화를 끊은 난 잠시 채상우를 놓아두고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그런데 채은별이 죽는다는 일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1년 2월 1일]
-PM 08:00 이미리 스타일리스트의 외동딸 채은별. 한마음병원장례식장. 화환 배송.
‘역시 안 사라지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